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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김정한 칼럼] 지금은 ‘고독’이 필요한 시간

김정한 시인 | 기사입력 2017/10/24 [14:02]

[공감신문 김정한 칼럼] 지금은 ‘고독’이 필요한 시간

김정한 시인 | 입력 : 2017/10/24 [14:02]

[공감신문] 책장 정리를 하다가 교직생활 시절 교무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이십대 중반에 담임을 맡아 힘들었던 순간의 나날이 메모되어 있었다. 중간중간에 적혀있는 한 편의 시가 있고 유독 '아이들이 예쁘다', '고독', '인간관계가 어렵다' 란 문구가 많았다. 미루어 짐작컨데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고독'하고 버거웠나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6시 반에 출근해서 야간 자율학습 끝나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릴 정도이니까.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으니까. 열정이 화수분처럼 샘솟는 이십 대 중반 시간이었으니까. '고독'한 승부, 열정 하나로 버틴 것이다.

 

그러나 퇴근을 하고 나면 익숙한 나만의 '고독'에 빠졌다. 교무수첩에 크고 굵직하게 쓰인 '고독'이라는 단어 하나에 그때 그 시절의 내 삶의 상태를 대변해주었다. 좌충우돌 하는 이십 대 중반에 나는 '고독' 안에서 삶의 해답을 찾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니 '고독' 안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분명 포함되어 있다.

 

사진=Pixabay

누구나 그렇지만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 일도 일이지만 평생의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각하면 늘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고독'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버릇도 이십 대 중반 심하게 '고독'을 앓았을 때였다. '고독'하고 또 '고독'했기에 아이들에게 더 몰입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만날 시간에 나는 '고독'과 연애를 했으니까. 그것이 지금 작가로 살게 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으니까.

 

'외로움'과 '고독'은 같은 것 같지만 분명히 다르다. 영어로 '외로움'은 loneliness, '고독'은 solitude 다. 모두 혼자라는 의미이지만 '외로움'은 누군가가 곁에 없어 불안하다는 것이고, '고독'은 상대가 없어도 혼자 있는 것이 자유롭고 또 그것을 즐긴다는 거다. '외로움'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고독'은 혼자 있어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외로움'은 불안, '고독'은 자유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고독'은 굳이 상대가 필요치 않아 잘 다스리면 든든한 내적 성장을 이끈다.

 

아마도 나의 예민한 감성이 내밀한 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면 불쑥불쑥 나타났던 것이 '고독'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좀 더 깊이 '고독'에 빠져들었다. 함께 어울리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함께 무언가를 하는 만들어내는 것이 조직생활의 맛인데 난 그 반대였다.

 

아이들과 하는 시간에서는 성취감도 맛보고 즐거웠다. 그러나 교무실로 들어오면 미치도록 '고독'했다. 교무실, 교실과 운동장은 시끄러운데, 그 가운데서 난 기꺼이 즐거게 '고독'과 휩쓸렸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고독'의 늪에서 춤을 추었다.

 

사진=Pixabay

릴케가 쓴 '로댕론'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로댕은 무명시절에는 참으로 고독했지만 유명해지고 나서는 더욱 고독했다" 이 문구를 읽은 이십 대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에 흐른 지금에서야 아스라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그렇다. 홀로 있던, 둘이 있던, 가족과 있던, 연인과 있던 무엇을 하든 누구나 '고독'하다. 다만 '고독'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뿐이다. '고독'이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 속으로 빠져들어가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을 때 민낯의 순수한 나와 마주한다. 가장 순수하면서도 '고독'한 나를 만난다. 그때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정직하고 적나라한 내 모습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 순간이 오면 '나를 누구인가, 왜 사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다시 말해 가장 '고독'한 날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생이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고 그 대답을 찾아 노력하게 된다. 또 지난 시간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것이 최선이었던가를 점검도 하고 반성도 한다. 이전의 삶,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선과 악을 되짚어 보며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찾는 귀한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바로 참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고 또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독'한 나의 참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또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응원하고 용서하고 칭찬하겠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청춘시절 나는 '고독'한 영혼 속에서 많은 것을 꿈꾸었다. 첫째는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충실한 선생님이 되기를 꿈꾸었고, 둘째는 가치 있는 생을 살기 위해 글 쓰는 것도 놓치기 싫었다. 또 세 번째로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를 썼다. 5년 후에는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 왕족으로 살리라 꿈꾸었다. 그러나 낯가림이 심해 타인과의 소통이 매끄럽지 못해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차단을 시켜 꿈같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런 이유로 은둔의 시간은 길어져 나의 '고독'을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위로하며 타일렀다. 그리고 주문했다. '괜찮아, 어떤 경우에도 비굴하지는 말아' 그럼에도 궁핍하게 되면 금기와 금욕과 겸허함으로 수도승(修道僧)처럼 살면 돼. 어떠한 경우에도 정직하고 자존감을 잃지 말아. 어쩌면 청춘시절부터 단련되어 익숙해진 '고독' 때문에 지금의 단단한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 숱한 '고독'한 날에도 끊임없이 나를 재촉하고 절제하며 응원하고 위로했다. 고독함을 탓하지 않고 진심으로 동정하며 살았기에 '고독'한 글을 사명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독'의 글을 사랑하게 된 것도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감히 나는 고백하고 주장한다.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 마구 사정없이 무엇에 휘둘릴 때는 '고독'에 풍덩 빠져보라고.

 

'고독'이 인간을 얼마나 순수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길들이는가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하는가를. 그래서 지극히 작고 평범해도 충분히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가를. '고독'에 빠져보면 깨닫게 된다는 것을 감히 주장한다. '고독'과 연애를 하면 무언가가 보이고 손에 잡힌다는 것을.

 

사진=Pixabay

청춘시절의 '고독'이 얼마나 많이 나를 훈련시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는지를. 여리디 여린 나에게 많은 성숙을 안게 해 준 '고독'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돌이켜보면 '고독'했던 시간이야 말로 축복의 시간이었다. 적당히 주고받으며 살고 싶을 때마다 '고독'과 마주하며 민낯의 나를 만나 울었던 시간, 남보다 더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여 주저앉은 나를 홀로 일으켜 세워 위로했던 시간, 너무나 아름다운 유혹에 휘둘려 휘청 거었을 때 나를 잡아주던 '고독'이 있었기에 대단한 존재가 되지 않았어도 정확하게 나를 찾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없이 '고독'할 때에는 어둠 속에 촛불을 켜라. 내밀한 나를 불러 내어 마주 하라. 벌거벗은 나와 마주하라. 한없이 '고독'하고 순수한 나에게서 생의 간절한 깨달음 보게 되리니. '고독'은 결국 나를 찾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되고 살게 하는 힘을 주는 멋진 깨달음이라는 것을.

 

생에 있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큼 아름다운 진실은 없다. 아프고 싶고, 울고 싶고, '고독'하고 싶으면 그들 속에 빠져라. 푹 빠졌다가 깨어나면 모든 게 선명해지고 심플하게 정리가 된다. 고통의 쓴 즙을 담대하게 마셔버리면 아픔이 무엇인가를, 눈물이 무엇인가를, '고독'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그 이후의 시간은 짐작하리라. 작은 것에도 새로운 빛을, 웃음을, 만족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생의 진정한 가치는 행복이고 행복은 느낌이니까.

 

사진=Pixabay

그대, 가없이 행복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고독'하라. 정직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고독'하라. 순결하게 치명적으로 아파하라. "살고 싶다.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싶다"는 비명소리가 들릴 때까지. 푹 젖을 때까지 '고독'에 빠져 있으라. 참으로 잘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가을, 한 마리의 왜가리가 돼라.

 

백로와 함께 살지만 백색이 아니라 한없이 슬픈, 기다림에 익숙한 '고독'한 왜가리가 돼라.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보내는 한 마리 물새가 되어 보라. '고독'과 아낌없이 연애하라. 외부의 힘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고 나 자신이 중력의 중심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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