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당한 뜻밖의 시련…새로운 추억으로

[공감신문=조병수 프리랜서] “미라보 다리아래 센 강은 흐르고 그리고 우리들 사랑도 흐른다”라고 시작되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흥얼거리고, 『파리는 안개에 젖어』라는 영화를 보면서 눈으론 울면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던 ‘페이 더너웨이’의 표정연기에 빠져들던 젊은이가, 프랑스 파리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저기에 진짜 나폴레옹이 누워있나?', '모나리자의 미소라는데 난 별로야', '센 강을 보니 한강은 정말 큰강이구나'같은 생각을 해가면서 유모차를 끌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었다. 지금은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잊었지만, 해산물이 즐비하게 진열된 조그만 식당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 안에서 무언가를 맛있게 먹어보기도 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서 갓 지은 밥에다 통조림깻잎 하나 올려서 입안에 넣을 때 하루의 피로를 일시에 날려주던 그 맛까지, 파리는 그렇게 여러 가지 아련한 추억들을 남겨준 곳이었다.

그 도시를,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서야 다시 가보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도버해협을 건너서 칼레에서 파리의 개선문까지 약 300km를 단숨에 달렸다. 숙소를 찾느라고 제법 혼이 났지만, 짐을 풀자 말자 곧바로 추억을 더듬는 여정을 시작했다.

우선,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루브르 궁전으로부터 교외로 사냥 나가기 위해서 1616년에 센 강 주변의 늪지대 채소밭에 여왕의 길을 내게 하고, 루이14세가 이 길을 확장하여 1709년 샹젤리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향했다.

하지만 밀려드는 차량의 홍수 속에서, 개선문 근처에 내려서 어쩌고 할 경황이 없었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기에 그냥 에펠탑으로 향했다. 그래도 높은 곳에서 시가지를 조망하고 센 강에서 유람선 한번 타보면 처음 파리에 온 딸에게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 전날 영국에서 인터넷을 보던 딸이 "소매치기 횡포를 막아달라며 에펠 탑 종사 직원들이 파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정상화되어 있었다. 소매치기 파동 때문인지, 도처에 보이는 경찰들과 소지품을 앞으로 감싸 안으면서 주변을 경계하는 관광객들의 모습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엄청 많아진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많은 인파 사이로 안내원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도 수십 년의 세월 동안에 달라진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 도시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연휴기간이라서 그런지 에펠 탑 전망대나 부근의 센 강변은 완전히 북새통이었다. 강가에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길래 옛날의 그 유람선 인줄 알고 탔더니, 배가 출발하고 나서야 전에 탔던 바토 뮤슈(Bateau-Mouches) 선착장이 강 건너편에 보이길래 혼자서 실소(失笑)를 머금었다.

석양 무렵의 아름다운 센 강 주변 경치에, 여기저기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도심에 서서히 어둠이 내려 깔리자, 다리와 강변의 건물들을 비추는 은은한 불빛들과 에펠 탑의 현란한 조명이 ‘빛의 도시’라는 파리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듯이 더욱 흥을 돋우었다. 배 안의 모든 관광객들이 일어나서 환성을 지르며 때마침 보름달이 걸려있는 에펠 탑의 야경(夜景)에 빠져들었다.

<파리 에펠 탑>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을 가족들을 위해서 다음날은 느지막이 출발해서, 기독교 성지이자 “19세기 초부터 화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왔었다”는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했다. 그 언덕의 사크레쾨르 성당 옆,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주변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광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별로 바뀐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곳에서 이름 모를 화가들의 소품들도 한두 점 고르고, 바로 옆의 식당에서 한잔의 여유까지 부려보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

몽마르트르 언덕을 뒤로하고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큰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차들이 붐벼서 서행하고 있는데, 오토바이가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뒤 바퀴가 펑크가 났다"고 손짓을 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보니 정말 오른편 뒤 타이어가 납작해져 있었다.

보조타이어가 있으면 갈아 끼워나 보려고 잭 킷(jack kit)를 찾고 있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와서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차 트렁크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까 그 오토바이 타던 친구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어중간하게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무언가 어색한 동작 끝에 손가락을 다쳤다. 전혀 상처까지 날 상황이 아니었고, 느닷없이 주머니에서 일회용밴드를 꺼내서 붙이기까지 하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래도 도와준다니까 일단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잭으로 바퀴를 약간 들어올리더니 바퀴잠금을 푸는 공구를 찾는다면서, 이번에는 차 앞자리의 글로브 박스와 콘솔박스를 살폈다. 그러더니 뒷자리까지 넘어가서 여기저기를 뒤지면서 놓여있던 카메라와 가방 등을 앞자리로 옮겨놓는 것이었다. '이 사람, 공구를 왜 차 안에서 찾고 이러나?' 싶었다. 뒷자리에 놓여있던 손 지갑을 앞으로 옮길 땐 손끝이 미세하게나마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약속이 있다면서 어딘가로 핸드폰을 하고는, 우리 일행을 차 뒤쪽으로 불러 세웠다. 차 가까이서 지켜보던 둘째 딸까지 자기 쪽으로 불러 세우면서, “ 저 뒤쪽으로 돌아가면 정비소가 있으니 거기 가서 도와달라고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데 아내가 갑자기 “야, 도둑이다”라고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차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차에서 막 빠져 나오는 남자를 막아 서며 팔을 붙잡고 “뭐야? 내놔!"라고 하고 있고, 동시에 달려간 둘째 딸이 그 남자의 뒷덜미 옷깃을 잡고 섰다.

'저러다 다치면?'이라는 생각이 스쳐가는 사이에, 우리를 도와주는 척을 하던 녀석이 뭐라고 짧게 한마디 하니까, 옷깃이 잡혀있던 남자가 자신의 패딩 조끼를 벗어 던지고는 달아나버렸다. 도와주는 척 하던 녀석에게 "너도 한패지?"라고 딸이 쏘아붙이자, 먼저 도망치는 남자를 잡으려는 척하면서 같이 달아났다. 미심쩍긴 했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크고 유명하다는 백화점으로부터 300미터도 안 되는 번화가에서, 대낮에 “도둑 잡아라”, “훔친 것 내놔라”하는 한국말 고성이 터져 나오고, 도둑이 가방을 뒤지려고 손에 들었던 휴지조각들이 르 피가로(Le Figaro) 빌딩 앞 오스만 가(街)에 흩날리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살펴보니까 다행히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파리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뉴스를 듣고는 가방 안에 휴지를 잔뜩 넣어두고, 도와준다며 접근한 녀석의 사진까지 찍어두는 딸들의 경계심과, 주위를 살피다가 “차 안에서 뭔가 곱슬머리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자 말자 순식간에 내달린 아내의 순발력과 용기 덕분이었다.

그렇게 도둑을 쫓는 바람에, 여권과 여행경비, 소중한 장면들이 담긴 카메라 등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더구나 ‘다음날이면 다시 런던을 경유해서 귀국을 해야 되는데 여권을 잊어버렸다면 어찌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긴급한 상황은 끝났지만, 자동차 펑크와 그들의 유류품 처리를 위해서라도 경찰에 신고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근처의 호텔에서 도움을 받아 AA(영국자동차서비스협회)긴급지원서비스 신청을 마치고 온 큰 딸과 아내에게 현장을 맡겨두고, 둘째 딸과 함께 도둑이 남기고 간 조끼와 그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들고 인근 경찰서로 갔다.

“길거리에서 도둑을 맞을 뻔 했고 그들이 남기고 간 물품을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한참 만에 한글이 같이 쓰인 신고서 양식을 건네주면서 “내용을 적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잊어버린 것이 있느냐?”고 물은 뒤로는 더 이상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안내데스크의 경찰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도 못들은 척했다.

“좀 전에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을 때, 좀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더니, “그러는 당신은 왜 프랑스어를 못하느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매너 없는 그 경찰관하고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도둑을 잡던지 말던지 그냥 그들의 물건들을 두고 가겠다”고 하니까, 자기들은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그때 대기 의자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여인이 “자기가 영어를 할 줄 아니까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면서 “프랑스 법에는 그렇게 되어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길가던 과객(過客)의 상식으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내 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것이니 여기다 두고 가겠다. 알아서 해라”고 하면서, 그 경찰관의 책상 위에 던져두고 나왔다.

바로 문 앞에 기관단총을 들고 방탄복을 입은 경찰들이 지키는 곳에서, 겁도 없이 안내데스크 경찰관을 향해서 눈총을 주고 나오다 보니 갑자기 등골이 써늘해져서 걸음을 서둘렀다.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견인차가 왔는데, 펑크를 때울 장비는커녕 바퀴잠금을 풀 도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긴급출동서비스가 생각났다. 삼십 년 전의 우리나라에는 이런 서비스 제도조차 없었었는데,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록 토요일 오후였지만, ‘세계적인 렌터카 회사가 영업하는 파리 시내니까 쉽게 다른 차로 대체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견인해 가야 된다”고 했다. 타이어 펑크 하나 해결하는데 그렇게도 문제가 많은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현지의 실정이 그렇다니 방법이 없었다. 일단 다음날 아침까지는 결과를 기다려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AA에서는 “주말이라서 수리가 안되니, 런던 행 기차표나 항공편을 예약해주겠다. 차는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다. 파리를 가보고 싶다던 둘째 딸은, 도착 첫날부터 숙소와 식당, 택시 같은 곳에서 연이어 부딪히는 상식 밖의 일들과 백주대로의 도둑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한시라도 빨리 파리를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출발하는 편으로 AA에서 예약해둔 유로스타 기차를 타러 파리 북역(Gare du Nord)으로 갔다. 그런데 대합실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남자가 아내의 배낭을 열려는 것을 알아챈 딸 덕분에 또다시 위험을 모면했다. 고함을 질러도 아닌 척하고 유유히 걸어가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면 말고’인가? 정말 어디서 어떻게 덤벼들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영국 행 입국심사를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서서야 겨우 안도감과 함께 경계심의 끈을 늦추게 되었다. 소매치기의 공포에서 벗어나니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예상치도 않게 기차 내에서 점식이 제공되는 바람에 한결 기분이 나아졌는데, 그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여행에 대한 사전준비가 소홀했던 탓도 있지만, 아름다운 경치하고는 달리 도저히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던 센 강변의 샌드위치, 테르트르 광장 식당의 어설픈 요리, 씹어 삼킬 수 조차 없었던 샹제리제 길가 식당의 스테이크 등으로 상처받았던 ‘프랑스의 맛’을, 떠나는 기차에서야 다시금 되살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잔의 와인을 곁들이는 사이, 지난 며칠간의 갖가지 일들이 봄눈 녹듯 사르르 흘러내렸다.

<유로스타 기차에서 제공된 점심>

이렇게 편안한 기차여행을 두고 왜 차를 끌고 갔었는지 슬며시 후회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자동차를 빌릴 때 추가비용을 내고 유럽 행 전손보험(full coverage)을 들어놓지 않았으면 어쩔뻔했나’ 싶었다. 공항까지의 택시예약에, 유로스타 기차표에, 런던에서의 렌터카까지 전부 준비해준 AA의 서비스를 경험해본 것만은 의외의 반전이었고, 멋진 경험이 되었다.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에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제서야 사람 사는 곳에 돌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즐기며 걸어나가는데, 한 무 리의 우리동포들이 각자 큰 가방 하나씩을 끌면서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우리와 같은 난관들은 만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착잡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근엄하고 밤만 되면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마치 시골의 종갓집 같은 분위기를 내던 런던과는 달리, 활기찬 도회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던 파리였는데, 흐르는 세월 따라 너무나 많이 바뀐 듯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운율(韻律)은 그대로 남아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아있네.”

<파리의 영국식 공원인 바티뇰 공원(Square des Batignol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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