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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그간 쿠바 여행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사람들이 쿠바를 꿈꾸게 하는 것들. 체 게바라의 흔적을 가슴으로 느끼고, 시가를 피우며 재즈를 감상하거나, 흥겨운 리듬 안에서 춤추고, 말레꼰의 강렬한 파도에 심취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쿠바를 사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하지만 나는 쿠바에 대해서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왠지 멕시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쿠바행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기대감보다는‘왜 사람들은 쿠바를 가고 싶어 하는 걸까?’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여덟 시였다. 사람 없는 공항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몇 없는 사람들은 요란스럽지 않게 자신들의 짐을 찾아 곧바로 떠났다. 우리도 제일 마지막에 배낭이 나오고서야 아바나로 가는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아바나의 시내로 들어서며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거리는 한산했다.컴컴한 어둠 속에서 노란 가로등 불빛이 아바나의 낡은 건물들을 군데군데 밝히고 있었다. 간간이 드러나는 아바나의 풍경엔 빛바랜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켜켜이 쌓인 시간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7-23 11:43

[공감신문] 한순간이었다.바위에서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버린 건. 당시 여덟 살이었던 나는 고모와 언니를 따라 부산의 어느 바닷가에서 바위에 붙어있던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옆구리에 다슬기가 반쯤 담긴 반찬통을 끼고서 그들을 놓칠세라 쪼르르 쫓아다녔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바위들을 습격하여 숨어있던 다슬기를 잡아내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아쉽게도 마지막 남은 바위로 가려면 바다 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는데, 당시 나에겐 조금 위험해 보였다. 고모는 나에게 해변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미 호기심과 모험심에 심취한 나는 고집을 부려 그들을 따라나섰다.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이끼들이 물에 푹 젖어있었고, 나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약간씩 휘청거렸다.무서웠다. 그러나 나를 다시 돌려보낼까 봐 입을 꾹 다물고 바위의 끝 쪽에 다다랐다. 조심조심, 다리를 쭈그리고 앉아 다슬기를 반찬통에 집어넣었다. 그새 파도가 거세졌고 고모는 나와 언니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나는 집에 가서 다슬기 국을 먹을 생각에 들뜨며 일어섰고, 그 순간 중심을 잃고 바위에서 떨어졌다.첨벙, 머리부터 바다에 빠졌다. 나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파도가 내 위를 덮쳤다. 입속으로 짜디짠 바닷물이 계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7-17 10:45

[공감신문] 죽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죽음을 인식할 수 없다. 고로 세상의 모든 종 중에서, 인간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몇 십 년 후에, 또는 당장 오늘. 사람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기도 하고, 완전한 끝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현재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죽음을 준비해야 할까.트랜스 휴머니스트들은 죽음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취급하고, 거부들은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몸을 냉동 시키는데 아낌없이 돈을 지불한다.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미처 세상을 떠나지 못한 채 육체 안에 갇혀 꽝꽝 얼어버릴 것이다.하지만 아직 인간들은 죽음을 정복하지 못했고, 신체 냉동 보존 또한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걱정하며 신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정말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곳일까. 아니 정말로 구천을 떠도는 영이 있단 말인가.우리들은 명절이나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그 외 몇 차례 더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과일, 고기, 전,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6-18 16:01

[공감신문] 셀하, 나는 그 돌고래를 셀하라고 불렀다. 원래 ‘셀하’는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멕시코 자연 워터파크이다. 그러니까 나는 셀하에서 셀하를 만났다. 처음엔 그토록 셀하에 가고 싶어 하던 S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돈을 내고 반나절 짜리 워터파크에 간다니. 나는 수영을 못했고, S는 수영을 잘했다. 나는 물을 보는 걸 좋아했고, S는 물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여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멕시코다. 나는 곧 설득 당했고, S와 멕시코에서 만난 여행자 H와 함께 투어를 신청했다.아침 일곱 시 반, 쁠라야 델 까르멘에서 투어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니 어느새 셀하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나도 모르게 연신 하품이 나왔다. 보증금을 내고 오리발과 스노쿨링을 빌렸는데, 신기하게도 (시큰둥했던 게 무색할 만큼) 벌써부터 신나는 게 아닌가. 구명조끼를 입으니 자신감이 생겨서 얼른 들어가고 싶다며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안내판을 보니, 셀하는 실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워터파크라곤 한 군데 가본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사람만 북적거리고 파도 풀에서 둥둥 떠다녔던 기억뿐이었다. 뷔페에서 주린 배를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5-29 14:51

[공감신문] "거긴 배낭여행자들의 깐꾼이죠.”쁠라야 델 까르멘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여행자의 입을 통해서였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깐꾼의 해변은 호텔들이 섭렵했고, 호스텔은 센뜨로에 있어서 바다에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에 비해 쁠라야 델 까르멘은 카리브 해를 바로 앞에서 즐길 수 있기에 배낭여행자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연히, 고민할 것도 없이, 쁠라야 델 까르멘으로 향했다.평소에 해수욕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처음엔 ‘바다가 다 똑같은 바다 아니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바다를 자주 찾지 않았고, 호주 멜버른에서 지내면서도 그 맑고 깨끗한 바다를 손에 꼽게 보았다. 어쩐지 바다보다는, 공포와 평화가 함께 공존하는 숲이 더 매력적이었다. 호스텔에 짐을 푼 뒤 혹시 몰라 수영복을 안에 입고서, 해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호스텔과 해변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다. 키 큰 야자수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라? 바다가 다 똑같은 바다 아니었나? 내 시야에 바다가 꽉 들어찬 순간,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하는 바다인지 의심스러웠다. ‘에메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5-23 14:33

[공감신문] 숨을 들이 마시자, 습한 공기가 입안 가득 들어왔다. 삐질삐질 끈적한 땀이 온몸에 젖어들었다. 드디어 빨렝께에 도착했구나. 마야의 한 사냥꾼이 스페인 성직자에게 ‘돌 궁전’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800년보다 더 오랜 시간 잠들어있었을 빨렝께는 마야의 고대 도시다. 당시엔 15만 평의 공간에 500개 이상의 건축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입구에 들어서자 피라미드와 신전 건축물들이 축축한 냄새를 풍기며 서있었다. 색 바랜 돌덩이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는데, 수 세기의 시간의 무게 때문인지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고작 삼십 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겪어왔을 뿐이니까.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신전 앞으로 가 안내판을 보았다. ‘해골의 신전’이라니. 이름에서 냉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티셔츠 목부분을 마구 들척였다. 어째서 신전의 이름에 ‘해골’이 붙어있는 걸까. 억겁의 시간이 와르르 무너지진 않을지 조심하며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비교적 낮은 높이였기에 큰 힘 들이지 않고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러보니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5-16 18:17

[공감신문] 소포클레스는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의 단어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과나후아또에 사는 한 여자와 남자의 운명적인 사랑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는 가난한 광부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결국 둘의 만남을 반대했다.사랑이 쉽게 휘발되는 거였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앞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발코니끼리의 거리가 가까워, 두 사람은 몰래 키스를 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사랑엔 비극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사랑이 가득한 발코니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고, 결국 딸을 살해했다. 이후, 사랑하는 연인이 문제의 발코니 아래 빨간색으로 칠해진 네 번째 계단에서 키스를 하면 칠 년 동안 행복하고, 키스를 하지 않으면 십오 년 동안 불행이 온다는 전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우리는 힘겹게 ‘키스의 골목’을 찾았는데, 이미 많은 연인들이 계단에서 키스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4-30 10:15

[공감신문] 나는 돈 키호테를 안다. 그러나 를 읽지 않았다. 그저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하고 돌격하는 늙은 기사의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돈 키호테를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소설가는 세르반테스(의 저자)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되는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읽진 못하더라도)한 번쯤은 펴봄직한 소설이다.갑자기 살짝 부끄러워진다. 글을 깨친 이후, 를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읽지 않았다. 청소년용으로 읽은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나지 않으니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20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을 완독할 자신이 없었다는 변명도 살짝 해본다. 그런 내가 굳이 돈 키호테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나는 돈 키호테에 당장 관심이 없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돈 키호테까지 사랑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돈 키호테를 읽지 않고서는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데, 그래서 소설이 잘 안 써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물론 언젠가 읽고 말 것이다. ‘언젠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를 읽을 거야’라고 다짐하는 것과 비슷하게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4-30 10:07

[공감신문] 1953년, 과나후아또 대학교수인 엔리케 루엘라스 에스피노사와 제자들은 과나후아또 시내의 광장에서 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막간극을 선보였다. 십 분 이내의 짧은 공연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막간극은 광장 공연의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엔리케 우엘라스는 이에 멈추지 않고 1972년에 세르반테스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같은 해 정식으로 [제1회 세르반티노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퀘벡 여름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이어서 네 번째로 꼽히는 종합 예술 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축제는 ‘종합 예술 축제’이니 만큼 매년 10월 중 이십 일간 열리는데, 우리가 과나후아또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축제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름다운 도시로 명성이 자자하기에 과나후아또로 오게 된 것인데, 우리는 뜻밖에 좋은 기회로 세르반티노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하 세르반티노 축제)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왜 멕시코에서 ‘세르반티노’의 이름을 단 축제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는 스페인 문학이지만, 미겔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4-16 11:25

[공감신문]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레오와 쳬이엔과 어색한 작별 인사를 하고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집을 나오자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역시 떠나는 편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인연은 모두 소중하다지만 불편한 관계를 억지로 지속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카우치 서핑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터미널에 있는 음식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과나후아또 주에 있는 산미겔 데 아옌데로 가는 버스 표를 끊었다. 원래 출발 시간 보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다림은 멕시코에서 다반사인듯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고자 했던 계획은 허사가 되어버렸고,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산미겔 데 아옌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황량하고 썰렁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하루 정도 둘러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과나후아또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과나후아또였고, 산미겔 데 아옌데는 잠시 지나쳐가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 육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4-09 14:14

[공감신문] 서커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쭈뼛쭈뼛 레오에게 다가갔다. 레오가 우리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며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얼굴은 굵은 연필로 조심스레 그린 인물화 같았다. 짙은 화장 탓이었을까. 레오의 깊은 눈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옆에는 건장한 체격에 거뭇거뭇한 턱수염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쳬이엔- 레오와 함께 동거를 하는 연인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우리는 긴 대화 대신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레오의 자그마한 차에 올랐다.이상하게도, 집으로 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 때문에 숨이 막혔다. 물론 오늘 처음 만났으니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뻴리뻬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묘하게 달랐다. 나와 S는 괜스레 각자의 창문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내가 느끼는 감정을 깨닫고 말았다. 불편함. 우리는 서로를 불편해하고 있었다.이 분위기를 깨보고자, 나는 레오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능청스레 물었고, 레오는 낮엔 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저녁엔 서커스를 한다고 했다. 어떤 일이 더 재미있냐는 나의 질문에, 역시 서커스가 더 재미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천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4-04 10:21

[공감신문] 우리는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시티에서 무려 열흘 가까이 보냈던 것이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뻴리뻬는 얼마든지 더 있으라고 했지만, 그랬다간 영영 눌러앉아 버릴 것 같아서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버스 터미널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다 먹은 뒤, 나는 천원권을 넣은 하얀 봉투를 뻴리뻬에게 주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살뜰히 챙겨주었던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실용적인 선물은 아니었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봉투를 여는 뻴리뻬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화폐 수집이 자신의 취미라며 정말 좋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후 우리는 스무 번이 넘는 “Thanks!”를 들어야 했지만, 아이처럼 좋아하는 뻴리뻬를 보면 몇 번이고 더 들을 수 있었다. “아무쪼록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해.” “다음에 또 멕시코시티에 오면 연락할게!”“꼭이야! 멕시코에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과연 우리가 다시 멕시코시티에 와서 뻴리뻬를 볼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몇 년 안에 또 만날 것처럼,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어느새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3-30 11:47

[공감신문] 짙은 일자 눈썹, 깊은 눈, 야무진 입, 틀어 올린 검은 머리, 무표정. 아아, 프리다 칼로.처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를 마주보기 힘들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감상이 계속 될수록 칼로의 감정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결국 마음 안에 쓰린 감정을 가득 담은 채 그녀의 전기를 읽어 내려갔다.칼로는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던 평범한 소녀였다. 자신이 화가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25년 9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꾼 교통사고를 겪게 된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던 중,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면서 그녀의 몸 여러 부위가 탈골 되고 부러지고 골절 된다. 게다가 쇠봉이 그녀의 자궁을 관통해버렸는데, 그 고통은 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사고로 인해 칼로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며 수십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했다. 사고 이후 그녀는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한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두 사람의 덩치 차이로 인해 ‘비둘기와 코끼리’라는 귀여운 애칭이 붙었지만, 이들은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3-12 10:47

[공감신문] 소치밀코에서의 뱃놀이를 끝내고 주린 배를 채우려 뻴리뻬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푸드코트에 갔다. 여러 음식점들이 건물의 사면을 둘러싼 가운데에 간이 테이블들이 놓여있고, 천장엔 색색의 수술들로 장식돼 있었다. 언뜻 보면 축제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일단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벽면엔 고딕체로 가게 이름들이 적혀 있었으나, 우리의 눈엔 모두 똑같아 보였다. 가게마다 큰 냄비에 무언갈 끓이고 있었고, 우리는 갖가지 향을 맡으며 입맛을 다셨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 곳에서 먹자며 서성이던걸 포기하고 아무 데나 앉아버렸다.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이 우리에게 분홍색 종이로 된 메뉴판을 건넸다. 검은색 매직으로 귀엽게 써 내려간 글자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알아볼 수 없었다. 순간, 어렸을 적에 봤던 홍콩 영화에서 한 외국인이 메뉴판을 읽을 줄 몰라 주문하는 족족 수프만 나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멕시코 음식이라곤 타코와 부리또밖에 읽을 줄 몰랐던 우리에겐 어려운 문제였다. 청년에게 물어본다 해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테니 허사였다. 우리는 모험을 해보자며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3-05 14:05

[공감신문] 수십 년 전, 섬 관리인 돈 줄리안 산타나는 우연히 운하에서 물에 빠진 소녀를 목격한다. 어떻게든 구하려고 애를 썼던 산타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익사한다. 산타나가 눈앞에서 목격한 생생하고 무력한 죽음의 공포는 망령이 되어 그를 따라다닌다.며칠 지나지 않아, 소녀의 시체가 있던 장소에서 한 인형이 발견된다. 악의 기호. 산타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물 위를 떠도는 소녀의 혼을 기리기 위해 인형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십육 년, 속죄의 시간 동안 산타나는 섬 전체를 인형으로 뒤덮는다. 나무와 울타리와 지붕에 인형을 매달고 걸고 부착한다.햇빛, 바람, 비는 인형들을 분해한다. 눈, 팔, 다리는 인형들에게서 해체된다. 그리고 2001년, 산타나는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똑같이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는 멕시코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소치밀코에 있는 한 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낡은 인형들이 지배하는 섬을 산타나가 만든 건 사실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선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산타나 본인은 익사한 소녀의 혼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고, 마을 주민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가 아내와 아이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3-02 11:09

[공감신문] 엘블랑꼬 할아버지의 타코집을 가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에나비스타역 주변을 정처 없이 걸으며 많은 음식점들을 지나쳤으나, 딱히 들어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S는 아무 데나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 조금만 더 걸어보자며 S를 달래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숨이 막혔고, 우리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였다.거리는 사람이 몇 없어 한산했다. 킁킁. 어디선가 더운 공기를 가르며 고소한 옥수수 냄새가 났다. 우리는 홀린 듯이 냄새를 따라갔는데, 저 앞에서 주황색 앞치마를 곱게 두른 할아버지가 구슬땀을 흘리며 또르띠아를 굽고 있었다. 게다가 연회색 양복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정장 구두를 신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타코에 대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타코집 앞에서 멈춰 섰다. 철판을 들여다보니 둥글게 펴 바른 옥수수 반죽에서 기포가 퐁퐁 솟아올랐다. 뜨거운 열기에 미처 가라앉지 못한 기포가 그대로 구워졌다. 철판 옆엔 갖가지 고기 재료가 통에 들어있었고, 딱딱하게 굳은 기름이 번들거렸다.하고 많은 타코집 중에서 왜 하필 이곳에서 멈춰 섰는진 우리도 모른다. 사람들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2-27 10:50

[공감신문] 오전 아홉 시가 되자마자 뻴리뻬의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낮이 되기 전에 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멕시코에 도착한지 이틀째. 아직 몸이 뻑적지근했다.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크림, 물병, 선글라스 꼭 챙겨!” 뻴리뻬는 안 그러면 오늘 하루 상상이상으로 힘들 거라며 겁을 줬다. 오늘은 뻴리뻬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인 떼오띠우아깐에 가기로 한 날이다. 바나나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뻴리뻬의 차에 올랐다. 십여 분간 달리자, 창밖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였다.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지면에서 산 위쪽까지 위태롭게 솟아있었다. 뻴리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며, 심지어 산꼭대기에도 집들이 있다고 했다.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집에 가느냐고 물으니, 버스는 중간 지점이 종점이라 그다음부터는 걸어 올라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뻴리뻬는 멕시코 전체 인구의 약 십 퍼센트의 부자들이 대부분의 부를 소유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 멕시코의 범죄율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회. 어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2-09 11:36

[공감신문] 멕시코시티의 아침“납치범이면 어떡해?” S의 물음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했네. 멕시코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는 현지인의 집에서 머무를 수 있는 카우치 서핑을 시도하기 위해 사이트에서 한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름은 뻴리뻬. 멕시코시티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살며 여행을 좋아하는 (아마도) 삼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뻴리뻬의 프로필을 보아하니 그의 집에서 머물렀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글을 남겼고, 그의 사진 속 인상 또한 선해 보였다. 게다가 공항까지 배웅 나와준다고 하니, 이렇게 친절한 호스트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심지어 새벽 여섯 시 반에 도착하는데!).그런데 S는 그가 납치범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여행하기 전에 멕시코에 대한 (염려스러운)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리는 살짝 ‘쫄아’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온라인상의 뻴리뻬는 알아도 ‘진짜 뻴리뻬’는 모른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도망가자는 S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랑 배낭 하나 메고 왔으니 수틀리면 잽싸게 도망갈 수 있을 테다.게이트를 나가니 우리를 먼저 알아 본 뻴리뻬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비엔베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2-05 17:35

[공감신문]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봤던 은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J.R.R. 톨킨의 흥미로운 세계관 때문도 아니었고, 입이 벌어지는 CG 때문도 아니었고, 잘생겼다고 난리였던 레골라스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스크린에 꽉 찬 대자연에 압도 당했다. 당시 작은 꼬마였던 나는 광활한 평원이 나올 때마다 어딘지 모를 ‘미지의 땅’에 점점 마음을 빼앗겼다. ‘저런 곳이 실제로 존재 한다면 대체 어디일까?’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도 믿지 못했던 것 같다. 매혹적인 미지의 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저런 곳’이 뉴질랜드라는 걸 알았을 때, 나에게 뉴질랜드는 꿈이자 환상의 나라가 되었다. 친구들이 어디로 여행 가고 싶은지 물어볼 때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뉴질랜드!”라고 답했고, 작고 답답한 방 안에서 대자연을 꿈꿨다. 나이가 들면서 뉴질랜드는 점점 순위에서 밀려났지만 처음으로 꿈꿨던 여행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밀포드 사운드로 가는 길, 잊고 있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니 나 지금 엘프의 마을에 가고 있잖아!’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꿈꾸기만 했던 꼬마가 성인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온 거였다. 물론 엘프의 마을은 스크린 안에서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1-11 16:09

[공감신문] 처음 만난 쿡은 새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어. 쿡의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는데,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 쿡은 아오라키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어. 구름을 뚫은 산. 나는 쿡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모자와도 참 잘어울린다고 생각 했지. 쿡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해가 지는 바람에 내일 다시 찾아 가기로 했어.저녁이 되자 바람은 더 차가워졌고 나는 옷을 꽁꽁 껴입었지. 숙소에서 따뜻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어. 쿡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밖으로 나가볼까 싶어서 슬쩍 문을 열어 캄캄한 어둠속으로 발을 내딛었어. 쿡은 보이지 않았고 적막만이 감돌았지. 나는 괜히 후 입김을 불며 하늘을 올려다 봤어. 하늘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 정말로 수많은 별들이 알알이 박혀있었어. 진부한 표현이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지. 쿡도 저 별들을 보고 있을까. 한기로 몸이 떨렸지만 눈을 뗄 수 없었어. 고개를 들어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고 찬사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숙소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쿡이 있는 곳을 보았는데 여전히 쿡은 어둠 속에

정세음 칼럼 | 정세음 칼럼 | 2018-01-05 0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