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에게, 갑자기 한 순 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한마디로 ‘정 떨어진다’라고 느낄 때. 다양한 경우들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남자가 갑자기 엄청 시시해보일 때다. 

이런 얘길 한다면 남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일거라 생각한다. ‘재수 없다’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럼 남자들은 항상 강해야 돼?’라고 묻거나. 아니, 항상 강해야 되는 건 아니다. 든든한 걸로 만족한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자가 한 여자에게만 보여주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은 모성애를 자극해서 여자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기도 한다. 

아주 개인적으로 남녀가 호감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 여자가 남자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순간. 둘, 남자가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순간! 아, 그때부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둘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거다.

단언컨대 남자인 당신이 그녀에게 시시해진다면, 아무리 당신이 ‘침대 위의 나폴레옹’인들 그녀의 반응은 아마도 미지근할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섹스에 있어서 정신의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남성 복상사의 원인은 보통 심장 질환인 반면, 여성 복상사는 뇌 질환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엄청 섹시한 ‘모성애 자극’과 한없이 건조한 ‘시시함’의 차이? 한 끗 차이 아니냐고?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건 바로 이야기의 차이다. 

나는 이전에도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어필한 적이 있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책에 나오듯, 한국 남자들이 골프에 열광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 이야기가 부족해서라고. 술 없이 몇 시간씩 대화할 수 있고, 대화 스킬이 부족한 한국 남자들에게 이보다 좋은 대화 포맷이 없는 거다! 화자는 부풀리고, 청자는 감탄하고. 비단 골프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어릴 적 외운 수학 공식에 수를 대입하듯 그런 대화에 익숙해져있다. 

‘How are you? / I’m Fine thank you, And you?‘
 
물론 어릴 적 우리는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야기하기를 즐겼었다. 유년시절 학교에서 있던 일을 부모님께 쫑알쫑알 늘어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느 순간 자꾸 내 이야기를 어디 가서 멋지게 해보란다. 이때부터 우린 이야기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말하는 자기소개서 같은 게 그런 거 아닐까. 왜 자꾸 이야기를 해보라는 걸까? 겨우 사회초년생인 내가, 부모님 뻘 어른들께 무슨 잘난 척하며 얘기를 하겠냐고! 이 회사에 입사하는 게 어릴 적 꿈이던 당신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궁금해서? 음- 조금 철학적으로 접근해보자면, 이건 당신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관점이 궁금한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 이야기를 말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이야기는 일련의 견디기 어려운 사건 자체의 의미를 드러낸다.”

좀 어렵다고? 쉽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우리가 잘 아는 한 사람을 떠올리자. 찰리 채플린! 그는 이렇게 말했다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그렇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 당장 처해있는 문제들은 물론, 엉킨 실타래를 껴안고 살아간다. 인생은 고난의 반복. 당시에는 이걸 어쩌지, 싶어서 실을 끊어버릴까 싶다가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잘 견뎌왔다. 그러기에 우린 이 시간을 살고 있으며 이 글을 읽을 여유도 갖고 있다. 정말 성경 말씀처럼, 견딜 수 있는 시련들만 주시나보다.

한나 아렌트의 말에 답이 있다. 우리는 그걸 이야기로 꺼내놓을 수 있을 때, 즉 그것이 해결되어서 단순히 사건의 배열이 아닌 ‘이야기’로 할 수 있을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모든 순간 감정과 이성을 갖는다. 특히 ‘이야기’꺼리가 될 만한 사건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정이 개입한다. 그날의 온도랄까? 

잠깐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몇 년 전, 아이돌 연습생을 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이후로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연습생을 시작하면서는 지원이 불가피했다.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는데 어떻게 돈을 번단 말인가! 하지만 당시 나는 아빠와 싸워서 1년 동안 대화가 없었다. 심지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이었다. 연습실에 가야되는데 정말 버스비 천 원 한 장이 없었다. 가서 매니저 실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당장 교통비라도 빌려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연습실까지 어떻게 가냐구. 30도가 넘는 그 날씨에, 나는 생수통에 물을 담아 연습실로 길을 나섰다. 차로 20분, 걸어서 50분 거리. 정말 중간에 어찌나 더운지, 더워서 눈물이 다 나더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봤을까? 뻘겋게 달궈진 얼굴에 눈물 자욱이 가득, 팅팅 부은 내 얼굴.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거의 쓰러질듯했고, 다들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데 대답할 기운도 남지 않았었다. 연습실 에어컨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빨래처럼 앉아 있었다. 몇 년 전보다 요즘 여름은 훨씬 덥다. 하지만 나에게 그때보다 더웠던 여름은 없었다. 대상포진까지 앓았던, 그 해 나의 오븐 같던 여름이여! 

난,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거다. ‘유난히 더웠던’, ‘내 생애의 가장 더웠던’ 여름을. 물론 저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을 써보라면 말도 안 되게 길고, 이건 에세이가 아니기에 굳이 거기까지 적진 않겠다. 하지만 내가 저 이야기를 할 때, 그 어떤 사람도 날 시시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저 얘긴 나보다 내 주변에서 더 많이 꺼내는데, 그건 지금의 내가 자랑스럽기 때문임을 안다.) 

내가 일부러 쿨해 보이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내 인생에 있어서 저것보다 힘든 순간들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로 꺼낼 수 있었기에 시시해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우리는 비로소 생각과 느낌을 총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순간, 그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러니 어디에선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상사가 있다면, 대단한 경험을 드러내려 하지 말고 그 경험이 선사해준 의미를 피력하는 게 당신을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지도. 물론 이성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내 이야기를 모두 기억해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이 기억에 대해 깊게 혹은 다른 시선에서 ‘의미’를 통찰해주는 이가 있으니, 그게 바로 ‘친구’다. 나이가 먹을수록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지 느낀다. 특히나 오래된 친구가 더욱 그러하다. 친구들은 나의 일화를 기억해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며 나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때론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 그 추억들은 대부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편집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엄청난 조작이 있지 않는 이상, 그건 우리의 기억이고 우리에게 부여된 의미인 것을. 

친구가 정말 중요한 시대다. 우리는 자꾸 인스턴트식 소통을 하려는 시대에 산다. 미안한 얘기지만 자꾸 내 SNS계정에 ‘소통해요’라는 댓글 좀 달지 않아주셨으면 한다. 뭘 소통하자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오히려 내 칼럼을 읽고 느낀 점을 이메일로 주시면 하나하나 열심히 읽고 답장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SNS댓글로 무슨 소통이 된단 말인가. 

우리는 ‘나’를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취향을 강요당하고, 10대에 꼭 해야 할 일, 20대에 꼭 해야 할 일, 30대, 40대에 해야 할 일들 투성이다. 사회적 위치의 ‘나’말고, ‘나’라는 인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실 대부분 자기 스스로도 별로 관심이 없다. 현대의 인간은 ‘소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감히 말하건대 당신이 (소득에 비해 혹은 예전엔 쓰지 않았던 곳에) 비교적 소비를 과하게 하고 있거나 혹은 돈이 너무 없어서 쓸 수가 없다면, 당신은 스스로의 인격을 더욱 잘 지키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별로 좋지 않은 신호 같아서다. 

그럴수록 우리는 옛날 친구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 모르는 게 생기면 우리는 인터넷에 검색을 한다. 그러나 조금은 아날로그 형식으로 책을 펼치듯 해보자. 자신의 SNS계정에서 필터를 통해 비춰지는 ‘나’를 보며 난 이런 사람이야, 라고 느끼지 말고 ‘친구’라는 책을 펼치는 거다. 우리는 유년시절 위인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은 못되더라도 어쨌든 나중에 자신의 삶을 책 한권에 쓰고픈 욕구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잊히지 않길 원하며, 자기 유전자가 담긴 자식을 통해서든 뭐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근데 ‘나’를 남기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친구일수도 있다는 거다. ‘나, 지해수’, 혹은 ‘당신’이라는 사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는 친구들! 제목은 각자 다를지도 모르지만.  

(필자와 필자의 오랜 친구)

나는 아빠랑 페이스북 친구인데, 아빠의 친구 분들이 내 SNS에 댓글을 종종 달아주신다. 가끔은 내가 아주 애기일 때 봬서 기억이 안 나는 이모 삼촌들도 계신다. 나는 어릴 때 엄청 끼가 많고 여시 짓을 잘 했다더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댓글에 하나하나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노란 싹수’를, 내가 가장 작았을 때를 기억해주는 부모님의 친구는 소중하다. 

나의 ‘시시함’을 드러내는 건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 문제라는 거다. 스무 살이 넘어 천 원짜리 한 장 없어서 울어야했던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시시해보였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아니지 않아? 동정심이 느껴지지 않아? 맙소사, 나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제 우린 헤어 나올 수 없게 된 거야. 

매일 밤 1분이라도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는 시간이 이래서 필요한 거다. 난 나이가 먹을수록 유신론자가 되어 가는데, 인생에는 정말 신기한 일들 투성이라서 그렇다. 그러한 인과관계와 의미는 세상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아는 것은 아니다. 

자기 전에 명상, 기도를 통하여, 하루 10분 산책, 아니면 줄담배라도 피우며 ‘왜 때문’인지 생각해보면 삶이 정말 덜 시시해진다. 분명 하루하루가 몰입이 가득한 선물 투성이가 될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작은 것에 의미를 찾을수록 우린 사기꾼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 사기꾼과 이야기꾼이야말로 한 끗 차이 일 테니. 

이 글을 통해 시시함과 거리가 멀어질 당신의 섹시지수가 상승하길! 명상이 섹시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냐구!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