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만세운동 주도한 유관순 열사와 독립위해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공감신문] 유안나 기자=2019년 3월 1일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퍼진 ‘3·1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 고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국장일)을 이틀 앞두고 일제의 총칼에 맞서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그해 3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졌는데, 참가자는 한국인 전체 10분의 1 이상인 200만 명을 넘어섰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에서 전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두루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족적 희생이 따랐고, 일제강점기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에게 여성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에 3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해 '만세 소리'는 밖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난 26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문체부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에 의뢰한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이 '3·1 운동'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이미지는 '유관순'이 가장 높다는 집계가 나왔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사진

뒤이어 대학독립만세(만세운동 포함, 14.0%)와 독립·해방·광복(9.6%) 순으로 나타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우 김구(31.4%), 상해(11.4%), 이승만(2.7%) 순으로 기록됐다.

이처럼 우리 국민에게 잊혀지지 않는 유관순 열사, 여기에 최근 정부가 유관순 열사의 독립 유공 훈경을 ‘독립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 높이기로 결정해 대한민국 역사의 상징으로 당당하게 올라섰다. 오늘 알쓸다정에서는 3·1절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고,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 유관순 열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 

정부는 지난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를 통해 유관순 열사에게 기존 ‘건국훈장 독립장’에서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부의 결정은 ‘3·1 운동의 상징’이자 독립의지를 꺾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의 서훈등급이 낮게 평가되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또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제기되는 등 유 열사 서훈 등급에 대한 격상의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서훈’은 상훈법에 의거, 대한민국이나 우방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자에게 훈장과 포장을 수여하는 것을 말한다.

유관순 열사 수형카드

서훈 등급은 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장’을 받은 애국지사로는 김구, 안창호, 안중근 등이 있으며 ‘대통령장’은 신채호, 신돌석 등의 애국지사가 수여받았다. ‘독립장’ 서훈은 823명의 애국지사가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에서 유관순 열사 유족에게 훈장을 직접 수여할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관순 열사 서훈등급을 격상하며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16살 나이로 당시 시위를 주도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나라의 독립에 자신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보며 나라를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등급 훈장 추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추서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독립 만세' 주도한 유관순 열사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할 권리도 없다”  유관순 열사 어록

美 화가 모린 가프니 울프슨이 그린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대한민국에 독립운동의 불씨가 피어오르던 시점, 이화학당 선배들에 의해 3·1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알게 됐으며, 이와학당 동문들과 결사대를 조직해 동참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만세시위에 참여한 유관순 열사는 한달 후 고향에 내려와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 충청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며,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다 채포돼 공주 교도소에 수감됐다. 같은해 8월에는 공주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지만, 일제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며, 옥중에도 독립만세를 불러 동료들을 격려한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극심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 나이로 순국했다.

■ 독립을 위한 한 마음, 여성 독립운동가들 

“3·1운동은 여성이 독립운동의 일선과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영화 '암살' 안옥윤 실존 인물인 남자현 열사

위 문장은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이 3·1운동과 여성-세계평화의 길, 한국여성독립운동에서 찾다‘ 토론회에서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내놓은 것이다. 이 관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남녀를 구분하는 인습이 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을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일선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당시, 전국에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여성독립운동가로 나온 ‘안옥윤’의 실존 인물인 남자현 열사가 그 대표적인 예다.

남자현(1872~1933) 열사는 독립운동가였던 남편의 죽음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그는 1919년 3·1 운동 후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 이후 1925년 일본 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 1933년에는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살해 시도 후 체포돼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다.

여성독립운동가에는 박자혜(1895~1943)선생도 있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로, 3·1운동 당시 부상당한 학생, 시민들을 본 후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사상을 정립한 혁명가로 꼽히는 신채호 선생과 결혼 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를 돕기도 했다. 이후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 외에도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중 3·1운동을 주도, 조선총독부를 공중에서 폭파하겠다는 생각으로 1923년 중국 남서부 원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한 권기옥 지사, 만세 시위를 이끌다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김마리아 열사 등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1일 약 1000명의 여학생은 YMCA 등과 연계해 만세 시위에 나섰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00여명의 회원을 꾸려 군자금을 모으고 전국에 조직망을 설치하는 등 마음깊이 새겨야할 독립운동가들은 수없이 많다. 

과거 일제의 학살로 감옥살이 한 사람은 5만 명이 넘고 죽음에 이른 한국인들은 그 수만 해도 2만 여명으로, 부상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한편, 2019년 2월 기준 ‘대한민국장’ 서훈은 독립유공자 15178명 가운데 30명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적인 수치만 봐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지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남겨졌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100년 전 이날, 전국에서 울려퍼졌을 함성과 염원을 헤아리며 삼일절 하루 만큼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한 독립운동가들을 마음 깊이 새겨보는 건 어떨까.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