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국 독립을 선언

 

[공감신문] 2·8 독립 선언(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2·8 독립 선언은 세계 1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민족자결주의 핵심 내용은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이다.

1918년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 이광수는 베이징에서 생활 중이었다. 당시 베이징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과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이 퍼졌다.

이 소식을 접한 중국인들은 중국의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이광수도 조선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광수는 향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한다.

1948년 9월,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진다. 이 법에 따라 특별 재판부가 구성 되고 반민족 행위자들을 재판한다.

이 재판에서 이광수는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 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하였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말한다.

이광수는 동경으로 가 와세다대학 정경과 학생 최팔용과 몇몇 유학생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밝힌다. 최팔용 등은 이광수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다. 이광수의 독립운동 계획은 독립선언서 낭독이다.

2·8 독립 선언은 무오독립선언의 영향이 크다.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조소앙을 동경에 파견해 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무오독립선언은 음력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됐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다.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로 작성했다. 최팔용은 이광수의 신변을 우려하여 도피할 것을 제안한다. 이광수는 선언문 작성 후 상하이로 도피한다.

2월 8일 오전, 독립선운동을 계획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에 주재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 여러 지역 신문사에 독립 선언문을 발송한다.

이날 오후 2시, 재일본 동경 조선 YMCA 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 약 600여명이 모였다. 이곳에서 최팔용은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백관수는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인 유학생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도로 나갔다.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했다. 이때 일본경찰들이 나타나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며 일본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결국 약 60명이 체포되고 8명이 기소됐다.

2·8 독립 선언은 같은 해 3월 1일 일어난 기미독립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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