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밤, 대한민국 국보 1호에 불 붙어

[공감신문] 숭례문,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감싸던 성곽의 성문이다. 남쪽에 있어 남대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35년 조선 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해 3년 뒤에 완성됐다. 이후 1447년 세종대왕 29년에 개축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태조는 수도 한양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고 사방으로 네 개의 대문을 세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이 정남에 들어선 숭례문이다.

숭례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통하는 관문이다. 또 임금이 사는 궁궐과 종로로 이어지는 요충에 자리했다.

조선의 심장부와 바로 연결되는 나라의 정문. 이름도 유교의 나라 조선이 추구하는 진리인 ‘예’를 받든다는 뜻을 담았다.

이처럼 의미가 큰 숭례문에 발생하지 않아야 할 일이 발생했다. 일명 숭례문(남대문) 방화 사건.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서울의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이다.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경, 한 남성이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이후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숭례문 2층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는 등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월 11일 0시 58분경 지붕 뒷면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곧 2층이 붕괴됐다. 이어 1층까지 불이 옮겨 붙어 새벽 1시 54분, 발화 5시간 만에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가 소실 됐다.

2월 11일 인천 강화군 하점면에서 방화 용의자가 붙잡혔다. 그는 69세의 남성으로 목격자들의 증언과 비슷한 인상착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자택에서는 목격자들의 진술과 동일한 종류의 사다리, 의류, 시너 1병을 발견됐다.

이후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조사 결과 2006년 4월에도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하여 40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69세의 남성은 범행을 시인했다. 그는 앞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써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그가 2006년에 작성한 '오죽하면 이런 짓을 했겠는가'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본인이 창경궁에 놀러 갔으며 그곳에서 우연히 불이 났는데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방화범으로 몰렸고, 방화범으로 몰리면 어쩔 수 없으니, 거짓 자백을 하라는 변호사의 말에 따라 거짓 자백을 했다고 한다.

또 공탁금 500만원을 걸었는데 국가에서는 오히려 1500만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며, 내 자식이라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줬으면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월 13일 대한민국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69세의 남성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월 14일, 경찰은 채종기의 신발에서 남대문에 칠해져 있는 것과 동일한 성분의 시료를 채취, 이를 결정적 증거로 보고 혐의 사실의 입증을 확신했다.

경찰은 전날 확보한 당일 감시 카메라 녹화 영상에서 채종기의 모습을 확인했으며, 그의 증언과도 일치한다는 점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는 검찰에 기소됐고, 10월 9일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숭례문 복원작업은 2010년 2월 10일 시작했다. 전통방식으로 시작된 작업은 5년 3개월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목재를 건조해 사용하는 데만 3년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 복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소나무 기증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실측 도면이 존재했으나 주요 부분들이 전소돼 완전한 모습을 되찾기는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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