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가씨’들이 나쁜 남자에 반한다면...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난 여느 20대 여자들처럼 타로카드나 별자리 운세에 관심이 많다. 맞다.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타로카드와 별자리 운세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만큼 흥미롭다. 오,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친한 언니와 타로카드를 보러갔었다. 우리의 이슈는 단연 새해의 애정운. 타로를 봐주는 선생님이 카드를 섞으며 말했다. 
“오늘 손님들 연애 운이 다 좋지가 않다.”
내 차례 전에 이런 말이 나오니 지레 겁부터 났다. 그래서 왜, 다들 어떻게 안 좋게 나왔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요즘 아가씨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 거지, 뭐. 끝이 뻔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 운이 좋을 리가. 자기들도 결말이 알면서도 여길 찾아오잖아.”
아, 지당하고 뻔한 말씀! 그래 요즘 아가씨들은 정말로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나쁜 남자와의 연애는 정말 뻔한 법이지.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여길 찾는 거지! (다행히도 나의 애정 운은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도 여느 20대 여자들처럼 타로카드, 별자리 운세 그리고 나쁜 남자의 매력에 끌렸었다. 아니, 알다가도 모르겠는 ‘그들’ 때문에 타로나 별자리 운세에게 자꾸 의지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타로 선생님 말처럼 ‘요즘 아가씨’들이 나쁜 남자에 반한다면, ‘나중에 아가씨’들은 나쁜 남자에 목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나쁜 남자(혹은 여자)말고, 좋은 남자(여자)에게만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들이 현명해져서? 현명한 아가씨라도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영리한 과학은,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을 조절 가능 하게 될 거라 말한다. 도파민, 그게 바로 열쇠다.

도파민은 신경물질계의 유명 인사답게 그 영향력이 보통이 아니시다. 이는 집중력과 쾌감, 도취감 등을 관여하며 공격성은 물론이요 창조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주로 기분이 좋은 순간, 특히 우리가 사랑한다/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그 존재감을 마구 드러낸다. 아마도 도파민이 건네는 ‘창조성’ 때문에 사랑을 하면 다들 그렇게 시인이 되나보다!
과학은, 훗날에 이 도파민을 알약처럼 복용해서 우리 스스로 이 기분들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파민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쾌감 역시 원할 때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사랑의 가장 큰 화두는 변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해결이 불가능해보였던 것. 그건 바로, 나 좋다는 남자(혹은 여자)는 내가 내키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딴 사람을 본다는 거다! 근데 그냥 나 좋다는 사람에게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아니, 그거만큼 쉽고 편한 연애가 또 있을까? 도파민을 한 알 딱 먹으면, 절대 남자로 보이지 않던 그를 위해 사랑의 시를 쓸 수도 있다는 거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나쁜 남자(여자) 때문에 맘고생할 일이 없게 된다. 인류의 오랜 고민도 말끔히 해결 된다. 막말로 정말 별로인 이성에게서도 쾌감, 집중력, 창조성……. 즉 구름 위로 올라선 그 기분을 만끽 가능하게 된다! 이별도 지금보다 쉬워질 거다. 사랑은 언제나 새 사랑으로 잊히는 법! 옛 애인과의 이별 중독의 굴레에 갇힌 사람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수월해질 것이다. 도파민 조절만 가능해진다면, 아마도 미래는 마법처럼 사랑이 가득 찬 유토피아의 모습이 될 지도!

(영화 <향수> 중에서)

사랑의 순간 이 외에도 도파민의 분비가 활발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큰 쾌락의 자극은 우릴 중독 시킨다. 음주, 도박, 마약, 성형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그 특정 행동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는 걸 알게 돼서 그걸 계속 하려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큰 이유는 상실감 때문이다. 쾌감 이후에 찾아드는 ‘쾌락의 상실’은 그 전보다 좋지 않은 기분이다. 이 상실감이 우릴 중독 시킨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다. 애인이 없을 때 느끼는 외로움보다, 애인이 있는데도 그 사람이 날 섭섭하게 만들 때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큰 법이다. 우리는 계속 행복 하고 싶어 한다, 즉 도파민의 맛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 한다. 결국 사랑도 다, 신경 물질 활동에 지나지 않는 거다. 아무리 사랑이라도 그 잘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니! 사랑의 감정이 조절 가능해진 미래의 인류는, 우리가 써 놓은 짜디짠 영화와 음악을 보고 어떠한 기분이 들까. 

여기 도파민과 더불어 쾌감에 관여하는 강력한 신경물질이 또 있다. 바로 엔도르핀. 엔도르핀은 천연 마약, 아니 실제 모르핀보다 강도가 800배가 세다고 한다! 세상에, 그럼 도대체 우리 인간이 자연적으로 느낄 수 있는 쾌락의 크기가 얼 만큼이라는 거지? 근데 우리 인간들은 왜 겨우 1/800의 미약한 마약 따위에 손을 대는 거야? 아니, 그보다 도대체 그 엄청난 쾌락은 언제 느낄 수 있는 거지? 느껴본 적이 있으려나? 사랑하는 이가 날 쳐다볼 때? 아니, 섹스 할 때? 사정할 때? 
안타깝게도 엔도르핀은 고통의 순간에 분비된다. 우리가 몸에 상처를 입었을 때 엔도르핀은 이것을 견디게 해준다. 엔도르핀이 가장 강력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낼 때는 바로 출산과 죽음...! 정말 지옥 같은 고통으로 치닫는 순간들이라 한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을 주신다고 하셨다지. 그러하다. 우리는 마약보다 더 센 마약을 통하여 이러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선물이라면, 선물일 것이다. 사실 인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 아니던가? 그때마다 인간들은 변태들 마냥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된 거다. 가학적인 행위를 당하는 것에 성적 흥분을 즐기는 마조히스트들도 이런 엔도르핀의 영향을 빗겨나갔다고 보긴 어렵다. 
결국 우린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최고의 쾌락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래서 정말 아파도 아이를 또 낳을 수 있고, 정말 힘들어도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치 있을 때 기꺼이 그렇게 한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상대방 때문에 내가 상처받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가 나쁜 남자(여자)임을 이미 스스로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게 아닌가! 정말 부질없고... 바보 같다고?

그렇다면 묻고 싶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좋은 남자(여자)’와의 연애는 늘 행복하냐고. 단언컨대 어느 연애에나 오르막과 내리막은 존재한다. 두 사람은 거의 2-30년, 혹은 그보다 오랜 시간 다르게 살아왔다.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서로 배려한다 치더라도,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는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좋은 남자(여자)’ 앞에서 도파민 알약을 먹는다 한들, 연애의 이러한 매너리즘적인 장면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상실감을 견디기 위하여 더 많은 도파민을 요구하게 될 거다. 한 알 두 알, 그리고 세 알…….  

이런 사랑에는 당연히 드라마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썸? 그런 것은 간단히 생략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상대와의 연애는 나쁜 남자와의 연애보다야 비교적 평온할 테지. 일과 사랑, 둘 중에 무언가를 희생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아마 사랑을 위하여 예전만큼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라는 존재만으로 다 용서가 되는 거다! 굳이 그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 다이어트를 할 필요 없으며, 그가 어떤 립 컬러를 좋아할지 고르느라 약속 시간에 늦을 일도 없다, 그럼 당연히 싸울 일도 줄어들 거다. 그렇게 아무거나 바른 입술로, 우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사랑을 노래할 수 있게 될 거다. 도파민만 있다면! 결국 우리가 반하게 되는 건, 특정 상대방이 아닌 피임약처럼 조절가능한 도파민일 것이다. 

소름 끼친다. 이것이 화학적 거세와 뭐가 다르다는 건가! 마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의 악한 본성을 조절시킨답시고 화학적인 ‘치료’를 행하는 것과 같다. 그래, 그건 그들 말로는 치료였지. 알렉스는 머릿속에서 ‘저 더러운 계집애의 몸이 다 녹아버리게 박아 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몸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외치지. ‘난 치유되었어!’

가축에게 발정제를 주사해서 하루 종일 교미를 하게 하는 것과, 약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상대방이 날 받아줄지 말지는 상대방 마음,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내 마음이다. 맛있는 것을 보면 그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정말 내 자유의지잖아!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경외심을 강요하는 독재 정권일지라도, 누군가를 향한 연정은 오로지 나만의 것, 나의 자유였다.  
사랑을 조절가능하다는 것은 신의 영역에 맞닿은 거 아니냐고? 바벨탑을 쌓아올려 신에게 도전했던 행위와 다르지 않냐고? 아니, 이것은 인간 스스로를 그저 가축 취급하며 우리 속에 가두는 것이다. 스스로 안장을 채우고, 말과 채찍을 건네며 초원을 뛰놀고 싶은 자유 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은 과학을 통해 수많은 쾌거를 거두면서도, 때론 정말 멍청한 짓들을 하게 만들었다. 마치 핵 개발처럼. 훗날 도파민의 조절도 그렇게 쓰여서는 안 될 것이다.  

가축처럼, 기계처럼 사랑할 바에야 차라리 나쁜 남자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이 더욱 인간답다! 나 좋다는 건실하고 재미없는 남자를 만나서, ‘아 난 행복한 거야’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느니 차라리 혐오스러웠던 마츠코처럼 사는 게 인간적이라는 거다! 

(“마츠코야 울지 마라 사랑이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이만큼 사랑을 주면, 나에게도 이만큼 돌아오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치우자는 거다. 헌신짝이 될지라도 헌신을 다하는 거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나쁜 남자면 어때?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지 뭐! 그가 거부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적인 사랑을 계속 퍼주는 거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이야말로 어쩌면 바벨탑보다 더 드높은 신의 영역이 아닐는지!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때야말로 우린 신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사랑을 오로지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당신을 위하여 또 다른 멋진 만남을 선물처럼 예비할 지도. 내가 신이라도, 관전의 재미를 위하여 정말 순수하게 사랑에 잘 빠지는 이에게 자꾸만 사랑스러운 사건 사고를 만들어줄 것 같다. 아, 이제야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왜 자꾸 살이 빠졌었는지 알 것 같다. 몸에서 자꾸만 도파민을 만드느라 살이 찔 틈이 없었던 거다! 마음이 너무 너무 분주했잖아! 

어젯밤 나의 옷깃을 여미어주던 그가 내일 당장 나를 모른다 할지라도, 
최소한 내일 당장 하루만큼은 더 그를 사랑하고 내일 모레부터 미워하게 될 것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런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다. 잊어야지, 마음먹는 것이 아닌 마음이 가는대로. 그런 사랑을 추구하는 나의 꾸밈없는 마음이 오래가길 조용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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