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작년인가 재작년 즈음이었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이 미쳤다, 하루 종일 먹고 있다!’는 제목의 글을 스쳤던 기억이 있다. 먹방은, 시청자들을 본능적으로 집중시킨다. 그래서 드라마 속, ‘주인공이 이랬대 저랬대’하는 장면의 장치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프로그램 제작자 입장에선 먹방이 에로스보다도 쉽고 안전하다.

그런데 과연, ‘저것이 식사인가?’싶을 정도로 과한 콘텐츠도 있다. 포르노 같은 거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섹스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게 사회의 보편입니다’라고 암묵적으로 협의된 프로그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른바, ‘푸드 섹서(Food Sexer)’의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했다.

영화<미스터 빈의 홀리데이> 중에서

매체에서 이렇듯 몇 년째 먹고 있으니, 소개된 식당들도 상당히 많다! 우리나라는 유행과 관심의 속도가 매우 급진적이며 편중된 모습을 보인다. 어느 주말엔 다들 갈치조림을 먹으러 가고, 또 그 다음 주엔 다들 어란 파스타 집을 찾는다. 한정된 시간과 돈 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는 건 당연하다. 근데 가끔은 다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 뿐인가?

그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을까? 중요한건 이걸 제대로 모를 확률이 크다는 거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맛집에 입성한 누군가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sns에 실시간으로 사진을 게시할 거다. 이 행위 자체에서 이미, 이 음식은 맛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음식이 되어버린 거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 음식은 무조건 맛있게 생겨야 하고, 그래야 하는 거다.

나는 평양냉면을 엄청 좋아하는데, 평양냉면이 유행하기 전부터 좋아하던 sns‘장르사진’이 있다. 바로 평양냉면 ‘완냉’ 사진! 영롱한 은색 바닥이 미끈하게 드러난 냉면 그릇 사진을 좋아한다. 그가 얼마나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는지 느낄 수 있다. 보는 내가 더불어 행복해진다.

친절한 맛집 소개 블로거들은 가장 맛있을 온도의 음식을 즐기기 어려울 지 모른다. 메뉴판보다 더 멋진 사진을 뽑아내기도 하는 그들은,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는 편이다. 사실 나도 진짜 맛있는 곳에 가면 나오자마자 사진을 찍는데, 도저히 참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 스시다. 오마카세로 가면 두 세장만 찍고, 쉐프님이 만들어주는 것을 바로 먹는다. 촉촉한 상태의 생선 그대로를 즐기고 싶어서다.

지해수 칼럼니스트 사진

맛집들은 무조건, 맛있어야 하는 거다. 유명 맛집들의 인증샷은 ‘좋아요’를 유발한다. 올리느라 수고한 이들에게 작은 만족을 준다. 월요일에 회사에 가면, ‘너 주말에 그 식당 다녀왔어?’라는 질문을 들을 수도 있다. 물론 모두가 다-이러는 건 아니다. 단지 그러기 쉽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 역시 다수가 재밌다-고 한다면 그렇게 평가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음악이라고 다를까. 힙합 경연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참가자의 랩을 듣고, ‘잘 모르겠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유명 프로듀서들이 단체로 감탄을 하는 거다! 그럼 좀 전에 모호했던 판단은 어디가고, 시청자 역시 ‘와, 대박이다!’ 라고 느낀다. 아니, 그렇게 감상하려 한다. 왜? 그 판단이 안전해보여서다.

음식, 취향, 사회의 현상, 사건, 이념... 우리는 마주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여유가 부족하다. 아니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어서 판단을 내리라고도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볼게-는 없다. 어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뉴스 기사를 볼 때에도 베플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다수의 판단이 옳을 확률, 바꿔 말해 내가 실패할 확률이 적은 쪽을 택하기 위해서다. 안전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안전이란- 심리적인 측면이 매우 크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합에 대한 본능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

포유류인 인간들은 모태에서 약 10개월을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제일 첫 번째로, ‘분리’에 대한 자극과 충격- 즉 스트레스를 받는다. 새나 물고기처럼 알에서 깨어나 하늘과 망망대해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그런 생물체가 아니다.

구스타브 클림트<엄마와 아기>중에서

10개월간 모태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꼈던 태아.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엄마와의 감정 교류가 무지 활발할 수밖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엄마는 어느 순간 아기와 분리되려고 한다. 아니- 엄마는 휴식을 취하거나 자기 일을 하려는 것인데, 아기는 여기에서 또 분리의 충격을 받는다! 엄마가 젖을 주다가 떼어내는 것도 아기에겐 커다란 상실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이처럼,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외로움부터 알게 된다. 그러니 결합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이다. 최초의 상태와 완벽한 결합에 대한 욕구...! 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다만 비슷한 걸 찾을 뿐이다. 섹스를 하는 남녀의 몸에선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이는 모태와 태아 사이에서도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섹스 중,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육체뿐만이 아니다. 모태와 태아는, 우리의 욕구는 일치했었다. 태아시절, 내가 배가 고프면 엄마는 밥을 먹었다. 우리는 만족도, 기쁨도, 슬픔도 함께 했었더랬다. 이후... 우리는 더 많은 공감과 감정적인 안정, 교감을 원한다. 그렇기에 사람들과 유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소수가 아닌 다수의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사람들은 생각한다. 저들 중 나와 교감할 진짜 친구가 있지 않을까? 더 많은 다수의 집단일수록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더 높은 확률 게임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과감히 포기하고 보편적으로 보이려고 한다.

슬펐다. 마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 척- 잘난 척,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려나서는 스타일이 아닐 뿐, 결합에 대한 의지는 똑같다. 그런데 이것을 알더라도 계속 외로울 나의 본성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전망이라 너무 피곤하고 씁쓸하다.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이런 외로움을 견뎌낼 방법이 없을까?

한 가지가 떠올랐다, 평양냉면! 그래, 나 역시도 ‘완냉’ 후 사진을 올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은 ‘몰입’의 표현이었다. 사람들의 평가? 관심? 아니, 거기엔 ‘좋아요’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 ‘죽여줬던 그 시간’이다. 완벽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

프리다 칼로, <우주, 지구(멕시코), 나, 디에고, 숄로뜰이 어우러진 사랑의 포옹>

몰입은 ‘나’를 만드는 사건이다.

우리는 타인을 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내가 몰입했던 것이, 진짜 나를 만든다. 나의 조각이 쌓이고 쌓여 윤곽이 선명해진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궁금해 한다. 그리고 묻는다. 마치, 요즘 떠오르는 맛집이야길- “어디가면 만날 수 있어요?”

몰입의 즐거움 이면에는, 허무함이 존재한다. 어쩌면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진실을 보기 위하여 필요한 건 지혜가 아니라 용기다. 용기를 가지면 현실이 매우 불편해질 수도 있다. 그럼 그 용기는 좋은 용기일까? 나는 모두에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잠들기 전, 오늘 밤만이라도 한번쯤 생각해보셨으면 한다. 오늘 나의 결합의 본능은 어떻게 발현되었었지? 최근 나는 어디에 몰입하여보았나- 하고 말이다. 나처럼 바보 같은 것들 인들 어떠하리! 다만, 기억이 안난다-는 누군가가 있다면 난 작은 위로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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