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의 금도(襟度)

[공감신문 조병수칼럼] 1992년 봄, 뉴욕지역에 진출해있던 한국계은행들은 그전 해 연말에 발효된 미국의 외국은행 감독강화법(FBSEA)에대한 대비를 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때였다. 그 동안 주(州)정부 은행국에서 담당하던 외국계은행검사도 연방준비은행 (FRB)과 합동으로 진행하는 등, 미국 국내은행수준의 감독을 받기 시작했다.

그 때 뉴욕주 은행국과 FRB뉴욕의 합동검사가 나오면, 거의 한달 정도를 지점에 체류하면서 부문별로 검사를 진행하였다. 검사가 그렇게 장기간 진행되니까, 서로의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도 할 겸해서 수고하는 검사원들에게 ‘한국의 음식’도 한번 대접하면 좋을 듯 했다.

그래서 FRB측 검사수반에게 오찬초대의 뜻을 전했더니, 아주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냥 부담 없이 서로의견을 교환하는 기회를 갖자”고 재차 청했더니, “본부와 한번 상의를 해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하루 뒤에 통보하기를, “자기들의 식대는 자기들이 계산하는 조건으로만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얘기하면 부담만 주는 것 같아서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그런 엄격한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 내부통제부문을 전담하는 FRB의 여자검사원에게 추가설명을 할 때의 일이다. 

담당직원과 함께 회의실에서 현안에 대한 설명을 끝내면서 무심결에 “언제 점심이나 한번 모시겠다”고 했더니, 그 검사원이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자기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 이건 아닌데’ 싶어서 황급히 "그런 뜻이 아니니 오해 마시라"고 얘기하는, 순간적인 해프닝이 있었다.

나중에 같이 있던 직원에게 “무엇 때문에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물어보고는, 그만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점심에 초대 (invite)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take you out to lunch···”어쩌고 라고 덧붙인 표현이, "데이트신청 같은 것을할 때의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매우 조용한 성품의 그 검사원이 금방 상황을 이해했고, 현지직원도 같이 있어서 오해를 살만한 여지도 없긴 했지만,무심코 덧붙인 '어설픈 단어들’때문에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이렇듯 문화의 차이나 현지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일반 민간기관들이나 국제금융시장에서 통용되던 비즈니스관행이 미국의 공직자들에게는 통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렇게 엄격한 공복(公僕)의 자세가 그 나라를 세계의 강대국으로 만든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뉴욕 맨해튼 남단, Battery park인근>

'김영란 법'이라고 일컫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지 5개월이 되어간다. 그 사이 새제도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오가는 가운데 연말과 설 명절도 지나갔다.

선생님에게 건넨 캔 커피 하나가 이슈가 되고, 이 법의 허용기준을 두고 “얼마는 되고, 얼마 이상은 안 되고”하는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오래 전 경험했던 그 나라 공직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도 예로부터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는 말도 있고, ‘서정쇄신’이라는 단어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이다. 차제에,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분들부터 금도(襟度)를 지키고, 세계질서 재편의 격랑(激浪) 속에 있는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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