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자기 파괴적 욕망의 '제2의 그녀'들에게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해본 내가 자녀 양육이 이렇고 저렇고 그래서 당신 아이는 이렇게 컸군요, 라는 이야기를 늘어 뜨려놓으면 엄마들이 얼마나 비웃을 지 안다. 뭘 안다고 떠드는 건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부모’는 안 되어 봤지만 ‘자식’은 28년이나 해봤다고. 그래서 자식 입장에서 ‘육아’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또 나도 언젠가는 부모가 될 수도 있기에, 내 자식에게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이건 우리 부모와 ‘나’라는 자식이 아닌, 내가 아는 어떤 부모와 그들의 자식인 한 여자에 관한 것이다. 대게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난 꽤 몇 년에 걸쳐 그녀를 보면서 그녀에겐 ‘자기 파괴적 욕망’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그녀의 가정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아이는 저렇게 안 키우겠다’를 머릿속에 꾹꾹 심어두었다. 그녀를 분석하고 내 맘대로 판단하고 칼럼까지 써서 다시 한 번 사과하며,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건 꽤 많을 ‘제 2의 그녀’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일지도. 

내가 아는 그녀는 나쁜 남자들만 만났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도 있었고, 심지어 갓 결혼한 유부남도 있었다. 딱 봐도 ‘사짜’ 냄새가 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전부 다, 하나같이, 돈이 많고 못생겼었다. 그럼 그녀가 돈이 좋아서 그들을 만난 게 아니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녀는 꽤 예쁜 편이다. 흔한 ‘강남 미인’도 아니었으며, 키가 커서 옷발도 잘 받았다. 돈? 내가 알기로 그녀의 집은 못 사는 편이 아니었다.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꽤 먹고 살만한 편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남자의 차를 왜 그렇게 따지고, 연봉을 궁금해 하는 지 의문이었다. 그녀가 대놓고 ‘오빠 차는 뭐야?’라고 묻자, 역시나 그런 것에 잘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니 그런 것에만 잘 대답할 줄 아는 남자들이 꼬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외제차도 있고, 번지르르한 명함도 있고, 여자 친구도 있고, 와이프도 있는 그런 오빠들…….

한 동안 그녀와 나는 꽤 자주 보는 언니 동생사이였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 고민들을 털어놓았고 ‘남친’이었던 그 남자들과 같이 본 적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남자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난 그녀의 친구였고 그녀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싫었다. 난 아무리 사회생활을 해도 표정관리가 안 된다. 정말 그 남자들을 마주하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얼굴 근육의 존재감을 마구 느꼈었다! 심지어 부인이 있다던 그 남자는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유부남이면서 그녀에게 집착까지 했으니 이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한번은 그녀가 엄청 좋아하던 랩퍼가 내 친구였다. 친구가 우리를 자기네 레이블끼리 노는 파티에 초대했었고, 우리는 거길 놀러갔었다. 남녀 삼삼오오 술 마시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냥 프라이빗한 파티였다. 그런데 그녀는 5분 간격으로 오는 오빠 전화를 안 받기가 불안해진 거다. (자기가 가자고 했으면서) 결국 우린 거길 빠져나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서 반만 달라고 했다. 커피를 꽤 오래 마신 척을 하며 우리가 있는 곳의 좌표를 찍자, 그 오빠가 몇 분 만에 그녀를 데리러왔다. 시간이 늦었다며 집에 데려다준다고. 오빠는 아마 그녀를 내려주고 다시 부인이 있는 아늑한 집으로 갔겠지.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나뿐만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도 그녀와 놀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놀랐던 건, 그녀가 이런 남자들을 만난다는 걸 그녀의 어머니가 안다는 사실이었다! 난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집이라면 어땠을까? 당장 나의 휴대폰을 빼앗고 날 방에 가두려 하지 않았을까? 조금 어렸더라면 유학이라도 보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머리카락이 잘려나갔겠지.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달랐다. 마치 ‘네가 좋으면 할 수 없지, 뭐.’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나중에 너한테 뭘 해준다는 거니, 라는 것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와,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게 단순히 돈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이리도 자신이 없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손을 댄 건 나쁜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경미한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법적인 약물에도 손을 댔었다. 나는 솔직히 그녀의 꼬리가 밟힐 줄 알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내가 그녀보다 몇 살 언니니까, 타이르듯 말했다. 왜 그런 걸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말하느냐고, 그러면 네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랬더니 그녀는 멋있어 보이려는 게 아니랬다. ‘너도 약 좋아해? 난 좋아해. 나중에 좋은 거 있으면 나도 껴줘.’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랬다. 나는 그녀에게 도대체 약물을 왜했느냐고 물었었다. 하면 기분이 좋냐고, 그 때만큼은 행복하냐고. 근데 솔직히 그것도 잘 모르겠단다. 맙소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녀는 자기 파괴적 욕망이 대단했던 거다. 그래서 일도 열심히 안하고, 유부남에게 집착을 당하고, 못생긴 남자에게 험악한 말을 듣고, 협박을 당하고, 약물까지 손을 댄 거다. 마치 자기를 깨부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렇게 가미카제 자살 폭격기처럼 맹렬히 스스로를 파괴로 몰고 가는 중이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키도 크고 예뻤다. 강남에서도 꽤나 좋은 아파트 단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였다. 어머니는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그녀를 키운 거다. 정말 꽃이었다. 어딜 마음대로 갈 수도 없었고, 오로지 주는 물만 받고, 주는 거름만 먹고, 하늘을 열어주는 시간에만 햇빛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도 사람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뭐든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겠지만 좋은 것이 다 옳진 않았을 거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어울리길 권했던 친구들이 그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고, 놀지 말라던 애들이 진짜 좋은 친구였을 수도 있는 거다. 어머니가 ‘넌 여기에 소질이 있어’라고 가르친 것이 알고 보면 그냥 어머니의 어릴 적 장래희망이 투영된 것일 수도. 그걸 기대치만큼 해내지 못했을 때, 둘 다 실망스러웠을 거다. 그녀는 그렇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자라왔다. 그런데 그렇게 투자를 받고 자란 그녀가, 기대에 못 미치는 별 볼일 없는 어른이 된 거다. 그녀 스스로 꿈꾸던 당당한 여성의 모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원하던 딸내미의 모습도 아니었다. 참 애매했다. ‘이건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엄마의 방식은 실패했어, 엄마는 틀렸어! 라고.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어야했어! 그리고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 역시 자기 딸이, 이만큼이나 해줘도 겨우 요정도이니 좀 포기한 듯 싶었다. 그런 그녀는 어머니에게 더욱 화가 났다. 어머니가 무책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기 인생을 보험처럼 꼬박꼬박 매달 넣었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니 나 몰라라 하는 식인 거다. 이제 어른이니 네 인생 네가 살아라, 라고! 그래서 그녀는 얼른 어머니에게서 독립하고자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그만 싸우고 싶던 거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 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그녀는 나같이 잡초처럼 자란 애들이랑은 다르게, 독립을 하더라도 원룸에서는 시작할 수 없다고 했다. 곧 죽어도 살 신발은 사야 직성이 풀린댔다. 무조건 냉장고는 스메그를 사야 된단다. 그러니까 돈 많은 남자들이 자꾸 끌렸던 거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강남에 투룸 방세라도 내 줄만한 오빠들이. 

(코르셋을 옥죄듯이 그녀를 옥죄는 로즈와 그녀의 어머니. 영화 <타이타닉>중에서)

엄마, 당신은 틀렸어.
겨우 이걸 증명하려고 그녀의 인생을 거는 게 너무 아까웠다. 어릴 적 우리에게 부모란 이 세상 전부였다.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아이구, 착하네! 라고 칭찬해주면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어릴 때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해서 좀 잘 안되면 부모님 스스로 책임을 느끼셨던 것 같다. 이를테면 어릴 적에 할머니가 오늘 비 안온다고 우산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후가 되니 비가 왔다. 할머니는 내 하교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우산을 들고 학교로 찾아 오셨다. 이미 어느 정도 비를 맞았던 나는 금세 감기가 걸려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엄청 미안해하셨었다. 자기 탓이라며.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본인이 만드신 우리가 죄를 지으니까, 자기 아들을 보내어 그 죄를 씻게 하신 게 아닌가. 
우린 성인이 되면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가 ‘빠져줘야 한다’. 그만 개입하라는 거다. 인생은 독고다이! 나 혼자 해내는 거다. 성숙한 성인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물론 그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이다. 그 책임을 지는 연습을 자아 정체성이 형성 될 때부터 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본인이 어떤 사람인 줄 알게 될 테니까. 이 탐구를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다. 정신 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나 자유를 남에게 줘버리는 거라고 했다. 이것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그는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저토록 어린 아이마냥 퇴행하는 것이다. 엄마가 주는 것만 먹고, 탈이 나면 엄마 탓만 하고. 저런 어른은 결국 스스로 자유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선택의 과정은 어쩌면 늘 고통스럽다. 무언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을 포기해야 하잖아? 우리는 후회를 할 수 밖에 없고 그건 우리에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정서적으로 벅차다. 하지만 이것을 회피할 수 없는 방법은, 없다. 단지 이것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할 뿐이다. 
위에서 언급된 가미카제 같은 그녀가 만일, 다행히도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한다고 치자. 그녀는 더 이상 엄마에게 예전만큼 많은 걸 상의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대상이, 남편이 되는 거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은, 처음엔 그녀가 하나하나 어떻게 할지 묻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 잘못된 선택을 권유한 남편을 책망하는 그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지도. 
 
이제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할 차례이다. 자기 스스로의 인생에 책임지는 방법을 알아 가야한다. 약물을 해서 망가지는 것은 냉정하게 부모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삶을 산다면 그런 식으로 나를 망치고 싶을까? 아닐 거다. 
무언가 결정을 할 때 누군가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때론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들을 때, 이 사람이 명석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자인 누군가가 이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한다고 느낄 정도로 명쾌하고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때가 있다. 정말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 스스로 목에 줄을 묶어 누군가의 손에 쥐어주기 보다는, 서로 손을 잡고 걷기를 원한다. 물론 책임을 두 어깨위에 단단히 질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내 아이가 태어나면 스스로 어른이 되는 연습을 시킬 거다. 부모는 어느 정도의 방향만 ‘제시’해주면 되는 사람 같다. 그래, 애를 안 낳아보고 안 키워봐서 이렇게 술술 말은 잘한다. 나중에 이 글을 읽고 스스로 비웃을 지도 모른다. 아니, 나보다 내 아이가 이 글을 읽고 ‘세상에 우리 엄마가 헛소리했네.’라며 내 서재 책상에 이 글을 뽑아서 올려놓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루 빨리 반성하고 깨닫길!

아마 이 글을 읽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가씨들이, ‘뭐가 모자라며 그런 남자를 만나’라는 소릴 듣는 제 2, 제 3의 그녀들이 뜨끔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남한테 실패를 들키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실패하다가 점점 더 잘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주변에 진짜 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될 테니까. 정말 너무도 함께 기뻐해줄 것이다! 대신 잘하려고 하다가 당한 실패여야 용납이 된다. 가미카제 같은 실패를 위한 실패는,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갓 태어난 아기로 계속 징징 울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미 다 늙어서 당신에게 젖병을 물릴 힘이 남지 않을 테니까. 

인간이란 너무도 적응이 빨라서 어쩌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뭐든 적당한 게, 자기한테 어울리는 자유의 양이 정해져있긴 한 것 같다. 물론 최소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전제하에! 책임을 다하지 못할 사람에겐 그만큼의 의사 결정권, 딱 그만큼의 자유만을 허락해야 한다. 때론 그의 의사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칠 테니까. 연애, 부모, 정치, 직장, 종교 모든 게, 그러하다. 가미카제, 그리고 독고다이! 당신은 어디 즈음에 있나요?

(추신 : 오늘 글 제목에 인용한 <가미가제 독고다이(김별아 작)>는 사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의 제목입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모단보이의 러브스토리인데, 이렇게 추운 날 읽어보시면 정말 가슴이 뜨거워질만한 소설입니다! 아, 받고 싶다 그런 사랑. 감기 조심하세요, 독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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