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고 빈곤했다

[공감신문] “보국안민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해 내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폐정개혁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자’”

동학도와 농민들이 외친 말이다. 이들은 인간평등의 실현, 사회비리 척결, 외국침략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고 빈곤했다.

출처=네이버 학생백과

1894년 2월 15일 동학접주 전봉준은 동학도와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로 향한다.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끊임없는 탐학에 못 이겨 결국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든 것이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백성들에게 돈을 걷기도 했다.

이 같은 행태는 비단 고부만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이처럼 탐학한 조병갑을 징벌하고 내쫓은 뒤 관아의 곡식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고부 봉기를 안 정부는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보낸다. 고부에 도착한 이용태는 동학농민군을 위로하고 탐관오리의 처벌을 약속한다. 동학농민군은 이를 믿고 자진 해산한다.

하지만 이용태의 약속은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동학도와 농민들이 자진해산 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한다.

농민들까지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했다. 이 때문에 동학과는 상관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이 동학도로 몰리고 역적죄로 처벌당한다.

전봉준

이에 분개한 동학접주 정봉준과 농민들은 2차 봉기를 일으킨다. 고부 봉기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들은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으로 입성한다.

당시 전주성은 호남 지방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 같은 전주성이 함락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당황했다.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올라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낀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청은 이에 응한다. 청 군이 조선내로 진입할 것으로 보이자, 일본도 텐진조약을 들어 군을 조선에 진입시킨다.

동학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한 것을 우려해, 관군과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전투를 중단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화의를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일 양국 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그들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조선 내에서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후 일본은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민 씨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정권을 세운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통해 내정을 간섭하려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을 따르지 않는다.

흥선대원군

그러자 일본은 군을 경복궁에 무단 침입시켜 흥선대원군을 내쫓고,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으로 구성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개혁을 단행한다. 이때 단행된 개혁이 갑오개혁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세운 내각을 통해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 군을 공격해 선전포고를 한다. 우리 영토에서 2개월 간 걸쳐 일어난 청·일 전쟁은 미국 등 열강의 지지를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일본은 전쟁 승리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실시한다. 동학농민군은 이에 반발, 국가를 외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대일 전쟁을 선포한다.

동학농민군은 전쟁 선포 후 수도로 향하지만, 공주성에서 막강한 화력의 일본군에 참패하고 만다. 공주성 전투에서 많은 동학도와 농민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항일 의병에 흡수돼 항일 활동을 펼친다.

백성들이 탐학에 못 이겨 일으킨 봉기를 정부가 외세에 기대 억압했다는 점이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당초 안핵사 이용태가 죄 없는 농민들을 역적으로 몰아 처벌하지만 않았어도 사태가 이처럼 커지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평등의 실현, 사회비리 척결, 외국침략세력을 구축을 외친 동학농민운동은 100년도 지난 일이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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