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공감신문]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하지 못한 것을 한없이 부끄러워 한 시인이 있다.

자기합리화를 통해 친일 문인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 독립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 대한 반성을 많은 작품에 남기고 떠난 시인.

문인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충분한 역할을 했음에도, 펜을 놓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한 시인.

그의 이름은 ‘윤동주’다. 오늘로부터 72년 전인 1945년 2월 16일. 이날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윤석영과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윤석영은 명동학교에서 교사였고, 할아버지인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동주는 8세라는 어린나이에 명동소학교 재학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해, 글에 대한 두각을 드러낸다. 이후 그는 상급 학교에 진학해 문학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

윤동주는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 시절, 아버지 윤영석과 갈등을 빚는다. 상급학교 진학 문제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윤동주가 의학과(현재 의대)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지만, 윤동주는 문과를 진학하고 싶어 한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그는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이때 윤동주는 여러 편의 시를 쓰게 되고, 이중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게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편입한다.

윤동주는 편입에 앞서 유학 조건을 맞추기 위해 창씨개명을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학업을 위해 창씨개명 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괴로워했다고 전해졌다.

유학생활을 이어가던 윤동주는 일본 경찰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 당해 감시를 받는다. 불령선인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말을 따르지 않던 조선인을 칭하던 단어였다.

불령선인으로 지목 당한 뒤 얼마 있지 않아 1943년 윤동주는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된다.

이어 그는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다.

징역형을 선고한 판사는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한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옥사한다. 그가 옥사한 이후 불법적인 약물 실험을 당했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가 옥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행된다. 이 시집에는 윤동주의 유작 31편이 실려 있다.

윤동주는 1986년 대한민국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또 1990년 8월 15일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시,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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