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움, 그 위대함에 대하여...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우선 죄송하다. 제목 때문이다. 몇 달 전 SNS에 ‘난 왜 귀여울까’라는 말과 함께 올린 사진에 달렸던 댓글들이 떠오른다. 근데 심지어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칼럼에 이런 제목을 달다니, 어떤 표정들을 지으실지 상상이 된다. 하지만 이왕 욕할 거, 읽고 욕하시라. 적어도 당신 역시 이걸 읽으면 조금은 더 귀여워질 테니까. DEAL? 

난 실제로 지인들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착하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듣고, 귀엽다는 두 번째, ‘또라이 같다’가 세 번째, 그 다음에 똑똑하다, 그리고 예쁘다는 말은... 기억이 안 난다. 솔직히 내 외모가 객관적으로 귀여운 편은 아니다. 진짜 귀엽게 생긴 사람들은 살벌하게 많다. 그래서 궁금했다. 난 왜 귀여울까? 내가 왜 귀엽니?

사실 어릴 때 나는 귀여운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귀엽다는 말을 거의 못 들어봤다. 그래서 꽂힌 거다. 오히려 서른이 가까워오는 이제야 자주 들으니까! 도대체 어릴 때 왜 난 안 귀여웠던 걸까. 왜 난 나이 먹을수록 귀여워지는가. 그 해답을 찾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철학자 니체였다.

(프레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인 우리가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비유적으로 낙타, 사자, 그리고 마지막엔 어린 아이! 그렇다. 난 그가 말하는 어린 아이에 가깝다.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의 말대로 살아왔노라면, 이 논리가 서른도 안 된 나에게 통한 것이다! 이전의 나는 낙타였고 사자였기에 귀엽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 단계는 이러하다. 처음으로 우리는 ‘낙타’의 단계를 거친다.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사막을 걷는 낙타. 짐 진 자의 마음, 관습과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하여야 한다. 나의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물론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사자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 복종해 본 자만이 명령할 수 있다. 니체는 “자유를 얻어내고, 의무에 대해서조차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사자의 단계는 자유의지 그 자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린, ‘어린 아이’의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적어도 나는 연애나 친구 관계에서 낙타와 사자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아이 단계의 핵심은 바로, 놀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놀이 자체가 삶이다. 심지어 놀이를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것에 몰입한다. 어린 아이가 몰입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하던 흙장난을 생각해보자. 지금의 놀이터에는 흙이 없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아파트엔 있었다. 나는 열심히 무언가를 짓고, 허물고를 반복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몰입해서 놀았을 뿐. 그 뿐인가?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의 부모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쁘고 잘생긴 애들이랑 친구하는 걸 좋아할 뿐) 돈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적어도 아주 어릴 때의 나는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 완전히 어린 아이의 단계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생활을 할수록 더욱 난 그렇게 되어간다. 그게 편하다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나의 지인들은 닭갈비집에서 불판을 닦는 사람부터 재벌까지 소득이 각양각색이다. 이전에 세월호 참사 때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던 사람부터 대통령 측근에 있는 사람까지 정치색 역시 다양하다. 나에게는 그가 어떤 명함을 가졌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당신이 당신다운 이야기로, 나의 술 맛을 달게 해주는 사람이면 그뿐이다. 일, 그러니까 글쓰기 역시 나에게는 놀이다. 그래서 몰입할 수 있다. 여러분이 ‘넌 몰입하는 데 글을 이 정도 밖에 못써?’라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난 즐겁게 일하고 있으며, 어린 아이에게 놀이가 일상이듯 그렇게 놀고먹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거의 대부분 시간 동안 웃고 있고,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해수는 천진난만해.’ 
그랬다. 어릴 때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난 쥐뿔도 없으면서) 가진 걸로 판단하고 했을 때는 난 절대 귀여울 수가 없었던 거다. 

난 지금의 귀여운 내가 좋다. 그래서 앞으로도 쭉 귀엽고 싶다. 귀여움의 대단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에게 어필하는 데에 있어서 섹시함과 귀여움 중 뭐가 더 힘이 세냐고. 당장의 폭발력은 섹시함이 크겠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강력한 것은 귀여움이다. ‘섹시함’은 정복의 욕구를 지니게 하지만 ‘귀여움’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정복을 당하고 버려지느니, 오래토록 그의 곁에 머물며 사랑받으려면 결과적으로 귀여운 게 훨씬 남는 장사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희대 전중환 교수는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으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 자손은 물론이요, 동생, 조카 등도 돌보며 자라야 했기에,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 귀여워하도록 진화했다.” 또한 “그 아기를 돌보며 무사히 키워야 자신의 유전자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귀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은 이성 관계, 섹스, 임신, 육아활동처럼, ‘나의 DNA를 남긴다’는 것에 밀접한 활동에서 벗어 날수가 없다! 당신 역시 매력적인 이성 때문에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생산 능력은커녕 뇌 손상이 심각한 치매 노인들에게도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파로’라는 애완 로봇이 출시된 바 있었다. 바다표범 형태의 이 애완 봇은 치매 노인 치료 효과가 입증되어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파로가 어떻게, 어린 아이와 바를 바 없는 치매 노인들을 치료하고 돌봤느냐고? 아니, 파로는 오히려 그 반대로 했다. 항상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던 치매 노인들이 파로를 귀여워해주고 돌보기 시작한 거다. 파로가 배고픈 시늉을 하면 파로 전용 젖병으로 젖을 물려주고, 졸려하면 재워주고, 이쁘다고 뽀뽀도 해주었다. 귀여움을 독차지한 파로는 치매 노인들에게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보살피고 사랑하는 본능을 일깨워준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일깨워준 것이니, 퇴행하던 치매 노인들의 뇌 역시 반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귀여움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 

(파로를 돌보는 일본 노인 / kbs <명견만리> 중에서)

귀여워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보고 싶은 거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본능적으로 어쨌든 ‘내 것’을 남기기 위함이므로, 그것이 잘 유지되고 보호받길 원할 수밖에 없다. 즉, 잘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아하는 남자가, ‘귀여워’라고 말해주면 마치 ‘사랑스러워’라는 말로도 들린다. 심지어 내가 그 남자에게 귀여울 수 있음이 때론 날 막 들뜨게 한다! 그는 나에게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중환 교수는 “귀여움이 주는 즐거움은 맛있는 음식이나 마약이 주는 쾌락과 맞먹으며, 판단력을 무장해제 시킬 정도”라고도 했다. 아, 쓰면 쓸수록 마구마구 귀엽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귀여워질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바로 ‘모방’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모방할 때, 그 상대방에게 귀여움을 느끼기 쉽다고 한다. 그것은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을 닮고 싶어요.’.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요.’라는 무언의 표현이다. 
결국 또 똑같은 얘기다. 어린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다녀오면 할머니 사투리를 배워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귀여워지기 위해서는 꼰대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삶의 틀이 있고, 이런 건 싫어하고 하찮아해, 라는 걸 정해 놓으면 절대 누군가를 모방할 수 없다.
모방을 잘 하는 사람을, ‘남들처럼 옷을 잘 따라 입는 사람’이라 비유 해보겠다. ‘나’라는 형체가 있는 사람만이 남들처럼 옷을 입어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자아정체성이 없는 유령들은 그 옷을 집어 들지도 못할 것이다. ‘나’라는 형체를 가지려면,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내가 누군지 질문해야 한다, 혹은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이 말해 온 단계나 방법을 참고하라. 유령은 캐스퍼가 아닌 이상 절대로 귀여울 수 없다. 다가가고 싶지 않은 존재일 뿐. 

지금은 내가 어린 아이의 단계와 가까워서 귀여울 수 있겠지만, 어느 순간 다시 낙타나 사자의 단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무리 예전처럼 머리를 숏 컷으로 자르고, 별의별 귀여운 스티커 어플로 셀카를 찍는다 할지라도 전혀 안 귀여울 것이다. 아마 내 온몸에서 낮고 무거운 갈색 기운이 팡팡 풍겨나겠지, ‘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아! 난 꼰대다! 다가오지 마!’
사실 귀엽다는 건 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만만하다는 건 우리 국어사전에도 나오듯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연하고 보드랍다, 2)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 [네이버 국어사전] 첫 번째는 영어로 치면 ‘mild’, 두 번째는 ‘easy’ 정도일 것이다. 
‘귀엽다’는 건 전자의 부드러운 만만함과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 유대감을 쌓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후자의 의미로 만만해서 막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니까 더 잘해주고 싶은 게 아닐까. 그것을 잘 구분하는 것이, 특히 연인과 친구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니노미야 히카루 만화 <허니문 샐러드>중에서)

이로써 내가 왜 귀여운 지 해명이 좀 되었으려나. 맞다, 사실 글로써 해명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 외모가 귀엽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귀엽다는 건데 나는 그저 글로써 여러분을 만나고 있으니! 아마도 거의 대부분 실제로 못 뵐 분들이라 맘 놓고 지어본거다, 아하하....  
아니 그냥 제발 좀, 읽어주셨으면 하는 뜻에서 도발한번 해 본거다. 어쩌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내지 말고, 귀엽게 봐주세요. 귀엽게, 귀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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