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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행복을 쫓지 않을 권리‘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행복할 수 있다. -조지 오웰’
  • 지해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1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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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내가 어릴 적에 <TV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대부분 이웃이나 가족에 대한 따뜻한 온정과 배려가 넘치는 이야기였다.

주변의 이웃을 돕는 행위를, 나는 거의 매일 하고 있다. 아주 적은 돈을 매일 다른 곳에 기부한다. 하지만 이 행동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이전에 ‘모닝 기부’가 모닝커피보다 진하다고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경제적으로 ‘3천원’으로 할 수 있는 활동 중엔 커피보다 기부가 더 가성비가 좋다고 느낀다.

PIXABAY

어려운 환경에 있는 누군가가, 시민들의 기부금에 의해 필요한 것을 얻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삶은 행복해지는가? 아니, 조금 더 나아질 뿐이다. 시민단체 등에서 기부하는 금액은 의료지원비나 생계비 등 명목이 분명한 최소한의 금액이다. 로또가 아니다. 이건 ‘행복’과 연관 짓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 그는 이미 행복할 수도 있고, 이후에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제목은 잘못되었다, 아니 무책임하다. 저렇게 제목을 지었기에, 사람들은 기부하지 않는 것이다. 저 프로그램을 보고 자랐을-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내 나이 또래들은, 학교에서 하라는 여러 가지 기부를 이미 해보았다. 결핵 환자를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샀고, 같은 교복에 매년 다른(?) 사랑의 열매를 달았다. 또 다시 겨울이면 구세군 냄비에 천원, 이천원을 넣었다.

그래서 그 행위가 ‘행복’으로 이어졌었나? 아마 직접적인 자극이 있는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오히려 몸을 쓰는 봉사는 행복에 직접 닿기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기부와 같은 간접적인, 한마디로 ‘인스턴트커피’ 같은 선행은 딱 그만큼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행복 말고 다른 성취나 정서를 아이들에게 제안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들은 사회나 지구에 더 많이 환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겐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를테면 ‘해수가 3천원이나 기부했구나! 착하네.’라고 말하면, 되려 3천원이 아쉬운 아이들에게 위화감만 줄 뿐이다. 차라리 ‘해수가 엄청 좋아하는 베스킨라빈스를 포기하고 기부를 했네!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아이는 자신이 왜 기부 하는지 모르고 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렇게, 동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앙리루소 <전쟁>, 1894

우리 사회는 너무 무분별하게 행복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기 어려워졌을 수 있다. 세상은 마치 인간에게 행복이 매우 당연한 것인냥 말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전염병에, 종교에, 전쟁에, 신분에, 독재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싸우지 않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대한민국의 헌법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에겐 권리가 있다! 아니 그럼 도대체 행복이 뭐지? 난 갑자기 이런 매우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최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기 전에,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았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행복은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 및 이성적 경지 또는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것이라 한다.

희망을 그리는 상태! 정말 멋진 상태다. 5분 뒤가, 오늘 밤이, 내일 아침이 기대되는 상태라니! 게다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난 지금 행복한가.

아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정말 개인적인 의견이다.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그것을 가졌기에 오히려 불안했다. 초등학교 때, 제비뽑기로 우리 반에서 가장 잘생긴 반장 아이와 2주 동안 짝궁이 된 적이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주 화요일부터 불안해졌었다. 나에게 불현 듯 주어진 행운이, 또 다른 아이의 되지 말란 법이 또 없잖아? 반장은 나 말고 다른 애랑 더 친해질지 모른다, 연필깎이도 같이 쓰구.... 성인이 된 후에 느끼는 불안감은? 매우 당연하다.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불안감을 느낀다. 위의 사전적인 정의대로라면 행복은 매우 비현실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중 일부, 1503년-1515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작가 유발 하라리는,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여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화학적 시스템이라 했다. 인체의 감각에서 그것이 결정된다는 것...!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의 몸은 이런 행복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어져있다. 쾌락이 지속되면 발전하려고 하질 않을 테니까. 그 상태가 매우 좋고 편해서다. 인류를 발전시킨 것은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들이었다.

성경에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쓰여 있다.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이미, 그들은 행복한 상태에서 벗어난 거다. 먹을 게 넘쳐나던 에덴동산 시절과 달리, 이들은 땀으로 노동해야 했다. 더 많이, 더 나은 것을 먹기 위해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과 방법,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어쨌든 행복을 느낀다는 건, 생화학적 시스템에 의한 것이기에 오래가질 않는다. 만일 누군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치자. 행복해진 그의 인체가 거기 적응하는 건 금방이다. 또 다른 행복의 순간을 찾게 될 거다. 그 과정은 또 다시 고단할지 모른다.

조지오웰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 작은 쾌락의 순간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일 아닐까. 술이나 퍼마시고 쾌락적인 섹스를 하면 쉽잖아? 우리 인생의 목적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중 일부, 1503년-1515

어느 순간 보면, 세상은 마치 ‘너 빼고 다 행복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SNS를 자주 보면 더욱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다들 잘생기고, 예쁘고, 돈도 많고, 친구도 많고, 잘 나가고, 집안도 화목하고, 자존감도 높은 것처럼 보인다. 나만, 그렇지 못하게 사는 것 같다. 나만, 불행한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의 순간은 매우 짧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도 정상적인 삶의 시간이다.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어떨 때에 행복한 지, 희망을 품는 지,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진짜 행복이라는 쾌락을 알 수 있다.

사회가 강조하는 ‘행복’은 ‘시장’과도 친하다. 마치 ‘이것을 사면 넌 행복해질지도 몰라–’라고 말하는 제품들이 어디 한 두 갠가. 아니, 요즘엔 ‘행복한 사람 같아 보일 걸?’이라는 이미지를 판다. 그게 훨씬 잘 먹힌다.

문득 이 글을 쓰자니 어린 시절 들었던 이소라의 ‘난 행복해’가 떠올라서 오랜만에 들었다. 가사는 충격적이었다. 새로운 사람에게 떠나며, 지난 연인에게 ‘넌 행복해야해’라고 말한다.
...그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겠는가! 내가 기부하던 어려운 이웃들 같이,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어려울 텐데! 아니, 심지어 다른 남자한테 가는 거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순간, 남겨질 이에게 행복하라 말하는 화자의 심정은 무지 공감된다. 이건 미지근한 논리를 넘어서는- 가슴만 아는 문학적인 감정인 거지. 사랑해봤으니까, 알 수 있는 그런 거!

피카소 <거울 앞의 여인>, 1932

살면서 여러 번, 이런저런 사건들을 보며 크게 놀랄 때가 많다. 와, 저랬구나... 저게 현실이었어? 하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것들을 가끔,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냥 막연하게 배워 온, ‘행복’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보셨으면 한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과연 타당한 걸까? 나에게 행복이란 정말 무엇이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최근,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뭐였냐고? 말해줄 수 없다. 그걸 말하지 않는 것이 내가 이 다음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난 몹시 시린 불안과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살아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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