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공간이란, 제 3의 공간이다.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누군가는 일정한 수입, 종교, 사회의 민주화 정도, 배우자나 애인의 존재 등이 그 조건이랬다. 글쎄올시다, 내 주변엔 그런 걸 모두 갖추지 못했어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게 있으며, 물론 나 역시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겐 ‘제 3의 장소’ 즉, ‘아지트’가 있다! 아지트는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사실 SNS에서 날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난 정말 가는 데만 간다. 당연히 사장님들이랑 다 오빠 동생 하는 사이다. 친해서 간 곳도 있고, 가다보니 친해진 집들도 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가서 일도 돕는다. 인테리어나 물품에 대한 간섭도 한다. 그리고 사장님이 내 의견을 들어주신다. 나도 모르게 주인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 된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하고도 어쩌다보니 인사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내 아지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늘 오는 사람들만 온다는 것이다. 마치 어느 인디뮤지션을 나만 알 테야,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이랄까? 외부인(?)이 들어오면 우린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은근 그 테이블을 따돌리는 악랄한 짓까지 해댄다. 그러다가 누가 그에게 아는 척하면, ‘아, 저 오빠 친구구나, 그럼 괜찮아.’라며 맘을 놓는다. 완전 유치하다. 근데 그래도 된다. 왜? 아지트니까! 우리 거잖아? 사장님한텐 무지 죄송하지만. 

이런 공간을 나만 가질리 없다. 누구에게나 이런 공간이 있고, 또 있었다. 이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LP바인 압구정 핑가스존, 전자신발, 트래픽과 같은 곳이 그런 아지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난 영화에서 보았지만 아마도 이전엔 ‘쎄씨봉’ 역시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들 ‘음악’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거다. 물론 이런 공간이 꼭 술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지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같아 보이지만 그 존재의 유무는 우리의 행복에 큰 영향을 준다. 난 실제로 그걸 경험했다. 
나에게는 압구정동에 ‘Bar Loft’(이하 로프트)라는 아지트가 있었다. 혼자서도 일주일에 4-5번은 갔던 것 같다. 심지어 술을 안 마시는 날에는 주스라도 마시면서 사장님들과 수다를 떨며 음악을 듣다 오곤 했다. ‘혼술’하러 간다지만 사실 혼술이 아니었다. 거기가면 나 같은 단골들이 하나 둘 와서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압구정 구석에 겨우 테이블 세 개짜리 아주 작은 술집이었는데, 알만한 연예인들도 꽤 많이 단골이었다. 하지만 정말 외부인(?)들이 오면, ‘지들끼리 노네’ 할 만한 분위기라 오래 마시진 않더라. 그래서 좋았다. 근데 그런 나의, 우리의 로프트가 없어진 거다. 아지트가 한 군데만 있던 건 아니지만 로프트가 없어지니 너무 우울했다. 마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학생 수가 적어 폐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분이랄까. 가끔 로프트에서 알게 된 지인들끼리 모여 소주를 기울인다. ‘우리 그때 정말 재밌었는데.’ 라면서. 

미국의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라는 사회학자는 아지트를 ‘제 3의 공간(The third place)’이라고 표현했다. 제 1의 공간은 집과 같은 생활의 공간, 제 2의 공간은 직장과 같은 생산의 공간이다. 산업사회에는 이 두 가지만 있어도 됐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제 3의 공간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제 3의 공간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고, 창조할 수 있는 영감을 주며, 사유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럴 걸? 여기 기혼인 독자님들 중에 제 1의 공간인 집에서 완벽히 휴식하는 사람, 혹은 제 2의 공간인 직장에서 완벽하게 창조하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지! 단순한 작업이 아닌 머리를 많이 쓰는, 또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에게 제 3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마치 숨 쉴 틈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좋은 아이디어와 활력을 가지겠는가? 
올든 레이버그는 제 3의 공간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선 그 안에는 서열이 없어야 한다. 소박하거나 혹은 격식이 없어야하며, 자유롭게 수다를 떨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물론 ‘아지트’라는 특성에 걸맞게 출입이 자유로워야 하며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 먹고 마실 만한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공간이 당신에게 예비 되어 있는가? 언제든 나를 나로서 받아줄만한 그런 곳 말이다. 

이전부터 이런 마케팅을 잘한 예로 꼽히는 게 바로 스타벅스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이런 카페가 많지 않았다. 스타벅스는 전기 콘센트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고, 편안한 소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 맛에 익숙해져갔다. 지역 커뮤니티에서 카페의 역할이 커지는 데 한 몫 한 것이다. <멍청한 소비자들(범상규 저)>에서는 9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민들레 영토’가 그 콘셉트를 잘 이용했다고 말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에도 비슷한 곳들이 있었다. 논란이 많았지만 ‘닥터 피쉬 테라피’를 가지고 들어온 ‘나무그늘’이라는 카페였다! 당시 난 거기에 발을 담그지는 않았지만, 단돈 5천원을 내면 빵과 커피를 맘껏 먹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다. (게다가 책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과일빙수를 파는 카페들도 유행이었다. 어떤 카페들은 생크림 바른 빵을 무한으로 제공하며, 타고난 빵순이인 여중생들의 주린 배를 맘껏 채워주었다. 그리고 또 힘내서 수다를 떨었었지! 아, 기억난다. 빵 리필을 받아오는 게 얼마나 눈치가 보였던지, 가위바위보를 하며 ‘이번엔 니가 다녀와’ 라고 했던 새콤하나 시큼했던 추억들! 

아무래도 일반직보다 비교적 철학적 질문을 많이 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아지트를 가지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가 많은 영국은 이전에, ‘이야기방’이라는 커뮤니티 장소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한 사람씩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 와서 수다를 떠는 거다. 그건 누군가들에게 정말 큰 기쁨이자 영감이었을 거다! 
나 역시도, ‘집에 너 혼자 있는데 왜 글을 굳이 밖에 나가서 쓰니?’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언가 창조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은 다 이해한다. 그들은 제 3의 공간이 주는 창조적 영감에 대하여 무언의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즉, 글쓰기는 나에게 제 2의 공간에서 해야 할 생산보다는 놀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만 봐도 그러하다. 거기 나오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뭘 쓰거나 만들거나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화 내에서 대부분 한 술집을 뚫어서 거길 다닌다. 그게 아지트 인 것이다. 제작비 때문이 아닐 거다. 홍상수는 아지트가 주는 행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일 것이다. 

(영화 <우리 선희> 중에서)

아지트가 가진다는 ‘먹고 마신다’는 특성에 있어서 생각난 건데, 이전에 아는 오빠가 SNS에 올렸던 사진 때문에 정말 빵 터진 적이 있었다. 더 정확히, 그 사진에 대해 오빠가 쓴 말이 웃겼다. 오빠는 #과일맛집 #김밥맛집 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으며, (본인에게는) 출입이 자유롭고, 접근성이 우수하며, 수다 떨 수 있는 제 3의 공간 사진을 업로드 했다. 

그랬다. ‘텐프로’ 가게였다! 난 이 사진을 써도 되냐고 허락을 받기위해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거기서 김밥 먹으면 얼마 받아요?’ 라고 물었다. 오빠는 어차피 술값에 다 포함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건 다 사다준다고 했다. 하긴 비싼 주대를 내고 술을 마실 텐데, 그깟 소시지 김밥쯤이야! 그에게 저기는 정말이지,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아니겠는가. 게다가 내가 알기로 1종 업소들에서는 거의 흡연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이 흡연에 관한 법 때문에 피해보는 건 흡연자들보다 아지트 주인들이다. 아무데서나 마시는 한 잔이 생각나서가 아니라, ‘여기서’, ‘아지트’에서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왔던 단골 ‘흡연자’ 손님들에게, 담배를 나가서 피우라는 거는 왠지 격하게 환영해주는 느낌이 아니라는 거다. 바(bar)라고 치면, 두 잔 마실 거 한잔만 마시고 가게 된다. 뭐, 요즘은 다들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박리다매로 손님들이 금방 치고 빠지는 곳이 아니라 후리소매로 영업하는 아지트의 업주들은 속이 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되다보니, 흡연 구역이 마치 ‘아지트 속의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레이 올든버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은 곳들이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카페, 미용실, 헬스클럽, 교회, 절, 도서관, PC방, 파라솔이 넓은 여름날의 편의점, 정말 그 포텐셜(potential)이 어마어마하다!  
‘평양냉면’ 열풍(?)이 불던 재작년, 서울에 내로라하는 평양냉면 집들을 거의 다 다녀봤다. 개인적으로 내 입맛에는 필동면옥이 1등이었는데, 장소가 기억에 남는 건 을지면옥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이북 사진들로 평양 냄새 폴폴 풍기던 그 곳. 유독 할아버지 손님들이 많이 계셨다. 거기에는 슴슴하고 짭쪼름한 냉면 육수에 소주를 곁들이며, 이북을 그리워하는 담소들이 오고갔다. 그들의 아지트였다. 
우리 동네, 이태원 경리단길에는 그런 제 3의 공간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아무래도 동네 특성상 다양한 콘셉트가 존재하다보니 끼리끼리 모이는 커뮤니티가 유독 발달된 것 같다. 남산이 근접해 있어서 큰 개를 키우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들도 있고,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술집도 있다. 어떤 술집은 타투 많은 사람들, 또 어디는 아이리쉬 풍의 턱수염난 사람들이 유독 모이는 곳도 있다.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단골집, 아지트가 정해져있다. 그리고 꼭 자기랑 똑같이 생긴 가게를 잘도 골라 주구장창 다닌다. 그냥 그 가게에 거기 걸어놓은 한 폭의 초상화 같다. 그런 사람을 따라 나도 거기가면 그 ‘가게 풍(風)’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복잡한 서울 중심부에 사는 거에 비해 유달리 여유로운 비결이 여기있을지도. 

자기 소득과 접근성, 취미에 맞는 공간을 찾는 노력을 좀 하면 우린 그 곳에서 ‘늘 그랬듯이’ 평온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 어쩌면 나에게 ‘제 3의 공간’이자, ‘위대한 공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대신 나처럼 너무 의존적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이번 주말엔 신사동에 있는 아지트 중 한 곳이 4주년을 맞이해서 거길 놀러간다. 오픈 초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꽤 있었는데, 정말 감격스럽다. 하긴, 나도 그땐 정말 돈이 없어서 얻어 마신 술이 몇 십 병인가? 우린 같이 성장했구나. 사장님한테 꼭 전해드려야지, 잘 버텨주셔서 감사하다고! 우리 오래가자고! 

행복해지는 건 때론 정말 간단한 일, 그러나 길 잃은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나서듯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 보상이 있기에 할 만한 것이 아닌가. 난 이제 이 글을 다 마친 지금, 제 3의 장소에서 휴식을 얻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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