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인류는 자연의 지배하에서 구성 되어온...

[공감신문 신도연칼럼] 최초 인류는 자연의 지배하에서 구성 되어온 자연의 구성원 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독립을 외쳤다. 이른바 ‘기술의 19세기’를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들어 인간의 삶이 안위와 과학의 발전, 병리, 위생 등 지금은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대하는 것이만 그때만해도 신세계를 보는 듯 했을 것이다.

기술의 19세기를 넘어 20세기의 도래는 문화의 20세기를 이끌어 왔다. 이른바 문화의 중흥기를 바로 20세기라 말한다. 의식주와 기술은 물론이고 이어 인간이 문화의 향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발전이 바로 그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20세기의 문화는 기존 전통 시대의 문화를 대중화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전통의 형식과 내용은 각기 넘지 못한 넘사벽이었다. 이미 우리는 계급 사회를 경험한지라 동양과 서양, 백인과 흑인, 상하층의 계급 문화를 넘지 못하고 기성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진출처: 음악의 크로스 오버>

■문화의 움틔우기

이제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렵기만 했던 문화의 경계선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고 이른바 융합과 크로스오버(cross-over)가 보편적인 현상이 된 요즘이다. 비근하게 한국의 전통은 따뜻하게 밥을 지어 손수 만든 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모습에서 지금은 피자에 입맛을 다지는 때가 됐다. 그것도 감자, 김치, 고구마 등 다양한 피자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맛의 크로스오버는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벅스까지 한국의 고유 음식을 결합한 상품을 내보이고 있다. 
음악은 어떠한가? 음악의 크로스오버는 그 영역이 너무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국악째즈, 팝페라, 뉴에이지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하는 것은 바로 크로스 오버가 하나의 장르로 대중 문화를 선도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가야금으로 캐논곡의 연주라 어찌보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콜라보일 것 같지만 그 음악은 가히 놀라움이었고 그 발상은 더더욱 신선함을 선물했다. 또 일찍이 사물놀이의 대중성은 물론이고 서양적인 클래식에 한국의 김덕수가 결합한 음악. 나아가 언더그라운드 록을 한국적 감성과 이미지로 재구성한 김수철, 한국의 조수미가 부르는 오페라 등 다양한 크로스 오버 장르가 각기의 장점을 그대로 우리에게 확인 시켜주고 있지 않는가.

슬픈 노래가 경쾌한 음악에 맞춰 불려 지는 것은 90년대 음악의 크로스 오버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출처: 음악의 크로스 오버>

■크로스 오버는 과연 문화의 전략인가 해체의 수순인가

이러한 크로스 오버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아니다. 크로스 오버는 오랜 시간 숙고한 결과의 산물이다. 크로스 오버는 다국적 문화 기업이 그 나라에 맞는 문화적 현지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문화의 크로스 오버는 모든 콘텐츠가 0과 1로 치환되는 디지털 고유의 문화적 속성과 기술 등 다양한 면이 닮았다. 아나로그가 기술이 오래전 문화를 이끈 것과 대비되게 디지털 문화를 이끄는 융합의 힘의 원천이다. 이 중요한 힘의 논리는 기존의 것을 깨고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 오버의 장점이다.

편견은 고집이고 척사의 한 몫이다. 그 편견을 깨는 것이 바로 경계를 허물고 해체하는 크로스 오버의 본 모습이다. 
해체는 가지고 있는 경계를 허물고 단단한 기존의 기반을 깨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고정관념과 도그마를 깨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아방가르드적인 것이다.
이러한 크로스 오버는 누군가에게 변태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사회 변화와 진화의 원천적 힘이기도 하다.

문화의 접변과 융합의 힘이 오랜시간을 통해 정착한 새롭지만 다양한 문화의 전형화를 자본의 문화전략과 맞서 어떠한 모습으로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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