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김창호칼럼] 오래 전에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영화가 대박을 터트리고, 소위 박스 오피스가 된 적이 있었다. 대충의 줄거리는 어릴 때 담임을 맡았던 여자선생님으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았던 가난한 수재가 나중에 검사가 되어, 살인의 혐의로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선 여자선생님을 결국 구해내는 것으로 감동적인 신파조 영화였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기억한다. 후일 법조계 일각에서는 스승인 여선생님과 제자인 검사의 특수한 관계는 재판의 공정성을 해치는 기피라는 제척 사유가 되어 실제 재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했지만, 당시 대중의 심금을 울린 법정 드라마의 하나다. 지금도 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나 법정 드라마의 인기는 여전하다. 

<변호인>, <재심>, <부러진 화살>, <피고인> 등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에 짓눌리고 실체적 진실과 정의에 굶주린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의 기회를 넉넉히 주고 있다. 어지러운 탄핵정국 과정에서도 변호사들과 벼락출세한 특검은 특정 당파에 줄을 서서 그들의 나팔수가 되고, 칼이 되고, 방패가 되었다. 과거 오욕스러운 정치검찰이라는 기시감(Deja-vu)의 충분한 반복이기도 했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권력암투의 사극史劇이나 베스트셀러가 된 인기작가의 소설 이상의 관심을 끈 것이 사실이다. 

‘변호사는 좋은 이웃이 아니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지나친 전관예우, 수억 원~수십억 원 이상에 달하는 성공보수 등을 감안하면 일반인들의 이런 비판과 박탈감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변호사들의 얘기는 다르다. 재판이 3심, 대법원까지 가면 재판 관련 기록만 A4용지로 수천 장, 때로는 수 만장에 이르기도 하고 재판 기간도 수년이 걸리기도 해 변호사 수임료 수억 원은, 그동안의 쏟아 부은 노력과 지식에 비해 그리 많은 금전적 대가는 아니라고 항변을 하기도 한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 법원에서 재판하는 판검사 모습>

정부 부처의 장관까지 지내고 변호사를 개업한다는 어떤 분에게 물었다. “어휴, 장관까지 지내신 분이 법원에 소송 보따리를 들고 후배들 찾아다니시려면 힘들겠네요.” 아니다. 변호사 사무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빈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메모와 포스트 잇, 각종 약속 등이 가득했다. 소송을 독식하는 전관예우의 현실이다. 법원장, 검사장 등 유력한 경력의 신참 변호사는 평생 벌어야 할 돈을 개업 1~2년 사이에 벌 수 있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대학교 4학년 때 캠퍼스 커플로 결혼을 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뒤늦게 사법시험 공부를 해 판사가 된 친구의 경우다. 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는 맞았으나, 처갓집도 너무 가난했고 자신의 처지도 그런데다, 애들은 커 가고해서 경제적인 문제로 깊은 고민을 하다 결국 판사의 길을 접고 변호사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운이 매우 좋았는지, 실력과 명성이 있었는지, 개업 2년 정도 만인 80년대 후반, 20억 원 이상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데 변호사가 되어 하는 일이 부족한 공부를 하거나 소송 서류를 뒤적이는 것보다는 선·후배 법조인들 자주 만나고 거의 매일 그들과 함께 노름판, 술판 등에 어울려 돈을 잃어주고 고급 룸살롱에서 술값 내주는 일도 많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려고 변호사 했나는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닥터 지바고>를 쓴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였다. 톨스토이의 각종 작품에 삽화도 그려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1908년 아들 파스테르나크가 명문 모스크바대 법대에 입학했다고 하자 톨스토이는 친구인 그 아버지에게 “사내가 법학을 전공하는 것은 여자가 매춘을 직업으로 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법조삼륜法曹三輪이라는 판사, 검사, 변호사 집단은 우리 사회에서 명불허전의 엘리트 집단이다. 평생에 걸쳐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학자·교수라는 지식인이 대거 몰려있는 상아탑, 학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우수한 인적 자원이 특정 분야에 몰리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과반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의과대학을 가고, 문과반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법대를 간다는 얘기가 지금도 맞는 얘기라는 것을 실감을 한다. 따라서 ‘서울대 또는 관악대’를 사실상 대표하는 학과는 기초과학이나 인문학 분야의 학과가 아니고 법학과나 의과대학이라는 평가가 있다. 반면에 영국의 명문대 옥스퍼드에는 역사학과에 최고의 인재들이 몰린다고 한다. 

판·검사들은 속세의 논죄論罪나 탄핵(죄상을 들어 책망함) 등이 주로 담당하는 업무라 비속한 측면이 돋보이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지식의 온축이나 지성사의 잠재력은 조용한 연구실이나 고고한 학림의 수준 못지않다. 머리가 아주 뛰어난 천재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법조 구성원의 대부분이 학창 시절에 학업성취도도 상위 1~3% 이내를 점했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 해서 반장, 부반장 등도 도맡아 하면서 리더십도 자연스럽게 함양된 인재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중에서 문장력이 좋으면 고시에 빨리 합격하는 경향까지 있다고 한다. 이른바 소년등과, 최연소 합격의 가능성이다. 신언서판이 좋아서 정치판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과거에는 고시에 합격하면 동네 입구에 축하 플래카드가 내걸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요즘은 1,000 명 전후의 합격자가 나와 희소가치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판·검사가 되는 것은 지금도 가문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시 합격은 예전에도 이른바 <인간사 사쾌(四快)> 중의 하나로 부러움을 샀다. 가뭄에 단비 내리는 것, 타향에서 고향 친구 만나는 것, 동방에 화촉 밝히는 것과 함께 과거 방문(榜文)에 이름이 붙는 것은 입신양명의 첫걸음이었고 효도의 기본이었다.

이런 저런 좋은 일들도 줄을 이었다. 최소 사무관급 이상의 벼슬이 예정된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순식간에 계층 이동, 신분상승이 된다. 소인들이 많은 향리鄕里에서는 나이 많은 것이 최고지만, 아침 일찍부터 일한다는 조정朝廷에서는 벼슬 높은 것이 우선이다. 종착역은 모르지만 출발역은 높은 곳에서 시작한다. 거기에다 좋은 혼처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돈 많은 처가, 든든한 장모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평소 아끼고 존경하는 친구가 알려준 사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남에 소재한 어떤 결혼정보회사로부터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해군 법무관으로 있는 아들에게 좋은 혼처가 있으니 맞선을 주선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상대는 강남 재력가의 딸이라고 해서 ‘재력가의 기준이 뭐냐’고 물었다. 최소한 100억 원 이상을 가져야 재력가로 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아들이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어 정중히 거절했지만, 소위 금수저가 된 판·검사들의 결혼 풍조가 떠올라 친구는 상당히 씁쓸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소학》에서는 처가의 재물로 치부를 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다. 

오래 전 같은 동네에 살던 어떤 노부부의 씁쓸한 경우다. 자신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다닐 때나 검사가 되었을 때, 이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출세한 아들 자랑을 많이 하고 다녔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후 어느 해부터는 갑자기 그 잘난 검사 아들 자랑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이 검사면 뭐 하나. 열심히 뒷바라지 했는데 이제 얼굴도 볼 수 없는데”라며 기가 잔뜩 죽은 표정으로 아들에 대해 크게 섭섭해 했다. 이웃들이 전하는 후문에 따르면 검사 아들이 부잣집에 장가를 간 이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찾아오지도 않더니 언제인가부터는 아예 발길까지 끊게 되었다고 한다. 좋은 학교 나오고 고시 합격했다고 인품까지 훌륭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재승덕박이라는 옛말이 그른 것은 아니다. 

판사는 판결문을, 검사는 공소장을, 변호사는 변론을 쓰는 고재능문高才能文한 지식인이자 엘리트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나 지도층, 엘리트들이 우리 시대의 불신과 고통의 근원이라는 말도 생소하지가 않다. 배운 자, 먹물 중에도 몹쓸 인간이 많아서 우리는 자주 절망한다. 독서를 한 도둑놈도 많은 세상이다. 그리고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 제대로 사람 되자고 하는 것이 공부이고 독서인데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공부는 열심히 했으나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소리도 높다. 붓대와 먹물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연암집속집 / 열하일기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

구한말의 우국지사 매천 황 현(1855~1910) 선생은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언행일치, 지행합일, 아는 것을 지키며 살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처지를 자조했다. 매천 선생은 또 일갈했다. “글만 아는 선비는 무엇에 쓰나.” 연암 박지원(1737~1805) 선생도 《열하일기》에서 크게 한탄했다.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 

우리가 오늘날 겪는 헬 조선의 모든 고통과 혼란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할 것인가. 소위 머리 좋고, 많이 배우고, 출세한 자들의 위선과 해악이 새삼 무섭고 두렵다고 느껴지는 살벌한 정치판이자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그러나 오래 살면서 지은 잘못과 허물이 누구인들 크지 않으랴. 

* 본 칼럼은 당사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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