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경험치가 쌓여야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거랍니다.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지해수칼럼] 누군가 가장 유쾌한 소비란 무엇일거같냐고 묻는다면 난 경험을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건 어쩌면 유추가 가능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알면서도 그 일에 적극적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경험보다 물건을 사는 걸 더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경험을 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 ‘일’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며, 경험할 돈을 벌고 경험할 시간을 잃어버린다. 

당신 수중에 100만원이 있다고 치자. 100만원으로 당신을 오랫동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멋진 코트 한 벌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일 것이다. 그게 더 경제적인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당신의 기억에 남아서 평생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할지 모른다.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재밌는 사람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또 ‘독특한’ 자기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미남미녀만큼이나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한 사람을 예로 들자면 우리 아빠가 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사진작가로, 직업 특성상 해외를 많이 다니신다. 열 살 때였나, 아빠가 캐나다 퀘벡과 토론토에 한 달 정도 다녀오신 적이 있었다. 당시 이메일도 없을 때라 아빠랑 펜팔을 주고받았었다. 바다만큼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흰 눈으로 뒤덮인 산이 만나고 있는 멋진 엽서였다. 아빠는 생각보다 일정이 더 길어져서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날 너무 사랑한다고 썼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아빠랑 대화를 하다가 무심코 퀘벡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가 당시 있었던 일화를 말씀해주셨다. ‘퀘벡’하면 떠오르는, 잊지 못할 집시 여인.
아빠가 어느 카페에서 낮에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한 여성 한분이 눈에 들어온 거다. 아빠는 그녀가 좋은 피사체라고 생각했고, 가서 말을 건거다. 난 한국에서 온 사진작가인데, 차를 한 잔 살 테니 당신을 찍어도 되겠냐고. 당신은 굉장히 멋진 것 같다고. (아, 참고로 우리 아빤 싱글이다.) 그러자 그 여자 분이 우리 아빠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좋다 대신 내가 원하는 포즈로, 좀 멀리서 찍어달라고 한 거다. 아빠는 오히려 그녀가 능동적으로 나오자,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아빤 그녀의 뜻대로 두 발 뒤로 물러서서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자 분이 자신의 상의를 위로 걷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 여자 분은 가슴에 피어싱을 한 상태였다. 아빠는 렌즈를 통해 비친 그녀의 돌발 행동에 아찔함을 느꼈고, 여자 분은 그런 아빠를 살짝 귀엽게 비웃었다. 아빠는 얼른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는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둘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필름을 현상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테니까. 
그래서 아빠의 퀘벡 일정이 길어졌던 거다. 집시 여인에게 말했겠지. 당신을 사랑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딸이 한국에 있다고. 그래서 너에게 줄 사랑 전부를, 이 짧은 시간동안 후회 없이 쏟아 붓겠노라고. 물론 아빠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빠?’ 
아빠의 말줄임표가, 먼 허공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에게 그렇게 말한 거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인기 많은 남자가 우리 아빠다. 예전엔 아빠가 원래 말을 잘하게 타고난 줄 알았는데, 가끔 아빠는 말을 더듬기도 한다. 심지어 말이 많은 스타일도 아니다. 근데 왜 재밌지, 생각하니까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사람들이 자꾸 얘기해 달래서 하다보니 말을 잘하게 된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야기해달라고 할까? 그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영화나 책을 사서 보는 것도 경험을 위해서다. 반대로 여행을 정말 많이 다니고, 경험을 많이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있으나 진짜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체험에서 체體는 ‘몸 체’이다. 경험에서 경經은 ‘지날 경, 글 경’을 쓴다. 내가 실제로 하는 것은 체험, 또는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험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사전에 보면 이렇게 풀이가 되어있다. ‘자신이 실제로 해보거나 겪어 봄, 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이나 기능.’! 철학적으로는 이렇게 풀이된다.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 즉, 우리가 몸으로 겪건 겪지 않건, 내가 거기서 무언가 깨닫거나 얻은 지식이 있으면 그게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을 얻다’라는 표현을 쓴다. 체험을 얻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하는 것이다. 심지어 철학적 풀이로 보자면, 그냥 자기가 몸소 행동을 했는데도 얻은 게 없으면 경험한 게 아니다

(영화 <그레이트 뷰티> 중에서)

우리는 인생을 살 때 체험이 아닌 경험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유쾌한 소비다. 나는 한 번도 패키지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무슨 수학여행처럼 빨리빨리 우르르 다니면서 보는 것은 경험이 아닌 체험이라 생각한다. 수학(修學)여행은 말 그대로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국사, 석굴암을 군말 없이 따라다닌 거다. 예전에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30대 이상 독자들만 알 것이다…….) 얼마 전 무한도전에서 방영한 <극한알바>특집과 비슷한 포맷이라고 보면 된다. 그 프로그램은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이름이 잘못됐다. 겨우 체험이라니, 과소평가다. 거기에는 굉장한 경험들이 있었다. 물론 시청자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며 함께 ‘경험을 얻었다’.

‘생존’과 ‘삶을 사는 것’이 다른 것처럼, ‘체험’과 ‘경험’은 다르다. 심지어 사이버 세계에서도 경험치가 쌓여야 레벨 업을 할 수 있다. 체험치는 중요치 않다. 경험치야 말로 생존해있는 건지, 삶을 사는 지를 구분 짓게 해준다. 우리는 삶을 살고자하기에 많은 경험들을 원한다. 생득적으로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선악과도 따먹은 거다. 호기심이 인류의 시작이 아닌가. 우리는 내가 하지 못할 일들을 간접적으로 느끼고자 한다. 말도 안 되게 엽기적인 포르노를 보는 것도 성욕이 아닌 이러한 호기심 때문이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기깔나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남자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며 판타지를 푼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포르노다. 우리는 거기서 경험을 얻으며 유쾌함을 느낀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 소설 모두가 가상의 현실이며, 거기서 얻은 경험들은 가짜일수도 있다. 막말로 거의 대부분의 감독과 작가, 배우들이 살인을 안 해봤을 텐데, 영화에서는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인다. 나도 예전에 소설을 쓰며 한 명은 자살을 시키고, 한 명은 불태워 죽였었다. 
대단한 감독과 작가, 배우들은 훨씬 더 디테일하게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에 우리를 믿게 만들고, 우리가 ‘경험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의 세계관, 철학 그 자체가 경험인 것이다.  
그 세계가 ‘가상’일지라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우리가 아는 척 하는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은 다 거짓일 수도 있다. 누군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통한 경험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거기서 무얼 얻을지는 내가 정하는 거다. 지구가 가만있다고 믿었던 시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가상과 실제 세계를 구분 짓는 것은 실존여부가 아닌 어쩌면, 내가 경험을 하느냐 /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사랑 역시 체험이 아닌 경험으로 해야 더 좋다. 체험적 사랑과 경험적 사랑을 논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지만, 여기까지 충분히 따라와 준 독자들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나 역시 매주 두 편 이상의 칼럼을 작업하기 위하여 많은 경험을 하고자 노력한다. 무작정 많이 읽고 본다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충분히 느끼고, 영화 하나를 보더라도 충분히 젖어들고자 한다. 그럴 때 드는 생각? ‘오! 난 살아있어!’

오늘도 열심히 일을 했을 당신에게 ‘삶’을 선물하는 일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유쾌한 소비에 돈을 아끼지 마시길. 평생에 갚진 이야기를 든든히 마음 속 든든히 품으시길 바란다. 

*사전참조 :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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