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사람들에게, ‘혹시 영미권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군지 아세요?’라고 물으면 1차적으로 당황할 것이며(...) 대부분이 T.S.앨리엇이라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의 추측일 뿐이다. T.S.앨리엇은 훌륭한 시인이다. 뮤지컬 <캣츠>의 대표 넘버인 ‘MEMORY’가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영미권의 가장 위대한 시인은, 단연 이름부터 위-대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시다.

사진1= <Death Mask of William Shakespeare>, London Stereoscopic Company, 1865 / 휴스턴 미술관 홈페이지

그는 잘 알려진 희곡 작가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 수많은 비극과 희극을 넘나드는 수많은 훌륭한 희곡을 남긴 위인. 심지어 그는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다작하였다. 그의 유명세만큼이나 여러 의혹이 많은데, 심지어 그가 ‘여러 명’이었다는 썰도 존재하더라. (기록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태어난 생일과 사망 날짜가 4월 23일로 똑같다!)

사실 그는 수많은 시를 남겼다. 정확히는 ‘소네트’라 불리는 형식이다. 그는 ‘영어’에 수많은 어휘가 생성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시는 비유이다. 그는 이미 있는 무언가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했다. 마치 우리 구전에서 ‘동아줄’이 마치 구조의 의미를 가지듯, 그는 거기에 또 다른 캐릭터를 불어넣은 것이다.

그의 희곡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기에, 오랜 기간 역사는 그를 계속 추앙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희곡을 통하여 무대에서 비유된 우리 인생을 엿볼 기회를 가진다. 왕실, 혹은 요정이 나오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나 기회를 얻은 이들을 바라보며 공감을 한다. 그 세계 속에 자신을 투영하며, 엇비슷했던 자기 인생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희곡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만 자기 인생을 들여다보아야할까?

사진 2 = 영화 <햄릿 (Hamlet, 1948)> 중에서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취업 빙하기’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빙하기라는 단어가, ‘취업’이라는 곳에 스카웃된 것이다. 아니다, 취업이라는 단어가, ‘빙하기’에 스카웃된 것인가? 어쨌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우리가 그런 생소한 단어를 체감하고는 그 뜻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취업 빙하기를 맞은 이들은,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로 치자면 비극적인 순간일지 모른다. 취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생계유지는 매우 기본적이고 중대한 일이다. 게다가 취업이 주는 심리적인 영향은 솔직히, 부정적일 때가 훨씬 많다. 

나는 예전에 연기를 전공했었고 배우를 꿈꾸었었다. 수 천대 일의 오디션? 당연히 떨어질 걸 예상하지만 작은 희망으로 최선을 다했었다. 그러나 ‘거부당함’이 주는 정서는- 나의 ‘생산성’이 외면당함은 불쾌한 경험이며, 쌓이고 쌓여 내 자존감 위에서 보기좋게 비소짓더라. ....취준생들의 심정을 감히, 조금 공감한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내 기억에 대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물론 현재 나의 상황이 변화하여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마치 나쁜 애인이 돌아와 건네는 키스에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리듯- 마침내 인생이 내게 준 작은 행복들 때문에 예전의 억하심정 같은 걸 잊어버린 걸 수도 있다. 

사진 3 = 영화<오셀로 (The Tragedy Of Othello - The Moor Of Venice , 1952)> 중에서

20대 초반에 난 소설 한권을 썼었다. 그 소설을 지금 보면, 내가 쓴 게 안 믿길 정도로 우울하다. 난 그 즈음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 스스로 정신과에 찾아가 우울증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지금 그 때를 떠올리며, 다시금 해석하고 비유한다. 그렇다.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일지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비극의 순간을 잘 견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사랑을 받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스스로의 신념을 잘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나처럼 스스로 병원에 찾아가볼 수도 있다.

비극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는다. 당시에 난 ‘잃을 것이 없으니 오히려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틀렸다! 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또 미래의 나에게 인정받을  ‘나’를 잃어버릴 기회도 많았었다. 그러나 다행히 스스로를 지켜냈다. 

우리가 당시 잃어버린 것들-친구나 가족, 돈, 시간, 건강... 등- 정말 잃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런 지혜를, 비유를, 또는 왜곡의 기교를– 셰익스피어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사진4 = 영화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 2004)> 중에서

정말 쿨-하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마치 우리의 삶을 무대 위에 올려두고 비유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저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해보자. 내가 느끼는 사랑이, 내가 느끼는 분노와 흥분이, 한없는 나른함- 모두 어느 신경물질들의 부지런함 때문이라 여기고는, 그들의 생명력에 감사해보자.

셰익스피어가 만든 인물들은, 몹시 거대한 말들을 해댄다. 매우 현학적이고 인상 깊어서 ‘거대하다’는 표현밖에 쓸 수가 없다. 그들의 ‘비극적 인생’에서 이런 철학을 찾아내었으니, 과연 그것이 ‘비극’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 감정은 어차피 다, 신경물질의 작용일 텐데.

사진5 =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1968)> 중에서

그러나 이런 무자비한 신경물질의 소용돌이를 잘 당해주는 것, 그것이 인간적인 삶일 것이다. 사랑에 빠질 기회를 얻는다면 그냥 사랑하면 된다. 명상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1분이라는 시간동안 인간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어느 굵직한 사건에서 느낀 감정들을 꾸역꾸역, 다 눌러 담는다? 음, 그러기엔 우리 존재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배고픔과 피곤함, 안락함 같은 것만 느끼는 아기들도 몸뚱이의 절반이나 되는 머리에서 그것을 다 주체하지 못해 온몸으로 감정을 표출해낸다. 우리는 아기 때보다 몸만 많이 커졌지, 머리 크긴 비슷하다. 그러니 우리 속에, 지금도 참은 감정이 얼마나 많겠어?

명대사를 토해내야 한다, 얼른 이 비극을 어떻게든 끝내고- 그것을 직시해서 바라보자구. 그래야 찰리 채플린처럼 나중에 희극-이라 느낄 수 있다. 아니- 비극에 비극을 더하는 삶을 살더라도, 그 때의 비극이 나에게 가르치려던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해야 한다. 

 ....사실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런 피곤함을 무릎 쓴다는 것이 여전히 내 삶이 비극적이란 증거일 것이다. 요즘 난 행복한가? 아니, 실은 다른 쪽으로 만만치 않게 비극적이다. 나를 지키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는 중이다. 

‘예전의 나’를 돌이켜 희극적 풍미를 풍기듯, ‘지금의 나’의 모습이 미래에 그랬으면 해서. 그 때의 날 괴롭히던 이들을, 지금의 내가 미워하지 않듯이- 지금 이 비극에 등장하는 사람도, 미래의 나에게까지 사랑스러운 사람이길 바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소개하며,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을 깜빡할 뻔 했다! 야심한 시각이 되어야 글을 쓰는 나는, 독자 여러분과 이 시를 나누고 싶다. 마흔 세 번째, 소네트다. 

사진6 =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1968)> 중에서

Sonnet XLIII
When most I wink, then do mine eyes best see,
For all the day they view things unrespected;
온종일 쓸데없는 것들과 마주했던 내 눈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가장 잘 보이기 시작하네

But when I sleep, in dreams they look on thee,
And darkly bright, are bright in dark directed.
잠이 들면 비로소 꿈속에서, 당신을 바로 보네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니 바로 보네

Then thou, whose shadow shadows doth make bright,
How would thy shadow's form form happy show
To the clear day with thy much clearer light,
When to unseeing eyes thy shade shines so! 
꿈 속의 그림자 만으로도 환하던 당신-
아마도 맑은 날엔 더 더욱 빛나겠네!
감은 두 눈 속에도 그리 환했었거늘

How would, I say, mine eyes be blessed made
By looking on thee in the living day,
아마도 영광일 테지!
대 낮에 너를 직접 보게 된다면-

When in dead night thy fair imperfect shade
Through heavy sleep on sightless eyes doth stay!
죽어 어둔 밤, 감은 눈 속에서도 빛나는 너인데

All days are nights to see till I see thee,
   And nights bright days when dreams do show thee me.
모든 낮은 밤이다, 내가 널 보기 전까지,
모든 밤은 낮이다, 꿈이 당신을 보게 한다면.

-William Shakespeare(1564.04.23.-161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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