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최근 방송에서 운동선수 출신 출연자들이 자주 보인다. 이들은 모두 각자 종목에서 최정상을 경험하고 전설이라 불릴만한 전성기를 보냈다.

방송 출연과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로 인해 그들의 예전 실력을 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에 어땠는지가 뭐가 중요한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방송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감춰 두기엔 그들의 전성기가 매우 아깝다.

이번 편을 통해 방송에 출연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전성기 시절에 어떤 활약을 했고 모습은 어땠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야생 버라이어티를 좋아하는 아는 천하장사 ‘강호동’

방송에 출연하는 스포츠 스타를 생각하면 바로 강호동이 떠오를 것이다. 강호동은 씨름선수 시절 실력도 대단했지만 방송에 데뷔한 이후 꾸준히 정상급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씨름선수 시절 강호동

대한민국 최고 씨름선수였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강호동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체격을 자랑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8년 프로 씨름계에 처음 발을 들인 강호동은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라는 역대급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강호동 주요 수상경력

∙제17회 회장기쟁탈전국장사씨름대회 장사급 준우승 (1987)

∙제44회 전국 체급별장사씨름대회 백두장사 (1989)

∙제47회 전국장사씨름대회 백두장사 (1990)

∙제18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천하장사 (1990)

∙제20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천하장사 (1990)

∙제54회 전국장사씨름대회 백두장사 (1991)

∙제2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천하장사 (1991)

∙제24회 천하장사씨름대회 천하장사 (1992)

강호동은 ‘모래판의 황제’라고 불렸던 이만기를 꺾으며 최고의 씨름선수로 등극한다. 씨름 팬들 사이에서 강호동과 이만기는 늘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둘은 경기마다 엄청난 신경전을 벌였다. 샅바를 먼저 잡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고,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이만기 "깝치지마라 XX야" 사건) 하지만 승자는 강호동이었다.

강호동과 이만기는 여섯 번 대결했고 강호동이 네 번을 이겼다.

강호동과 이만기(왼쪽부터) / KBS 1박 2일 캡쳐

씨름계 정상에 등극한 강호동은 1992년 은퇴한 뒤 개그맨 이경규의 제의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그는 당초 씨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제의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이경규가 "네가 스타덤에 오르지 못한다면 나도 은퇴한다"라며 자신있게 약속하자 이에 승낙한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 MBC 특채 개그맨으로 시작한 강호동은 ‘코미디 동서남북’에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철없는 연기와 유행어 '행님아~'로 큰 인기를 끌었다.

2002년 유재석, 이휘재와 함께 출연한 KBS 2TV에서 MC대격돌 공포의 쿵쿵따 코너와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으로 국민 MC에 등극했다.

이후 SBS 토크쇼 ‘야심만만’,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 KBS ‘1박2일’,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강심장’에 출연한 후 공백기를 거쳐 JTBC ‘아는형님’, ‘한끼줍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강호동 / MBC 황금어장 캡쳐

강호동과 여섯 번 대결했던 이만기 또한 굉장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강호동의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이만기는 1980년대 백두장사 18회, 천하장사 10회, 한라장사 7회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씨름 통산승률은 86.5%에 달한다. 역대 씨름 선수 중 승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실 기록 등으로 보면 강호동보다 더 대단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상대전적은 강호동이 앞서 있다.

이만기도 SBS ‘자기야 백년손님’에 출연하며 방송에 발을 들였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이유로 방송과 교수직 등에서 은퇴했다. 새누리당 경남 김해을 지역후보로 출마한 이만기는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에 밀려 낙선했다.

테리우스에서 아재입담으로 ‘안정환’

축구계의 테리우스, 반지키스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으며, 외모와 실력을 모두 겸비한 축구선수가 있다. 바로 안정환이다.

안정환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조각 같은 외모로 많은 광고에 출연했다. 모 화장품 광고에서는 최근 대세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현빈을 조연으로 만들기도 했다.

테리우스라 불렸던 축구선수 시절 안정환

그를 모르는 이들은 외모만 출중했던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환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격 자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8년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해 프로선수가 된 안정환은 1999년 14골을 넣으며 K리그 MVP를 받는다. 이때 부산 대우 로얄즈는 리그 준우승을 기록한다. 안정환은 K리그 사상 최초로 준우승 팀에서 나온 MVP다.

안정환은 2000년 7월 AC 페루자로 이적하면서 세리에 A에 진출한 첫 한국인 선수가 된다. 당시 한국 축구선수가 해외로 이적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열광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 한국 대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은 연장 후반에 골든골을 넣어 이탈리아를 탈락시킨다.(당시에는 골든골 제도가 존재했다.)

안정환은 이 때문에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은 이탈리에서 공공의적이 됐고, 그의 소속팀이었던 페루자는 그를 방출하기로 결정하지만 분쟁 등을 겪은 후 일본 J리그 시미즈 에스펄스로 이적한다.

안정환은 특히 A매치(정식 국가 대표팀간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안정환은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비롯한 수많은 A매치 경기에 출전해 많은 골을 넣었다.

골을 넣고 반지 세레머니 하는 안정환

그는 주로 중요한 경기나 시점에 골을 넣어 승부사로 불리기도 했다. 대표팀 감독들도 그를 주로 선발 출전시키기 보다는 교체투입 해 활용했다.

◎안정환 주요 경력

∙청소년대표 (1994)

∙동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유니버시아드 축구 국가대표 (1997)

∙이탈리아 AC 페루자 (2000.07~2002.08)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2002)

∙프랑스 FC 메츠 (2005~2006)

∙독일 MSV 뒤스부르크 (2006)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2006)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 (2010)

◎안정환 주요 수상 경력

-한국

∙K리그 준우승 (1999)

∙리그컵 우승 (1998), 준우승 (1999)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2003)

-일본

∙J리그 디비전 1 우승 (2004)

∙제록스 슈퍼컵 우승 (2004, 2005)

∙A3 챔피언스컵 준우승 (2004)

-개인

∙K리그 MVP (1999), 베스트 11 (1998, 1999)

∙올해의 키카골상 (1999)

∙체육훈장 맹호장 (2002)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K리그 대상 공로상 (2012)

안정환은 2013년 은퇴 후 SBS ‘정글의 법칙’을 시작으로 MBC 예능프로그램 ‘아빠! 어디가?’를 거쳐 2014년 브라질 월드컵 MBC 해설위원을 맡아, 기존 딱딱했던 축구해설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해설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KBS ‘청춘FC’, ‘인간의 조건’,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뭉쳐야 뜬다’ XTM ‘탑기어 코리아 7’ 등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MBC 라디오스타 캡쳐

안정환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박지성이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 공격수 솔샤르를 미드필더를 의미하는 패스마스터라고 표현해, 축알못(축구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안정환의 이 같은 발언은 솔샤르를 영국 미드필터 스콜스와 혼동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서장훈’

최근 예능계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남자가 있다. 바로 국보급 센터 출신 서장훈이다. 그는 프로 농구선수 출신으로 현역시절 나라의 보물을 뜻하는 ‘국보’라는 단어가 늘 그를 따라 다닐정도로 굉장한 실력을 보였다.

서장훈은 1998년 청주 SK 나이츠에 입단 하며 프로 농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선수시절 큰 신장으로 골밑을 장악했다.

서장훈은 전주 KCC 이지스 선수 시절인 2008년 11월 19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주 창원 LG 세이커스와 경기에서 대한민국 농구 선수 최초로 개인 통산 1만득점을 달성한다.

기록을 달성하는 순간 서장훈의 소속 팀인 전주 KCC 이지스 선수들은 물론 상대팀인 창원 LG 세이커스의 선수들 모두가 기록 달성을 축하했다. 이는 대기록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이날 서장훈의 상대팀 선수이자 휘문고등학교 후배인 현주엽은 서장훈의 대기록을 도와주기 위해 수비를 하지 않고 2점을 내줬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서장훈과 현주엽(왼쪽부터) / 사진출처=KBL

서장훈의 이 같은 기록은 센터라는 포지션에도 불구하고 3점슛, 레이업슛 등을 가리지 않고 시도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3점슛을 쏘는 센터로 유명했다. 또 성공률도 매우 높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서장훈은 2013년 농구계에서 은퇴한다.

은퇴한 다음 간간이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하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서장훈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방송시작 설을 일축하기도 했지만, 결국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서장훈 주요 수상 경력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신인상, 수비5걸상 (1994)

∙농구대잔치 리바운드상, 수비공헌상 (1995)

∙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1997)

∙KBL 리바운드상 (1999)

∙KBL 챔피언 결정전 MVP (2000)

∙KBL MVP, 올스타전 MVP, 베스트 5 (2006)

∙KBL 베스트 5, 한국농구대상 리바운드상, 한국농구대상 베스트 5 (2008)

∙한국농구대상 득점상, 특별상 (2009)

∙KBL 특별상 (2013)

서장훈 / JTBC 아는형님 캡쳐

서장훈은 현재 JTBC ‘아는형님’, SBS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하며 맹활약하고 있다. 그의 유행어로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가 있다.

전설중의 전설, ‘최초’하면 ‘심권호’

요즘 레슬링 선수를 생각하면 얼마전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김현우 선수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전설중의 전설이라 불릴만한 레슬링 선수가 있다. 바로 심권호다.

‘심권호는 요즘 방송을 하지 않는데?’라며 의문을 갖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 방송에 보여 졌던 모습과는 다른 굉장한 실력과 경력을 갖고 있기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심권호는 1985년 경기도 성남문원중학교 2학년 때 레슬링을 시작했다. 1년 만인 중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소년체전에서 레슬링 부문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한국에 첫 레슬링 금메달을 선사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대한민국 하계 올림픽 사상 남자선수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또 그레코로만형 48kg급과 54kg급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록도 대한민국 올림픽 사상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한 것으로 남게 됐다.

심권호 / 사진출처=연합뉴스

최초 기록은 이 뿐만이 아니다. 심권호는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 게임,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모두 제패했다. 아울러 체급을 옮겨 그랜드 슬램을 두 번이나 달성했다. 심권호는 2001년 최고등급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받았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과 달리 KBS ‘출발 드림팀’, 채널A ‘불멸의 국가대표’ 등에 출연해 다소 가벼운 캐릭터로 보여지기도 했다. 그 동안 심권호의 실력을 모르고 방송 이미지만 접했던 이들은 적잖이 놀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쇠팔 ‘최동원’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되는 고(故) 최동원. 선동열과의 라이벌 관계를 그린 영화 ‘퍼팩트 게임’이 제작돼 상영될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최동원은 은퇴 후 활발히 방송과 야구 해설을 하며 시청자들에게 인사하기도 했다. 일부 시청자는 그가 야구선수가 아닌 방송인인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최동원은 롯데자이언츠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인 1981년 롯데자이언츠를 실업리그 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인왕, 다승왕, MVP를 수상했다.

그는 KBO 리그 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린 투수이기도 하다. 또 역대 단일 한국시리즈 8개부분에서 1위를 기록 중이다. (최다 이닝, 최다 승리, 최다 선발등판, 최다 선발승리, 최다 완투, 최다 완투승, 최다 완봉승, 최다 탈삼진)

최동원은 최고구속 155km/h의 강속구와 강한 어깨로 '무쇠팔 최동원' 으로 불렸다.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2011년 9월 14일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 일기로 별세했다.

고(故) 최동원 선수 / 사진출처=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지금까지 운동과 방송,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스포츠 스타 편이었다. 이들은 모두 스포츠 스타 출신으로 방송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방송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역 선수 시절 화려한 경력으로 대접 받으려 하기 보다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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