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전날인 4일 국민의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안철수 전 대표가 확정됐다. 이에 따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바른정당,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가 모두 선출됐다. 5당 대선후보가 공식 선출 되면서 후보 단일화·연대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각 기관 여론조사에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단일화·연대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된 상태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단일화·연대의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연대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유승민 후보 또한 현재까지는 안 후보와 같은 입장이다.

홍준표 후보는 연일 범보수 연대, 우파·보수 결집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사진출처=연합뉴스

이처럼 일부 후보들은 단일화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 경쟁이 보다 본격화 되고 대선일이 가까워진다면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번 단일화 편을 통해 그동안 단일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 왔는지를 확인하고 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태준 전 국무총리, 노무현 전 대통령, 정몽준 전 국회의원은 대선 단일화를 선택했다. 이번 편은 이들의 얘기다.

◈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6·29 민주화 선언  

대선후보 단일화는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이뤄졌다. 6·29 민주화 선언은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이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와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이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화 요구는 더욱 강해지게 된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이어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최대 인원인 100여만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때 군 투입을 검토했으나 결국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에 따라 6·29선언이 발표됐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 5공화국을 사실상 연장시킨 '단일화' 결렬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변경됨에 따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13대 대선에서 출마하고 단일화를 시도한다. 당시 두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으로 같은 당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왼쪽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후보 단일화 회담을 하지만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한다.

1차 협상이 걸렬된 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시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시각차만 확인하고 또 결렬된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먼저 발표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결국 둘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따로 출마한다.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36.6%라는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 다시 출마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4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 DJP 연합으로 헌정 사상 첫 진보 정부 수립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잠시 정계에서 은퇴하지만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15대 대선에 다시 출마하게 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대는 신한국당 이회창 전 국무총리였다.

당시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50%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대세로 평가받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단일화를 시도한다.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는 보수 정당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태준 전 국무총리와 단일화에 성공, 이른바 ‘DJP 연합’을 결성한다.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정치색이 다른 두 정당이 연합에 성공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파격적인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 국무총리와 박태준 전 국무총리에 세 가지를 제시한다.

DJP 연합.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대중 전 대통령, 박태준 전 국무총리 (왼쪽부터)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 연합으로 인해 색깔론 시비를 차단할 수 있었다. 또 호남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충청과 대구, 경북에서 기대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신한국당도 이에 대항해 11월 21일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개명한다. 이후 조순 전 국회의원과 단일화를 이루지만 DJP연합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40.3%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사진출처=MBC

◈ 불리한 단일화? 반전 결과를 낳은 16대 대선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통합21 정몽준 전 국회의원과 16대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루기도 했다.

16대 대선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강세를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당초 두 후보 단일화는 정몽준 전 국무총리를 대표로하는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측 요구에서 비롯됐다.

둘의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존재했다. ▲국민 경선, ▲여론 조사, ▲협상 담판.

협상 담판은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제안했고, 국민 경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다. 방식은 국민참여 50%, 당원 참여 50%였다.

그러나 정몽준 전 국회의원의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제안을 반대했다. 이유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전 국회의원 (왼쪽부터)

결국에는 두 방안 모두 실패하고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가 채택된다. 당시 여론 조사 설문내용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다소 불리했다는 평가가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일화 후보로 선출된다.

단일화 후 반전 사건이 발생한다.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단일화를 파기한 것이다.

정몽준 전 국회의원은 지지 철회 발표문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이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는 국민통합21의 당론과 맞지 않는다며 파기 이유를 설명한다.

이를 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전 국회의원의 자택을 방문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힘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48.9%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정몽준 전 국회의원의 단일화 파기로 보수진영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당선될 수 있다는 점에 위기감을 느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주는 현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 사진출처=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19대 대선은 5월 9일로 예정됐다. 약 한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다소 아쉽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아울러 이런 상황 때문에 단일화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이번 대선에서 일부 후보들의 단일화가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의사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결정은 반드시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그 결정이 단일화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선택을 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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