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이병철과 정주영, 정주영과 이병철 대한민국 근현대 경제·산업 역사에서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반이 이상이 사라질 것이다. 그만큼 이들이 갖는 영향력은 크다.

이병철 전 회장과 정주영 전 회장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그룹을 키운 주력 사업도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삼성과 현대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번 편을 통해 이병철, 정주영 전 회장이 각각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공통점이 존재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 쌀로 시작한 첫 사업, 중일전쟁으로 실패

이병철, 정주영 전 회장은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이병철 전 회장은 부유한 양반 가문의 2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정주영 전 회장은 가난한 농부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정미소를 시작으로 사업에 발을 들이다

이병철 전 회장은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병철 전 부회장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경상남도 의령, 진주 지역에 거주하며 중앙관직에 진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또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이병철 전 회장 (왼쪽) / 사진출처=호암재단

그는 조부가 세운 서당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운 뒤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이 전 회장은 외가가 있는 경성(서울)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간다.

이병철 전 회장의 조부는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천석의 농토를 이어 받아 대지주라는 호칭을 이어갔다.

이 전 회장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중동중학교에 진학한다. 이 곳에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학업에 열중하던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 전 회장의 집에서는 유학 반대가 심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다.

이 전 회장은 유학생활 중 일본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 현지 공업의 실상을 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은 이 때 기업인의 꿈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회장은 일본 생활을 하며 집에서 매달 200원의 생활비를 받았다. 당시 일본 중산층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풍족하게 유학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년 시절 이병철 전 회장(오른쪽) / 사진출처=호암재단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전 회장은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며 모두 노비의 몸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는 대학 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겼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회장은 대학 시절 학업에 열중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귀국하게 된다. 훗날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됐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회고 했다.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던 이 전 회장은 친구들과 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 떄 이 전 회장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고 하기도 했다.

삼성상회 / 사진출처=호암재단

이 전 회장은 이후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 결심을 마친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내준다.

사업 품목으로 쌀을 생각한 이 전 회장은 마산이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고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바로 그는 친구 2명과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린다. 하지만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여파로 정미소와 자산을 모두 잃게 된다.

◎ 가난을 벗아나기 위해 수없이 가출해 쌀가게 '복흥상회'를 인수하다

정 전 회장은 이 전 회장과 매우 다른 유년시절을 보냈다. 정 전 회장은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재 북한)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송전소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정 전 회장은 늘 농부인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몇 번 실패를 겪은 정 전 회장은 결국 가출에 성공한다.

그는 가출 후 항구, 공사현장, 철도 공사판, 쌀가게 배달원 등으로 다양한 일을 경험한다. 정 전 회장은 이중 쌀가게 배달원을 가장 흡족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입이 제일 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 전 회장과 복흥상회 주인

정 전 회장은 장부를 잘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다. 주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와 노름에 빠져 가산을 다소 탕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쌀가게 주인은 정 전 회장에게 쌀가게를 물려준다.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은 정 전 회장은 복흥상회로 쌀가게 이름을 변경한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에 중일전쟁 후폭풍으로 쌀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되면서 결국 가게를 정리한다.

이 전 회장과 정 전 회장 모두 첫 사업을 쌀 사업으로 시작했다. 아울러 중일전쟁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런 사실을 보면 당시 중일전쟁 여파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 해외시장 개척 통한 그룹 발전 발판 마련

유통·무역업은 삼성, 자동차 공업은 현대의 시초다. 이 전 회장과 정 전 회장이 두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삼성과 현대가 존재했을까?

삼성물산 주식회사 / 사진출처=호암재단

◎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춰 막대한 부를 창출

이 전 회장의 정미소는 실패했지만 다시 자본금을 만들어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통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번창한 삼성상회는 주식회사로 개편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한다.

사업이 거듭 번창해 조선양조까지 인수한다. 이후 경성을 상경한 이 전 회장은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무역업까지 사업을 확장한다.

이 전 회장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한다. 제조업에서 성공을 거둔 이 전 회장은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양조 / 사진출처=호암재단

이 전 회장이 사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삼백(밀가루, 설탕, 면직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일본 유학경력이 있는 이 전 회장은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으로 선정된다.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그는 제조업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했다. 성균관대학교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1964년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했고,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해 방송에도 진출했다. 1965년에는 중앙일보를 설립한다.

이 전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해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든다. 1972년,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춰 제일합섬을 설립한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해 중화학 공업에 진출한다.

삼성 사장단 회의 / 사진출처=호암재단

그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춰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한다. 이후 삼성정밀과 현재 에버랜드인 용인자연농원등을 설립한다.

1977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해 삼성전자로 통합한다. 1984년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꾼다. 삼성전자는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됐다.

◎ 해외건설 사업 성공으로 승승장구 

정 전 회장은 이 전 회장과 다르게 직공으로 일 하다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했다. 이후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한다.

정주영 전 회장 가족사진 / 사진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정 전 회장이 빚을 내 인수한 아도 서비스는 불이나 폐업하게 된다. 그는 다시 빚을 내 신설동 빈터에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공장도 일제강점기인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일본에 빼앗긴다.

이후 정 전 회장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또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해 건설업에도 진출한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정주영 전 회장과 직원들 / 사진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현대건설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1964년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해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 생산한다.

1965년에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한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해 1970년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해외 건설 사업을 수주해 시장을 세계무대로 확장한다. 또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정 전 회장은 1971년,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다. 1973년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한다.

이 전 회장과 정 전 회장은 모두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비록 다른 분야로 진출했지만, 그를 통해 그룹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현대 1호차 포니 / 사진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 아들 구속 경험

이 전 회장과 정 전 회장이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이 전 회장, 정 전 회장 모두 아들들이 구속된 경험이 있다.

이 전 회장은 1966년에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경남 울산시에 위치한 한국비료 공장에서 사카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적발된다. 이 사건으로 이 전 회장의 차남이자 당시 한국비료 상무인 이창희 씨가 서울교도소에 수담된다.

정 전 회장은 1977년 건축법 위반으로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 씨가 구속된다.

정주영 전 회장 / 사진출처=아산사회복지재단

◈ 이병철 전 회장과 정주영 전 회장의 일화

1971년 정 전 회장은 혼자서 부산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여러 곳에서 부정적인 반응만 받았다.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지만, 그도 역시 거부한다.

그러나 정 전 회장은 우리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했고,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정주영 전 회장이 영국에서 보인 500원 지폐 / 사진출처=안산사회복지재단

이 전 회장은 삼성그룹 임원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신라호텔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연수를 받고온 당시 신라호텔 조리부장은 이 전 회장에게 초밥을 제공 했다.

초밥을 음미하던 이 전 회장은 조리부장에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웠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리부장은 많이 배워서 더 배울 것도 없다고 답했다.

이에 이 전 회장은 초밥의 밥알이 몇 개 인지 물었고 조리부장은 당황하며 밥알을 세기 시작했다. 밥알을 모두 풀어헤친 뒤 한 톨 한 톨 세어나간 조리부장은 총 320개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 전 회장은 낮에 먹는 초밥은 주로 식사로 먹기 때문에 320알이 적당하고 저녁에 먹는 초밥은 안주로 먹기 때문에 280알 정도가 좋다고 말한다.

이 전 회장은 조리부장에게 자만하지 않고 늘 배운다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정주영 전 회장과 이병철 전 회장 (왼쪽부터)

성장 환경으로 다르게만 보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번 편을 통해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대한 평가는 늘 긍정과 부정 두 측면으로 나뉜다. 이 전 회장과 정 전 회장을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거듭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은 높게 살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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