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이란 허무주의자들의 보호막이다. / 니체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밀란 쿤데라의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보았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사랑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늘 불안하고 답없던 우리들의 ‘연애’에 대하여 솔직한 공감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 토마시는 굉장한 바람둥이다. 그런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테레사에게만 사랑을 준다. 그녀 곁에 머무른다. 그녀가 어떻게 이런 ‘특별함’을 누릴 수 있었냐고? 그건 토마시가 테레사에게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 이전에도 글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순간, 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서로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쓴 적이 있었다. 다 이 소설의 영향이었다. 토마시는 테레사에 대하여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쓰여 있다.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맡에서 건져 올려 진 아이

다 큰 성인 여자를 두고 아이란다. 그것도 심지어 버려진 아이. 토마시가 느끼기에 테레사에게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낀 거다. 토마시는 테레사에게 엄청난 동정심을 느낀다. 밀란 쿤데라는 동정심에 대하여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읽기만 해도 벌써 무거운 느낌이 가득 밀려오지 않는가. 이처럼 동정심이란 무서운 것이었기에, 토마시는 자신의 일까지 놓아가며,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테레사를 돌보고자 한 것이다.

희대의 바람둥이를 이렇게 묶어둔 것이 동정심이었다니! 그렇다면 이 소설을 읽은, 사랑을 얻고자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여자들은 동정심을 이용해보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정심이 관계를 증폭시키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증폭시키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지 알아두는 게 좀 나을 거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듯, 사랑의 모습도 여러 가지 일 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정심으로 시작해서 그것이 주가 되는 사랑은 파괴적인 모습일 확률이 크다.

니체는 동정심이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해 왔을 뿐만 아니라 도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 인간이 삶을 향유할 권리마저 잃게 한다고 했다. 그건 허무주의자들의 보호막이랬다. 쇼펜하우어 역시 동정심 때문에 인간의 이 부정된다고 말했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우린 순수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마음이 아프니까 나도 아파, 이런 공감, 감정이입의 감정과- ‘동정심’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토마시는 테레사를 아이에 비유했다. 그런 토마시는 테레사라는 성숙한 인격을 무력화 시킨 것이다. 보통 이런 커플들의 경우, ‘아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이 성장한 어른같이 행동할 경우 즉, 내 의견에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싸우기도 한다. 심지어 배신감을 느끼며 변했다고도 말한다! 그게 과연 사랑일까? 이런 경우, 두 사람 모두 성장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 중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역시 유명한 연애소설이자 불륜소설이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석영중 교수는 한 강연에서 톨스토이의 작품과 ‘성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와 그가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성장하지 않는 커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안나는 소설 속에서 자기 파괴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성장하지 않는 사랑은 파괴적이다. 톨스토이에게 ‘성장’은 일생의 큰 화두였다. 우리 인간에게 성장은 본능적인 욕망이다. 톨스토이는 ‘성장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준다’고 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있어야하고, 당연히 무기력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토마시가 테레사를 무력화 시킨 행위는 성장과 거리가 먼 것이다. 대부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가질 때, 그 대상을 무력화 시키는 경우가 많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이란 힘을 가지려는 마음이다.

악은 무엇인가? 악이란 힘의 반대 개념인 무기력을 말한다.

무기력 때문에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은 악이 된다.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가지는 순간, 그를 ‘악’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니체의 관점에서 이건 사랑과 거리가 멀다. 니체는 ‘악의 처단, 즉 약자의 몰락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첫 번째 명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힘든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 아니 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랑하다보면 그런 순간이 엄청나게 많이, 예고 없이 닥쳐올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 아닌가? 그녀 혹은 그가 갑작스레 아플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오랫동안 공들인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이건, 그녀 혹은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감정이입이 돼서 그런 거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이를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갓난아이가 배고파서 운다고, 그 아이의 슬픔에 공감이 가고 감정이입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단지 돌봐주고 싶을 뿐. 남녀 간의 사랑, 성숙한 사랑은 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가 힘들 때, 성숙한 인격체인 그 사람이 견뎌내고 다시 본인의 삶을 향유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고 응원한다.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불구덩이로 화려하게 뛰어드는 불나방의 모습이 매력적이라면 동정심을 활용하여 사랑해도 무방하다. 슬프고 나약하고 촉촉한 눈빛을 연구하면 된다. 니체가 그것이 ‘악’이랬다고 악하게 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니체는 약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예수님도 악이라고 했다. 그냥 니체는 니체만의 철학이 있는 거고, 밀란 쿤데라는 밀란 쿤데라만의, 예수님은 예수님만의 철학이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당신만의 사랑이 있다.

자, 성장하지 않는 사랑의 필살기가 ‘동정심’이라고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려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는 좀 별개로 성장하는 사랑에서의 ‘필살기’에 대해 짧게 논해보고자 한다. 정말 짧게 논할 것이다. 난 이미 성장하는 사랑, 진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썼으니까. (궁금하신 독자 분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원 가꾸기>라는 저의 칼럼을 참조하시길!)

그 필살기를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니체를 소환하겠다.

여자란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이는 잘 이해하는 존재다. 그러나 남자란 원래 아이 같은 법. 남자의 마음속에는 장난치고 싶은 아이가 언제나 숨어 있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남자 속에 숨은 아이를 찾아내라.

바로 이거다! 결국 내가 이전의 글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게 엄청 대단한 거라고 말했던 게 맞은 거다. 응? 주객이 바뀐 거 아니냐고? 아니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하다. 남자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것이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이라고. 그러니 여자들은 아이 같은 내면의 모습으로 있기 원하는 남자가, 그녀 앞에서 그러할 경우, 그녀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남자들은 삶에서 두 가지를 즐기려고 한다고 했다. 하나는 위험이고, 또 하나는 유희랬다. 가장 위험한 유희의 존재? 그게 바로 여자인 것이다.

여자들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가진다. 우리 여자들이 모성애를 가지고 돌보아야 할 대상은 우리의 2세 뿐만이 아니다. 내 옆에 있는 남자 내면의 숨은 아이도 돌보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심지어 2세보다, 그 내면의 아이를 돌볼 세월이 더욱 길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여러 면에서 마냥 기대려고 한다. 뭐 어느 정도 기대도 좋지만, 그의 내면은 돌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의 내면에는 아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내면에는 아이와 함께 슈퍼 히어로도 있을 거다! 당신을 명예롭게 사랑하고 지켜줄 슈퍼 히어로.

오늘날, 사랑에 비해 성장은 큰 이슈가 아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니까,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 콘텐츠를 팔기 위해서는 ‘성장’이라는 이미지는 너무 진부하고 재미없잖아? 나 역시도 이런 궁서체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니체니 톨스토이니 막 찾아보면서도 이글을 다 쓰고 집에 가면, 칼로 찌르고, 약 빨고, 강간하고, 빼앗고, 사기 치는 영화를 볼 것이다. 아니, 그게 훨씬 재밌잖아?

단지 알고는 있자는 거다. 톨스토이가 말했던 성장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사랑’이 가진 여러 모습에 대하여. 또, 우리의 내면은 ‘성장’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순수하고 키 작은 아이가 원하는 맑음에 대하서 말이다.

(참고 문헌 : 어떻게 살 것인가 / 프리드리히 니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안나 카레니나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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