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울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출처:PINTEREST)

[공감신문] 책을 읽는 데엔 계절이 없다며 도서관에 가서 여유롭게 책을 고른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소설 한 권, 편히 읽을 수 있는 에세이 한 권, 한껏 허세 부리며 고른 철학서 한 권, 평소 모자랐던 분야의 비문학도 한 권, 괜히 다섯 권을 채우고 싶어서 들고다니면 꽤 지적여 보일 듯한 고전 문학 한 권을 고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필시 고전을 읽어야지,라며 호기롭게 읽어내려간 책. 하지만 난관에 부딪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살아가면서 책을 읽을 때 이해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아는 것이 많아 이해 못한 책은 없다며, 미안하지만 멍청한 당신네들과 다르다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은 분명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시달리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당혹스러운 책을 만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것 같은 패배감에 휩싸이다가, 분명 나뿐만이 아닐 거라며 안도하다가, 언젠간 이해할 날이 올거라 믿고 책장에 다시 꽂아넣는다.

정말 우리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독서는 알지 못한다. 읽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힘이 드러난다.

독서는 받아들이며 듣는 것이지, 판독하고 분석하는 힘이 아니며,

발전하여 나아가거나 폭로하여 되돌아가는 힘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서는 이해가 아니다. 그저 따라간다. 이 놀라운 무지.

먼저 질문이 있다. 다소 모호하고 살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지루한 대학 수업에서나 들을 법한,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제야 고백한다. 나는 나스스로 이런 질문을 떠올려본 적은 있으나, 진부한 답변만 떠오를 뿐 더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문학이 뭐냐고? 소설, 에세이, 시나리오, 희곡 뭐 그런거 아니겠나? 이것이 우리가 맨 처음 배우는 문학의 정의이다. 우리는 뭔가를 정의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며, 이러한 정의와 분류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은 ‘정의’ 내려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의가 될 수 있음은 인정한다). 문학이라는 말 하나로도 무수한 이론들이 나오고 논쟁을 하는 마당에, ‘작품’은 오죽할까.

(출처:Mjn Safety Sign)

지식을 많이 쌓으면 문학 텍스트의 중심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에 대한 텍스트의 저항은 원래부터 독서 경험에 속한다.

모든 독서 경험은 그때마다 특유한 것이며, 텍스트는 특정한 해석으로 단언될 수 없다는 블랑쇼의 말은 큰 위로가 된다. 여기서 독특한 관점이 나오는데, 바로 ‘텍스트의 저항’이다. 우리가 텍스트의 핵심에 다가가려하면 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고 그 근처를 맴돌 뿐이라는 것. 평론가들의 날카로운 해석들이 정말 그 텍스트의 핵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전혀 다른 시각의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블랑쇼는 ‘이해에 대한 텍스트의 저항은 원래부터 독서 경험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책을 이해하지 못했던 경험들은, 이해하지 못 했으니 독서 경험에 실패한 게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인 독서 경험을 했다는 말이 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진다. 소설이나 시를 그 형식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심리학,

역사학 자료처럼 읽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작품의 형식에 주목한다고 해도 또다시 형식을

어떤 의미로 환원해 버린다. 블랑쇼가 문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텍스트를 항상 해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나 문학이란 우리 세계를 그저 언급하는 것 이상이다.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의미 부여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왜 우리는 텍스트를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미부여를 하고 싶어할까. 문학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말의 의미만이 아니라 정보의 항목으로 축소 할 수 없는 그 짜임새, 즉 리듬과 색채, 스타일이기 때문이라는 블랑쇼. 우리가 시를 감상하는 방식을 떠올려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보성이 짙은 글이 아닌 문학을 읽으면 리듬감, 색채, 스타일, 짜임새가 느껴진다. 어떻게/왜 느껴지느냐고 하면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앞서 나열한 것들은 말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며 체감에 가깝다. 그렇기에 독서는 단순히 읽는 경험을 넘어서 ‘총체적 경험’이 된다.

(출처:iStock)

언어를 부정성으로 이해하면 정보 교환보다 문학이 언어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이유를 알 수 있다.

정보 교환은 부재를 숨기지만, 문학은 우리가 부재를 부재로서 체험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에 쓰인 낱말들에서는 사물의 실재뿐만 아니라 낱말이 지시하는 개념 역시 부정된다.

일상어법에서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관념을 의미할 뿐이지만,

문학에서는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저항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언어이다. 친구에게 “내 가방 좀 줘”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 말속에서 ‘가방’은 내 가방의 실재와 같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가방들과도 같지 않다. ‘가방’이라는 말은 가방(사물)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가방(개념)을 가지고 온다. 개념은 세계 속에 있는 어떤 사물을 지시할 뿐이다.

허나 문학에서는 사물과 개념 모두 부정하여 블랑쇼는 이를 ‘이중 부재’라 칭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가방은 소지품을 담는 용구로 통하지만, 문학 속에서 가방은 소지품을 담는 용구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개념을 갖고 올 수 있다. 읽는 사람만큼의 개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문학속에서 가방이 애인이 되거나 외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처럼. 문학에서의 언어는 개념과 사물을 모두 부정한다. 일상 언어와의 차이점은, 일상 언어는 언어가 사물의 개념을 지시하여 사물의 부재를 감추지만 문학 언어는 그 부재를 경험하게 한다. 블랑쇼는 문학에서의 언어가 세계를 재현하는 언어의 기능에서 놓여나서, 다른 말들과의 내적 연결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우리 눈앞에 출현한 텍스트가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 열어 놓은 어떤 공간은

우리가 “베게트의 소설은 현대 생활의 공허함과 부조리에 대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때 닫혀 버린다.

언어를 일상적인 용법에서 분리시켜서 낯설게 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다른 말들의 내적 연결을 통해서 자기의 세계를 창조한다면,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가려 하면 할수록 멀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완전한 핵심에 들어갈 수 없다면 핵심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작품이 무언가 재현하고 의미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기서 이 가방은 현대 소비사회의 공허함을 의미하지.”라는 식의 해석을 좋아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핵심으로 갈 수 있는 문을 스스로 닫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저마다의 해석들이 영원히 핵심에 다가갈 수 없을지언정,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석하고 파악하려는 자세 대신 있는 그대로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자세로 독서를 한다면,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 열어 놓은 공간으로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라는 말이 나오는 건,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평론가의 해석대신 저마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 그 무엇이건, 실패한 독서란 없다. 우리는 작품을 경험할 뿐이다.

(출처:인터파크 도서)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