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장애를 이겨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헬렌켈러와 베토벤이다. 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선천적,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 된 많은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 공감 포스팅팀은 장애를 가졌으나 오히려 이를 뛰어넘어 자타공인 최고라 불리는 이들을 찾아봤다.  

■ ‘악마의 드리블러’라 불리는 축구선수 <가린샤>

본명은 마누에우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 별명인 가린샤(Garrincha)는 '작은 새'란 뜻이다. 여러 슈퍼스타를 배출한 브라질 축구계에서도 항상 펠레와 함께 맨 처음에 거론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의사들은 그가 절대로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소아마비에, 허기에 굶주리고, 유아 수준의 지능에, 척추는 S자로 휘고, 두 다리는 한쪽으로 휘었고, 절름발이 노새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한 우측 공격수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1955년 처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뽑힌 뒤로 1966년까지 A매치 50경기 12골을 기록했다. rsssf에 따르면 50경기 43승 6무 1패 (승률 86%)였다. 여담으로 이 시기 브라질 국가대항전은 가린샤와 펠레가 동시에 뛴 경기에서 불패였다.

가린샤는 '볼이 발에 붙어다닌다' 싶을 정도의 드리블로 수비진을 농락했다. 장애 때문에 드리블 자세나 리듬이 다른 선수들과 미묘하게 달라서 상대 수비수들이 무척 혼란스러워 했다. 그는 두 다리 길이가 다른 걸 이용해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수비진을 교란시켜 따돌렸다. 특히 짧은 다리를 컴퍼스의 축처럼 사용해 긴 다리쪽 발에 공을 붙인 채 재빠르게 회전하는 턴 동작이 예술이었다. 가린샤는 장애를 극복한 것을 뛰어넘어 장애를 역이용 했다고 볼 수 있다.

■ 콤플렉스를 유니크함으로 승화시킨 모델 <위니 할로우>

위니할로우는 4살 무렵 희귀난치성피부질환의 일종인 백반증을 확진 받았다. 백반증 환자들은 신체의 여러 군데가 멜라닌색소 감소로 인해 하얗게 변해간다. 그녀는 하나둘 백반증 증세가 나타나면서 어릴 때부터 젖소, 얼룩말이라 놀림받게 됐다. 

주변의 갖은 놀림과 괴롭힘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번 자살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2011년 7월부터 “백반증:인생을 바꾸지 않는 피부질환이다”라는 제목으로 유튜브를 통해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백반증을 앓아온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희귀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를 응원하는 팬들이 하나둘 생겼다.

2014년에는 ‘America’s Next Top model’ 21시즌에 출연해서 14위라는 결과를 얻는다. ‘컴백 시리즈’ 경쟁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후보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이후 스페인 브랜드 ‘Desigual’의 뮤즈로 시작해 ‘DIESEL’, ‘SWAROVSKI’ 모델로 발탁되면서 패션계의 그녀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슈퍼모델로선 약점일 수도 있는 백반증을 오히려 기회로 바꾼 결과 위니 할로우는 영국 BBC ‘2016 올해의 여성 100인’ 중 한명으로 뽑혔다.

■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 <루스벨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줄여서 'FDR'이라고 한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민주당의 대표적 리더 중 한명. 독재를 통하지 않고 합법적으로 10년 이상 장기집권한 몇 안되는 인물이자 실질적으로 미국을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인물. 또한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장식한 대통령이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소속이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번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200년 넘는 미국 헌정 사상 3번 이상 대통령을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하다. 원래 미국 헌법에는 명문화된 대통령의 연임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로 중임까지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글로벌 위기 속에서 관례를 깨고 4선에 성공하면서 그의 사후 헌법에 중임 제한이 추가된다.

루즈벨트는 1921년 8월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에 걸리고, 반신불수로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 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겼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 흑인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스티비 원더>

스티비 원더는 알앤비 소울의 신이라 불린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생활을 하다 산소 과다 공급으로 시력을 잃었다(미숙아 망막증).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없었기에 더 발달된 청각을 토대로 음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음감이 장난 아니라서 그의 앨범에 있는 곡은 대부분 그가 작사, 작곡한 곡들이다.

미성 보컬의 대표격이기도 하다. 스티비 원더 이후의 미성 보컬은 원래의 목소리를 살리지 않고 여러 가지 창법을 시도해야 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보컬. 보컬로서 대표적인 장점은 특유의 목소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음역대도, 기교도, 표현력도 모두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스티비 원더 이후의 알앤비 가수는 모두 그의 팬이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흑인 보컬에 있어서는 정점과도 같은 인물.

■ 블랙홀과 이론물리학의 세계 최고 권위자 <스티븐 호킹>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 석좌교수. 1979년부터 30년간 몸 담았던 케임브리지 석좌교수직인 루카스 석좌교수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여전히 케임브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고로 이 루카스 석좌교수 중에는 아이작 뉴턴도 있었다.

그는 1962년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중 떠났던 중동여행 이후 갑작스럽게 루게릭병이 발병했다. 이 때 의사에게 1~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병으로 인해 근육이 점점 마비되어 책 한 장도 넘기기 힘들고, 한 줄의 공식도 종이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시한부 선고로 예정된 죽음의 시간이 임박한 상태가 되었지만 그는 암산으로 수식을 푸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해 결국 박사학위를 따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간의 역사>, <위대한 설계> 등이 있다. 시간의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 이상 팔린 초 베스트셀러다. 그런데 책을 산 사람은 많지만, 다 읽은 사람은 적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레벨이 높은 편. 요즘 나오는 교양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책의 서술방식은 거의 이 책이랑 판박이다.

■ 단거리 육상의 살아있는 전설 <우사인 볼트>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인간탄환. 육상강국 미국의 스프린터들을 모두 닭 쫓던 개로 만들어버린 자메이카의 전무후무한 괴물 스프린터.

볼트는 선천적으로 척추측만증이 있었고 그로 인해 햄스트링 부상을 자주 당했다.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축구국가대표팀 팀 닥터 한스-빌헬름 뮐러-볼파르트의 처방으로 코어(허리, 골반, 엉덩이 근육)를 강화시키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대박이 났다. 볼트 특유의 넓은 보폭 또한 척추측만증으로 인해 골반이 상하로 많이 흔들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 혜성처럼 나타나 100m, 200m, 400m 릴레이 세계 신기록을 싹 다 갈아치우며 금메달을 독식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자신만만하게 출격해서 올림픽 신기록도 갈아치우고 금메달도 싹쓸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볼트는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찝찝하다고, 공기저항을 줄여주는 최신 소재 경기복을 입지 않는다. 또한 경기 전 가장 금기시하는 육식(특히 볼트가 제일 좋아한다는 치킨 너겟)을 하고, 긴장 풀 겸 낮잠 자다 나와도 세계신기록 수립이다.

■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희망의 화가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다.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6살 소아마비, 16살 교통사고, 이후 약 30차례의 수술, 죽음까지 이른 병마, 디에고의 끝없는 여성편력, 세 차례의 유산, 불임 등을 겪었다. 그녀의 삶에 반복된 고통과 절망은 수많은 작품의 오브제가 되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정도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만 리베라보다 인지도가 더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 70년대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재조명 됐다. 물론 칼로가 능동적인 페미니스트라 보기는 어렵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화자 되며 기구한 생애, 독특한 캐릭터와 작품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오늘날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멕시코 예술과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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