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개과천선하는 속물들이 펼치는 통쾌한 오디세이(Odyssey), 숨어사는 현자·의인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큰 바위 얼굴들의 장엄한 드라마.

저명한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 고승철의 최근작 장편소설 《여신女神》은 우리가 사는 헬 조선의 오늘과 내일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그린다. 작품은 한국판 소설 《사기열전》으로 <유협열전>, <자객열전>, <화식열전>을 압축적으로 재구성한 현대적 버전으로 손색이 없다. 오래 전 사라졌다는 건안풍골建安風骨의 비장한 기개와 드높은 면목도 여실히 드러나 참으로 반갑다.

장편소설《여신女神》의 고승철 소설가 / 연합뉴스=공감신문

책을 읽기 시작해서는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동아닷컴>의 인기연재물이었던 온 라인의 작품을 작가가 오프라인 책으로 수정가필하면서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흥미, 감동, 교양의 3마리 토끼’가 어울리는 역작이다. 휴머니즘과 모럴이라는 인간학을 추구하는 일종의 교양소설(성장소설)이며, 시시각각 급박한 속보가 이어지는 특종 뉴스가 포함된 탁월한 시사평론을 방불케 한다.

연작燕雀과 좁쌀들이 출세해 세상을 오도하며 설치고 영웅호걸이 부재不在하는 옹졸한 시대, 정체와 이름을 숨기고 강호와 세속을 오가며 더 좋은 세상을 치열하게 기획하는 작중의 매력적이고 강건한 주인공들을 읽으며 의협·투사들의 담력과 식견, 강렬한 개성, 재부財富의 리더십을 되새긴다.

작품은 지혜롭고 용감한 대인大人들이 결국 부자가 되고 협사가 된다는 태사공 사마천의 높은 뜻을 구현한다. 최선을 다해 정당한 이익을 숭상하고 상공업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재산을 축적해 결과적으로 민생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정치인과 학자들이 세상의 현명한 부자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화식열전>은 강력히 주장한다. 따라서 작가는 진정한 장자長者의 길과 정의正義의 대도大道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하는 완성과 행운의 길을 향해 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차력사 잠파노를 열연한 불멸의 배우 안소니 퀸(1915~2001)과 슬픈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는 <길>에서 우리가 거기에 있는 이유를 서로 이해하려고 한다. 아아, 인생의 도상에 쓸쓸히 서있는, 초라한 그대는 왜 최선을 다해 살지 못하였나.

사마천

소설의 스토리는 적수공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거부巨富를 일군 돈키호테라는 별명의 주인공 탁종팔 부초그룹 회장의 애국주의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는 야망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의 절박했던 가난 때문에 발휘되지 못한 미술에 대한 그의 못 다한 재능은 국보급 문화재 수집과 보존, 월드 클래스의 미술관 설립운영 등의 예술 후원활동(메세나)으로 구체화되고 승화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력을 십분 활용해 당대의 각 분야 엘리트들을 만나 이런저런 인연을 가슴에 쌓고 강화해, 문화강국을 이루고 노벨평화상 수상이 예상되는 남북통일의 초석을 끝내 놓으려는 일견 무모하고 거창한 꿈을 꾼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물신제일주의가 더 아름다운 멋진 세상을 만들자는 공동체의 이상과 실천으로 변하는 것이다. 재물의 주인은 따로 없고 천하의 공물公物이다. 자신의 피와 눈물, 땀이 서린 돈을 흔쾌히 쓰기로 결심한다. 

덕德을 베푸는 부富의 바람직한 사회 환원이다. 입지전적인 인물인 탁 회장은 이 지점에서 부초浮草나 부초富超의 의미를 극복한다. 사적인 탐욕과 이기, 업계의 돈키호테를 넘어서서, 익명의 큰손 기부자로서 경세제민의 소명을 추구하는 공인 지도층의 의연한 풍모를 보인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 설립, 통일한국의 그랜드 디자인 구상 등을 통해 호연지기, 영웅본색의 거인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성공한 강자인 그는 또 과거가 불운했던 약자들에게 아낌없이 재물과 인정을 베푼다. <유협열전>이 전하는 말씀이다. “곤경에 빠진 이를 구해주고 넉넉지 못한 이를 도와주는 건 인자仁者의 일이며, 신의를 잃지 않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의자義者의 길이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 교수의 수제자로 생각되는 흙수저 장다희를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부초미술관 관장 및 양녀로 삼고, 재능과 미모에다 당당한 힘이나 카리스마까지 갖춘 룸살롱 마담 출신 민자영을 발탁해 핵심참모로 활용한다. 

이들을 자신의 외동딸 탁하연과 비교하면서 그는 불세출의 보물인 클레오파트라의 왕관, 브루투스의 검, 명성황후의 의상을 통해 누가 추후 통일한국의 대통령 재목이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도 한다. <화식열전>의 지적처럼 대부호는 본래 천하의 기화奇貨를 사고, 주로 왕재王材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법이다.

탁 회장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 출신의 소피아, 줄리아, 무기고 등 수려한 선남선녀들은 탁 회장과 함께 우리가 상상하는 상상력 이상의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 협객으로서의 의리와 용기를 보여준다. 소설에서는 러너스 하이의 마라토너, 챔피언 수준의 복싱선수, 격투기 등에 통달한 지사 등과 함께 인문학과 예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온축한 의사, 재야 서양사학자, 야쿠자 출신 문화재 밀매업자, MIT 출신의 수재인 후계자 사위, 타고난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한 불운한 성악가 도민구, 호남아 그레고리 백白, 먼 조상이 한국인이었던 로베르토 코레아 등이 소개된다. 

무하마드 알리, 마라도나, 벤베누티, 김기수, 이소룡, 우사인 볼트를 비롯해 오드리 헵번(오둘희), 마리아 칼라스, 오리아나 팔라치, 로마시장 바르지니아 라지,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다리오 포, 21세기 최고의 벨칸토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1973~)가 소설의 무대를 빛내는가 하면, 클레오파트라와 잔 다르크, 명성황후 등이 여주인공들에 빙의되어 화려한 미모와 지성, 힘의 여인들을 과감하게 상징한다. 소설문학의 뚜렷한 장점이다.

미인과 협객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거나 도원의 결의를 맺고 한국, 이탈리아, 일본, 북한 등을 오가면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의인은 과연 누구인가. 미키 기요시(三木淸, 1897~1945)의 말처럼 분노할 줄 아는 자다. 불의와 거짓에 분노하는 유협과 자객들의 특징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난세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와 진리를 찾기 위해 주로 자력구제, 사적 구제에 의존한다. 합법은 물론 불법도 언제든지 선택 가능한 수단이다. 탁 회장 역시 문화재 밀반입, 절도, 사기, 미인계와 테러 등의 수단과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른바 군자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그릇이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취지다. 따라서 작은 법으로 가둬둘 수 없는 높은 상무정신으로, 발호하는 악당들에 대한 응징은 독서와 내공이 깊은 은사隱士를 동원하거나, 충성스러운 사병집단인 결사대와 함께 은밀하게 해결한다.

반복되는 승리와 패배의 순간이나 격투의 무예와 주먹이 오가는 험난한 과정이 지나면 아름답고도 강인한 여인들과 의롭고 준수한 협객들은 서로 벗이 되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나 운우지정雲雨之情,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짙은 에로티시즘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되 과도하지 않는 색色이 남녀 사이의 본질적인 소통이 될 수 있다면, 기대가 큰 독자로서는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오우가>의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선생도 말하였다. “술을 마실 때 덕德이 없으면 문란하고, 춤을 출 때 예禮가 없으면 난잡하다.”

장편소설《여신(女神)》 / 사진출처=나남출판사

책의 제목 《여신》이 강하게 암시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서사다. 여신은 최근 여성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의 로망이다. 비록 어린 날의 꿈으로 사라지거나 어쩔 수 없이 좌절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한 때 디바(diva), 뮤즈(muse), 프리마돈나, 신데렐라, 백설 공주, 백마를 탄 왕자, 피터 팬, 용감한 기사 등을 꿈꾼 기억을 안고 산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이런 동심童心에 기대는 마법의 상상력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순수하고 푸른 마음은 인간의 원형질이자 영원한 고향이다.

작중의 인물들은 금수저 출신이거나, 간난신고를 거쳐 자수성가한 흙수저들로 시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갑남을녀甲男乙女가 아니라 거의 복룡봉추伏龍鳳雛에 해당하는 인간군상이다. 그들은 사치를 즐기고 입고 마시고 폼을 내는 세계적인 명품의 소비에도 익숙하지만, 다행히도 문무를 겸했거나 문학, 역사, 음악, 미술, 의학 등 각각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인물들로 설정된다. 운 좋게도 스승이 있었거나, 혼자서 독학을 했건, 그들의 말과 안목은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시국과 현실에 대한 풍자, 은유, 비판과 함께 작가의 남다른 지적 온축과 체험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작가는 호탕한 무협의 기개가 문풍文風의 소쇄한 기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일가를 이룬 무인武人의 경지와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문사文士의 글은 결국 심중무검心中無劍의 상태로 극상의 차원에서는 서로가 통하는 것이라고 글의 행간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문무와 심미안을 겸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 탁 회장이 공동체 성격의 미술관을 건립하고 협객 집단을 구성하는 것은 작가 자신이 가진 깊은 뜻의 발로라고 보인다. 

글과 말로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글은 결국 작가 자신의 투영이거나 자전적인 성격을 갖기 마련이다. 작가의 작품에 이런 문무·동서 겸전과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물이 주로 등장하는 것은 박문강기博聞强記한 작가 자신이 익힌 철학과 인생관, 폭넓은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시詩든, 소설이든, 의론산문議論散文이든, 수필이든, 글은 곧 그 사람이다. 글이 남기는 의미심장한 뜻은 곧 글쓴이의 청수·고결한 인품이다. 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言有盡而意無窮). 좋은 인간의 뜻에는 무거운 여운이 남는 것이다.

<공터에서> / 사진출처=네이버 책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천의무봉했던 작가 이병주(1921~1992) 선생을 사숙한다는 작가는 이름이 잘 알려진 아마추어 마라토너이며, 좋은 저자의 책을 모두 구입해 읽는 전작주의자이며, 유능한 경제기자 출신이다. 지난 1997년의 IMF 사태를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붓을 잠시 놓기도 했던 작가는 지금은 자기 키 만큼의 저술에 힘쓰고 있다. 2008년 《서재필 광야에 서다》로 소설가로 본격 데뷔한 그는 《은빛 까마귀》, 《개마고원》 등 주목되는 장편을 발표했고 《김재익 평전》, 《CEO 인문학》 등 다수의 빼어난 저서들을 출간했다. 현재 명문 (주)나남의 주필 겸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고전의 위상으로 남을 책들을 생산하고자 항상 고뇌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궁핍한 우리 시대가 신문기자 출신의 뛰어난 작가들을 가진 것은 행복이다. 고요하고 삼엄한 회의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인 김훈 작가가 저 편에서 차가운 역사의식으로 깊은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봄볕 가득한 높은 산처럼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시대정신을 고양하려는 다정다감한 고 작가가 보인다. 경애하는 김 작가의 최근작 <공터에서>는 척박한 독서풍토에서도 돌풍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멀리 있는 그들을 필자는 참으로 경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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