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을 이끄는 것은 어떠한 원동력인가, 그리고 그 삶은 당신의 것이 맞는 걸까

[공감신문]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린 시절부터 우울함에 빠지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랄까 두려움은 없었다. 우울할 때면 기분이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차라리 그 감정을 이용하여 무언가 창조적인 활동을 한다 던지, 혹은 더 딥(deep)한 음악을 듣고는 그 심연을 쳐보려고 했다. 그 이후에 다 비워진 듯 공허한 감정은 ‘0’의 상태가 되어, 이후 다가오는 감정들에 대하여 더 나답게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울해서 죽고 싶다 던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죽음’에 대해서도 오히려 객관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무서웠던 때가 있긴 했었다. 이러다가 내 삶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2014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한권의 소설책을 출간한 이후였다. 이미 연재소설 치고 꽤 인기가 있던 거라 출간을 준비하면서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다. 그리고 출간, 반응도 꽤 나쁘지 않았다. 겨우 두 달이었지만 알만한 굵직한 대형 서점에서 한국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였기도 했다. 주변의 축하가 이어졌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베스트셀러 작가라니. 사람들은 앞날이 모호해 보였던 나에게, 이제야 조금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겠다며 기뻐해주었다. 그랬다. 당시엔 나 역시도 정말 기뻤다, 아주 잠시. 그리고 소설 출간 보름 후, 난 정신과 진료실에 앉아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내 발로 찾아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무기력에 빠졌어요.”
햇빛이 따사로운 날이었고, 진료실에는 옅은 먼지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흩날리고 있었다. 나이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자한 여의사 선생님께 내가 꺼낸 첫마디였다. 긴장감도 없었지만 내부는 꽤나 편안, 아니 진부한 형태였다. 부동산에서나 보던 인스턴트 녹차를 한 잔 받아 마시니 더욱 그러한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언젠가 한번쯤은 정신과에 가게 될 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공황장애랄까 뭐 그런 대단히 나의 정신이 괴로운 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울증도 마음의 감기 같은 것이니까, 심한 ‘독감’같다고 느끼면 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상태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두려움, 불안함, 말도 안 되는 흥분, 뭐 이런 게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무기력했던 것이다! 일을 하고 싶지도, 글을 쓰고 싶지도, 놀고 싶지도, 음악을 듣고 싶지도, 춤을 추고 싶지도,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섹스를 하고 싶지도, 심지어는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화장실을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삶’을 영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낄 기력도 없었다. 완전히 ‘0’의 상태. 이대로라면 내가 시체와 다를 바가 무어란 말인가? 시체의 환경을 고스란히 경험해도 괜찮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 발로 정신과를 찾은 거다. 왠지 거기에 가면 내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

(영화 <셰임> 중에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나의 소설 출간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그러다보니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무기력한 나였지만 이전의 화법은 습관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미 당시 난 대학에서 특강한 적도 있었고, TV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자신감 있게 내 의견을 피력했던 적도 있었다. 말투는 자기PR적이며, 자신감이 넘쳐흘렀으리라. 선생님은 내가 굉장히 자주적으로 열심히 내 삶을 살아온 멋진 아가씨 같다고 했다. 그런 내가 무기력이라니, 선생님은 갸우뚱하시며 나에게 한 가지 검사를 제안하셨다. 오라소마 색깔 테스트라는 거였다. 나는 이왕 온 거 뭐라도 해보자 싶었다.
간호사가 겨우 1평짜리 흰 방으로 날 안내했다. 거기엔 갖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유리병들이 한 쪽 벽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에게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4개의 병을 고르라고 했다. 난 애들 장난 심리테스트 같은 이 검사가 5만원씩이나 한다니, 싶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내가 고른 병 4개를 가지고 다시 선생님이 있는, 조금 더 편안해진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난, 죽어있던 아니 죽은 바와 다를 바 없던 ‘내 자신’이 내는 소릴 들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고른 순서대로, 첫 번째 유리병은 나의 본질 컬러, 그 다음은 과거, 현재, 추구하는 방향 뭐 이런 거였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그 유리병의 컬러를 해석해주셨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 굉장히, 다른 사람에게 희생하고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네요.”
난 여기서 무너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아빠와 함께 살며 자연스레 할머니 손에 컸는데, 굳이 우리 아빠 편에 서지 않던 누구라도 엄마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우리 가정이 이렇게 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죄 없는 7살의 어린 나는 그 커다란 충격을 고스란히 껴안아야만 했다. 인간이 겪은 가장 큰 스트레스 중 1위가 자식의 죽음, 2위가 이혼이라더라. 당시 우리 아빠와 할머니 모두 예전만큼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난 집안의 분위기를 인지할 수 있었기에 악동같이 굴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인어아가씨>라는 연속극이 선풍적인 인기였다. 아버지가 버린 딸이 유명한 작가가 되어 복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어렴풋이 어른들은 저런 작가가 되라고 말했다. 네가 잘 자라서 유명해져서 엄마에게 보여주라고, 이렇게 잘 컸노라. 나는 어떠한 나의 자아실현이랄까, 이를 테면 어떤 어른이 되어서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친구들을 사귀고, 어떤 남자를 만나고 이런 나의 미래가 아닌, 그저 복수심이 나의 원동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넌 그래야만 한다, 라고. 그리고 막연하게 정말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약 16년이 흐른 뒤, 나는 정말 베스트셀러 한 권을 펴냈고 그걸 미국에 있는 엄마가 소식을 들었을지 안 들었을지, 들었더라도 그것에 마음이 동요했을지 전혀 신경도 안 쓸지 모르겠지만, 암튼 해낸 것이다…….
나 스스로 ‘이제 다 되었어’라고 생각한 순간, 난 삶의 이유를 허망하게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복수는 끝났어.’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극 중 수현(이병헌 분)이 경철(최민식 분)에게 복수를 끝낸 후, 차가운 새벽녘의 길을 걸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나.
나는 그 날 병원 상담실에서 그렇게 울어버렸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 중에서)

글을 쓰는 것은 나의 표출해내야만 했던, 어떤 창작 욕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 어딘지 모르게 항상 조급했던 것 같다. 나는 빨리 보여주고 싶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 들어오더라도 그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거라면 거의 했던 것 같다. 그게 심지어 나를 깎아먹는 게 빤히 보이는 방송 프로그램이더라도 그냥 출연했다. 세상에 나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 것보다, 내 주변에서 나의 복수를 기대하는, 사각 링 위에서 ‘얼른 저 상대방 선수에게 한 방을 날려버려!’라며 응원하는 내 편들을 통쾌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진짜 ‘나’를 돌볼 여유란 없었다. 내가 어디가 곪아 터지고 있는 지도 몰랐던 거다. 그래서 7살 이전의 나, 그러니까 옆집 아이와 바비 인형의 옷을 입히며 ‘나도 어른이 되면 이런 구두를 신고 저런 파티에 갈 거야.’, ‘이런 집에 살며 이렇게 키 큰 남자랑 저런 집에 살 거야.’라며 행복한 여자이자 행복한 어른이 되고 싶던 나는 결국 어딘가에 묻혀, 죽은 바와 다름없이 숨어 지내며, 울고 있던 것이다.

이후 나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병원에서 가벼운 약 두 가지 정도를 처방받았었다. 하지만 먹지 않았다. 나의 마음의 병이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게 된 나는, 약 없이 스스로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장 내가 혼자 살고 있던 공간부터 개선했다. 나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침구부터 좋은 걸로 바꿨다. 매일 얼굴을 닦는 수건도 다 새것으로 갈아치웠다. 집 안에 디퓨저 같은 것에도 엄청 신경을 썼다.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아닌, 내가 바라보기에 좋은 나의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이기적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절대 이기적인 생각들이 아니었다. 자주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다. 하지만 당시 내가 행했던 그런 일들이,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던 나에게는 굉장히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십 몇 년 동안 돌보지 않은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보호해주고자 했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것에 적응하는 데 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후 내 주변이 변화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그건 내가 변해서였을 거다. 평생 남들에게 ‘나 힘들어요,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할 줄 몰랐고 늘 괜찮은 척 강인한 척 하던 내가, 이런 건 할 줄 모르겠다고 말하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은근 놀라워했다. 나는 남들에게 억지로 잘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적으로도 마찬가지고, 아는 사람으로서도, 여자로서도 그냥 나다운 나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날 사랑스러워하는 게 아니겠는가?!

심지어는 일에도 더욱 능률이 올라갔다. 내가 할 줄 아는 일들만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수심’으로 인생을 폭주 기관차처럼 열심히 살 때, 글을 열심히 써서 인지 어느 정도 요령도 붙은 상태였다. 이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만 남 눈치 보지 않고 해내니 내 색깔이라는 게 생겨나더라. 캐릭터가 생기니, 그런 캐릭터를 찾는 데서는 날 환영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일이 잘 되니 어딜 가든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사실 무기력에 빠졌을 때 난 내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었다. 친구들을 다시 ‘돌아 온’ 내가 얼마나 ‘더 괜찮은 인간’이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답게 일을 하는 나에 대해서, 그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뻐해주었다. 진짜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2017년 스물아홉, 지금의 난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린 시절 꿈꾸던 스물아홉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닮아있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거리가 멀다. 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어느 샌가, 요즘 너무 마신다, 스스로 잉여인간 같다, 싶으면 종종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난 커서 뭐 되려고 이러지?”
그럼 친구들은 대답해준다.
“해수야, 너 이미 다 컸어.”
아니야!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변화하지. 나는 겨우 스물아홉이고, 계란 한판이라는 내년, 그리고 서른다섯, 마흔, 오십……. 어떤 모습일지 너무도 궁금하다. 단지 하나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어린 시절 가졌던 복수심처럼 어떤 이상한 원동력이 나의 삶을 이끌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고자’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어느 강연에서 보았는데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마치 숙제처럼 강요한다고 했다. 내가 행복해져야지, 라고 느끼지 전에 이미 우리 사회는 그것이 마치 꼭 가져야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해지려면 이러한 요구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것들을 사야만 할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SNS등을 통하여 타인의 삶의 모습을 동경하게 되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 분명 자기에게 어울리는 삶이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런 환경이 주는 속박 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게 행복에 대한 의무감이든, 복수심이든.

누군가 나에게, ‘왜 사느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더 나이가 든 후에는 바뀔 수 있겠지만.)
‘난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증명하려고 살아요.’

기독교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야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삶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건 글인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세상을 놀라웁게 할만한, 이롭게 할 만한,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인정할만한 어떤 글을 써서 난 이런 작가 지해수였다, 라고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나’에게 집중한다면서 왜 또 남에게 ‘증명’하려 하냐고? 그게 원래 ‘나’의 본질이다. 나의 자아실현! 나란 인간이 그런 복수심 때문에 십 몇 년을 파닥파닥 움직인 것도 사실 다 애정에 대한 욕구 때문이 아니겠어? 그래, 결국 난 사랑받고 싶었던 거야. 맞다, 타고난 관심종자. 쇼맨십 강한 인간!

10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10대는 인생에 있어 봄이 아닌 뜨거운 한 여름이다. 유관순 열사도 그 나이에 3.1운동에 나섰고, 5.18 광주민주항쟁도 교복에 쏟아진 선명한 핏자국들이 있었다. 어떠한 당대의 문학가들이 10대에 주옥같은 연애소설을 펴냈다. 좋아하는 아이돌 오빠 집 앞에서, 화장실 가는 찰나에 설마 그 오빠를 놓칠세라 검은 봉투에 대변을 보는 열정도 10대에나 가능한 거다. 그 이후 우리는 대부분 피가 식는다, 무기력해진다. 혹은 환경이 주는 감정을 따라가거나.
그것이 당신의 삶을 영위하게 한다면, 그렇게 변하는 당신의 일상이 나쁘지 않다면 거기 발 맞춰 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어디엔가 2014년의 나처럼 겉으론 아무 문제없으나 속으로는 무기력해진 누군가가 있다면 꼭, 잃어버린 그대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시길 바란다. 토라진 그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누구의 손길도 받은 적 없었기에 너무도 쉽게, 자신의 오른 손을 건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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