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 하나에 절망하는 이는 겁쟁이다. 하지만 인류의 상태에 대해 희망을 갖는 자는 바보다. / 알베르 까뮈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 어젠 비가 왔었다. 별 거 없던 익숙한 동네 풍경을 그리 설레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희망을 꿈꿨기 때문이다. 난 유권자로서의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러 가고 있었다. 몇 시간 뒤, 누구를 뽑았다고 말은 안하겠다만 정말 다행이다 싶은 결과였다. 두근대던 나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음이다! 그런데 까뮈 씨, 희망을 갖는 자는 바보라니! 그렇게 말할래요?

나는 그 투표가 마치고 개표가 시작될 몇 시간 동안 지인이 배우로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었다. <생존 도시>라는 작품이었다. 사실 작품 자체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랜만에 아는 오빠의 얼굴을 보겠구나, 정도였다. 그런데 첫 씬 부터 엄청난 에너지가 관객들을 압도했다. 제목에서 느껴지겠지만 강렬한 내용이 맞다. 무대 안에 펼쳐진 세계는 차갑고 냉정했다. 미래의 어느 도시가 드러내는 현실에, 나는 겨드랑이가 다 시렸다. 그건 내가 겪지 못한 흑사병 때 같기도, 2차 대전 같기도, 경제공황 같기도, 한국전쟁 같기도 한 풍경이었다. 두려운 건 배고픔 같은 게 아니었다. 환경이란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감히 말해본다. 중요한 건 사람들, 즉 사회다. 그래, 어쩌면 지금 다들 먹을 게 풍족한 환경이라 다들 돼지같이 배부른 미소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켜고 개표 현황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문재인-안철수 양강 구도를 예상했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때 마침 저리도 차가운 공연을 보고 난 직후라 더욱 이 현실 무서워진 것이다! ‘저 사람은 너무 상식 밖 아닌가.’라고 느낀 누군가에게 예상 외의 정말 많은 표심이 향해 있었다. 누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역대 최다 득표차가 났다 치더라도 어쨌든 그 ‘상식 밖’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나는 순간 우리나라 국민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저 말이 떠오른 거다.

‘어떤 일 하나에 절망하는 이는 겁쟁이다.
하지만 인류의 상태에 대해 희망을 갖는 자는 바보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통합되기 힘든지 통렬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회는 처음부터 통합이 어려운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엄청난 계기가 생기나지 않는 이상.

연극 <생존 도시>에서는 자기 살덩이를 잘라 자식에게 먹여야 할 정도로 참혹한 기근에 시달린다. 물론 위에서 말했다시피 기근뿐만이 아니다. 생각할 줄 아는 인간들의 약육강식은 더욱 섬뜩했다. 그러던 이들이 그 도시에서 벗어나고자 뜻을 모은다. 야비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지만 이때만큼은 다르다. 통합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국민들이 뜻을 모아 매일매일 촛불을 켜지 않았던가. 지방에서 한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다던 아이들을 위하여 어른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들’의 이름은 대통합의 아이콘과도 같았다. 양파처럼 까도까도 의혹들이 계속 불거져 나왔다. 누구 하나 술자리에서 그녀들 편인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정의의 편에 섰던 것이다(혹은 그런 척을 했다). 그러니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도 그녀들 이름 하나면, 우린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건배를 했고 곧 잔을 가볍게 만들어 거뜬히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린 하나였다, 정말로. 대통합의 아이콘.

우린 왜 쉽게 통합할 수 없는가. 아니, 이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 우리는 각 개인이 잘 먹고 잘 살고자 한다. 그러니 애초에 통합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 끊임없이 절충하고 맞춰갈 뿐이다. 연극 <생존 본능>에서 어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나쁜 짓들을 저지른다. 그래야 자식을 교육시키고 먹일 수 있으니까. 여태껏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대대손손 살아왔다. 친일파들이 그랬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래왔고, 지금도 이 사회 안에서 남에게 헤를 끼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그들도 어린 시절 마블 시리즈를 즐겨보며 정의로운 사회를 아름답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니 더욱 무서운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앎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사회가 통합이 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는 전쟁, 기근, 부정부패 같은 엄청난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통합’하는 척 하고 또 다시 분열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연극 안에서 그들은 물어뜯고 할퀴고 찌르고 싸우지만, 이상하게도 서로를 미워한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저 사회에선 저렇게 살아야 되니까 저러는구나,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 하나가 나서서 중재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저런 입장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그러기에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가 있었다. 그래, 정말 무서운 건 이거였을 지도 모른다.

통합을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이 없이는 통합이 불가능하다. 영화 <바벨>에서는 소통 부재에 의한 비극들이 나비효과처럼 펼쳐진다. 현대 사회는 소통의 도구들이 상당히 많음에도 소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인들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서 뭐든 즐긴다. 작은 화면으로 보는 어느 한정적인 세계에서 사람들을 접한다. 그리고 오해한다.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그러니 나 역시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도대체 2번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건가’라고 했었는데. 우린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던 거다.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 유세에서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하자, 그를 암살하겠다며 인터넷에 글을 올린 20대도 있었다. 점점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격해지고 서로를 저격하며 비방하기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다른 세계에 사는 누군가도 우리를 보며, ‘생존 도시’에서와 같은 감정을 느끼진 않을까? 물어뜯고 할퀴고 찌르고 싸우지만 서로를 미워한다는 감정이 느껴지진 않는다고. 단지 그냥 저 사회에선 저렇게 살아야 되는 구나, 싶어서 안타까운 감정이 든다고.

한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사회 통합을 하려면 어느 과제가 주어져야 한다고 한다. 물론 공동의 이익을 위한 과제일 것이다. 그 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각 개인에게 역할이 분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해내는 과정 자체에서 개인은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냉정하게도 그것이 사회를 움직이는 방법일지 모른다. 이건 정말 섬뜩한 얘기다.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려보면 쉽다.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꼬리칸 사람들은, 젊은 지도자 커티스를 중심으로 힘을 합하여 기차의 심장 엔진이 있는 칸까지 올라간다. 커티스는 그들의 적이자, 기차 최고 권력자인 월 포드와 만난다. 거기서 커티스는 무너지고 만다. 커티스는 물론이요, 꼬리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길리엄이 알고 보니 월 포드와 ‘한 통속’이었던 게 아닌가! ‘기차’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과제들을 만든 것이다. 그 모든 죽음들과 폭동들은 사실 예견된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그들은 머리에서 꼬리, 처음과 끝에서 기차라는 ‘세계’를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 사회를 통합시키고 분열시키고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젊은 지도자 커티스? 꼬리칸의 영웅? 아니, 그저 월포드가 쓰고 길리엄이 각색한 시나리오에 충실했던 주연배우였을 뿐.

(영화 <설국열차>에서 늙은 길리엄과 젊은 지도차 커티스 일행들)

어쩌면 우리도 알 수 없는 대단한 권력자의 시나리오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 안에서 자꾸만 우리에게 어떠한 청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더 훌륭한 사람이며, 이렇게 되면 더 상위 계급으로 갈 수 있다며 꾀고 있을 수도 있단 말이다. 우리는 그 청사진을 향해 달리며 투쟁하고 싸우고 서로를 외면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애니메이션을 보고 엄청 우울했었다. 시계 토끼(인생)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간 앨리스는 거기서 집단 이기주의, 차별, 속임, 계급 사회를 겪는다. 그랬다. 앨리스가 겪은 이상한 나라는 ‘어른들의 사회’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작자 소설가 루이스 캐럴은 소아 성애자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실존 인물을 모델로 그 소설을 썼다. 아마도 캐럴은 앨리스가 나중에 커서 보게 될 차가운 현실에 놀랄까봐, 미리 예방주사를 놔주려 이런 순애보적인 짓을 한건 아니었을까.

(루이스 캐럴과 실제 앨리스 주인공)

우린 세상을 비뚤게 보고, 멀리서 보고, 동정하고, 때론 외면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기 위하여,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다. <철학자와 하녀>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라고. 그러니 세상에 속지 말고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게 공부가 아니다. 자꾸만 능동적으로 찾아 읽고, 찾아가서 보고, 찾아 가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당신은 ‘앨리스’가 아니므로, 당신만을 위한 친절하고 우울하고 아름답고 기억될 만한 교육이 없을 거잖아?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까뮈에 말처럼 이전에 절망하지 않았지만 희망을 또 갖는다니, 나는 바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대통령은 대화할 줄 아시는 분이라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연극 <생존 도시>에서처럼 극한의 상황이 오지 않더라도, 사회가 서로 통합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길 감히 바라본다. 그래서 정말 ‘아, 현실은 냉혹하고 끔찍할 수도 있구나!’ 까먹을까봐, 상기시키기 위하여 이런 차가운 연극과 영화, 문학 작품들을 자주 꺼내어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렇게 희망은 비를 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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