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주된 죄 가운데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초조함이라고 카프카가 말했다.

[공감신문] 인간은 누구나 초조함을 느낀다. 이것은 불안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불안함은 유쾌한 감정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다. 불안함은 더 나은 삶, 아니 음 그렇게 거창하게 말고, 더 나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초조함은 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적은 편이다. <소송>, <변신> 등의 걸작을 남긴 유대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 단 한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 <죄, 고백,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카프카 작)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1924)

나는 <철학자와 하녀>(고병권 저)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철학을 하는 사람은 초조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철학을 하는 삶은 초조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불안함과 초조함을 자주 느낀다.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은 매번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어떠할 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초조함을 느낄 때는 대부분 이러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방학 숙제를 다 하지 못했는데 개학식이 다가오면 엄청 초조했다. 밀린 일기나 독후감 같은 것을 어떻게 해치울 것인가! 내가 초등학교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지도, 아니 있었어도 어떻게 활용하는 지 방법을 몰랐다. 그 많은 날짜들의 날씨를 어떻게 알아볼지 몰랐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몸은 더욱 게을러지더라.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다음 방학 때에는 정말 숙제를 조금씩 매일매일 해야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오늘 할 공부도 제발 내일로 미루지 말자며 수능 날짜가 다가올 때쯤 또 초조해 진거다. 공부하지 못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아, 정말 성인이 되면 그러지 않을 테야, 라고 그렇게 끊임없이 줄곧 느껴왔으면서 아직 그 버릇을 못 고쳤다. 매주 2화씩의 칼럼을 연재한다. 마감 요일이 다가오면 초조함을 느낀다. 아, 언제 글 쓰지? 집과 작업실의 거리는 불과 300미터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의 거리는 가끔 서울과 부산을 방불케 한다. 글 쓰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음 좋아하는 남자도 가끔 만나기 귀찮을 때가 있잖아? 그런 거다. 그런 초조함을 느낄 때에는 누가 내 심장을 쥐고 마구 흔드는 기분이다.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마음은 쉬질 않는다. ‘아, 해야 되는데.’ ‘아, 할 일이 있는데.’ 초조함은 대부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반면 불안함은 어떠한가? 내가 최근 가장 큰 불안함을 느낀 건 아마도 전쟁이 나네, 안 나네 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뉴스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친구가 나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누설할까봐 걱정했던 것도 초조함보다는 불안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정글에서도 맹수에게 언제 먹힐지 모르는 나약한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역시 초조함보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렇다. 불안이라는 건, 어쩌면 초조함과는 달리 타인이나 나를 둘러싼 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오히려 초조함보다 불안을 더 많이 느껴야하지 않나?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현대인들이 아닌가.
근데 가만 다시 생각해보니 초조함은 불안함보다 훨씬 더, 타인에 의한 감정이 맞았다!

다시 초조함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 그러니까 내가 수행하지 못했던 일들은 사실 ‘나’ 스스로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방학 숙제를 하지 않는 다고 나 자신은 괴롭지 않다. 당장 오늘 글을 쓰지 않고 내가 막 정신이 맑을 때 글을 쓰는 게 나 스스로 좋을 수도 있다. ‘나’만 생각하면 괴로울 일도, 초조할 일도 없다. 하지만 내가 그걸 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혹은 조직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우린 이것이 두려워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겨우 어느 일이나 사건이 아닌,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음이다. 그러니 초조함이야말로 불안함보다 훨씬 더 타인에 의한 감정이 아니겠는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되어라’라고 강요받고 그 잣대에 맞춰 평가받는 현대인들이다. 그러니 현대인과 초조함의 관계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고독한 현대인들이니 초조함이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초조함은 정말로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감정인 것 같다. 초조(焦燥)의 한자 뜻을 살펴보니 ‘소멸’과 ‘고갈’의 의미를 가진다. 불안(不安)처럼 단지 편안하지 않다, 는 정도가 아니다. 뜻이 상당히 파괴적이다. 영어 사전에 초조함을 검색해보면 ‘restlessness’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온다. rest(휴식하다)가 less, 즉 없다는 거다. ‘쉼’이 없다. 복합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쉼이 없다는 것은 소멸을 나타내는 것이다. 쉼이 없다. 그렇다, 그것은 현대인들의 상태다. 여기서 쉼이란 그저 잠을 자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손에서 일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쉼 없디 일에만 파묻혀 있으면 판단력을 잃기 때문이다. 잠시 일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보면 자기 삶의 조화로운 균형이 어떻게 깨져 있는 지 보다 분명히 보인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우리는 많은 지식 정보를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판단들을 할 때가 많다. 영리할 수는 있지만 어딘지 지혜로운 느낌은 별로 없다. 초조함은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고 한다. 그래, 다 제대로 쉬질 못해서 지혜롭지 못한 거였다.
쉬는 시간을 갖고 여행을 떠난다고 모두 쉬는 게 아니다. 정말 그 때 만큼은 다 내려놓아야한다. 남들이 기대하는 ‘나’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휴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초조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쉬고 싶다, 지금도 쉬고 있지만 더 격하게 쉬고 싶다.’는 말들을 한다. 진정한 휴식을 누리지 못할 때 하는 말이다. 육체는 안식을 취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의 이성은 쉼 없이 괴로운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안 그래도 피곤한 데 무슨 철학이냐고? 당신이 ‘철학’을 마치 공부처럼 접근해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아닐까? 학문이 아니라 생활 안에서 철학을 찾는 것은 절대 피곤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찾은 철학은, 당신이 초조하지 않아도 될 것에 초조에 하고 있구나, 라고 깨닫게 해줄 지도 모른다. 또 그 철학은, 제대로 쉬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삶을 다시 우회해보고, 곱씹는 것이 철학이랬다. 우리는 쉬면서 그 과정을 겪는 것이다.

할 일이 많아왔던 우리들은 어쩌면 초조함이란 감정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내가 지금 초조한 것인지, 초조하지 않은 것인지조차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은 초조한 감정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길 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당신을 소멸시키고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하지만 당신이 꼭 해야만 할 일들이 지금처럼 많은 지, 당신에게 지워진 짐이 정말로 타당한 것이고, 그 짐이 당신을 괴롭힐 가치가 있는 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또 왜 당신은 타인의 외면을 받고 미움을 받기를 두려워하는 가. 그가 당신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인가. 하물며 이것은 부모가 우리에게 거는 기대감 역시도 포함된다. 대게 많은 부모들은 어릴 적의 제 자식이 ‘천재’라고 생각한다. 얜 정말 뭐가 달라도 다르기 때문에 커서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 착각한다. 자기 자식이 크면서 ‘평범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든다. 부모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들의 기대 때문에 적어도 내가 초조해지지는 말자는 거다. 직장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연인관계에서, 누구에게서든, 어디서든 못하겠으면 못한다고 말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자. 차라리 한 템포 쉬어가며 그 시간에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하여. 쉼 없이 말고 쉼 있이, 철학하며 말이다. 흐린 판단력으로 행동할 바에야.

어쩌면 초조함은 당연한 것이며, 그런 타인이나 사회의 평가 따위 모두 집어 치우고 휴식하라는 내 말이 현실과 괴리감이 큰 철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초조함이 가득 쌓여 흘러넘치는 자신을 느끼게 된 당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때에, 이 철없는 20대가 슬쩍 꺼내놓은 이 이야기들을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철학을 하며, 삶을 우회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휴식만 하는 사람의 휴식은 휴식이 아니다. 그건 삶의 균형을 맞출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며, 멈춰진 삶일 뿐이다. 열심히 인생을 사는 당신에게 어쩌면 초조함은, 당신이 삶을 우회할 기회를 주는 터닝 포인트가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초조함도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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