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 해마다 기념하고 있으나 스승의 날은 갈수록 공허하고 초라하다. 소위 ‘김영란법’이라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등의 여파로 카네이션까지 팔리지 않아 화훼농가들이 크게 울상을 짓는다. 잘못된 사회 풍토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일면 가상한 것이긴 하나,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잘못이자 교각살우의 기미가 없지 않음을 걱정한다.

선생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꽃 하나 제대로 달아드릴 수 없는 현실이 무정하고 각박한 세태를 더욱 부채질한다. 예전 그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에도, 책 한 권을 다 배우고 나면 떡이나 과일·곡차 등을 마련해 평소 존경하는 스승에게 대접을 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과거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스승을 충효의 대상으로까지 격상해 기린 아름다운 풍토로, 오늘날과는 격세지감을 들게 한다. 어쨌든, 스승이 없는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아니다. 미래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무명교사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숭고한 교단敎壇에 대한 불신을 더욱 조장하는 어리석은 하책이 아닐 수 없다.

그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각종 명문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이는 《고문진보》의 서문에도 보이는 글이다. 좋은 스승 아래에서 고명한 제자가 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운 좋게도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나 학생이 공부에 뜻이 약해 스승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매우 아쉽게도 좋은 제자도 우뚝한 스승도 거의 보이지 않는 세태라는 한탄이 낯설지 않다.

학교를 떠난 제자들은 못난 인간으로 커서 현명한 스승들을 욕보이는 일들을 다반사로 하고, 뛰어난 스승이 가르쳤다는 귀한 가르침의 실천은 과문한 탓인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때로 의인義人들의 선행이나 미담이 매스컴에 간간히 소개되기도 하나 그것은 거의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임이 분명하다.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13일 오후 충남 논산시 강경고 교정에서 열린 '전국 청소년적십자(RCY) 백일장·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학생 대표가 선생님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공감신문

예전의 열악한 서당의 교육 환경에 비교해 더 좋은 학교나 명문대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는 하나, 청출어람하고 후생가외를 하는 제자들이 그만큼 더 많이 배출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 좋은 제자들이 즐비하여 세상은 과거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나아졌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우등생이 되지 못하고, 공부 잘해서 출세한 자들이 제 잇속이나 차리려고 혈안이 되고 기껏해야 편협하고 치졸한 패거리 이기주의에나 함몰되는 것은 제자 본인들의 잘못 탓이 크다고 하지만, 가르친 스승들의 책임은 과연 없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특히 선거철이 되면 교수들은 떼를 지어 정치인에게 지식을 팔기 위해 줄을 서고, 선거가 끝나면 그럴듯한 현직을 차지하는 세태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나. 학생들이 얄팍한 처세술이나 세상 살아가는 치사하고 졸렬한 요령이나 배우려고 그 비싼 등록금 내며 대학에 갔는지 의심스럽다. 사람 제대로 키워보자고 준비하는 것이 학교이고 교육인데 그런 교수들 밑에서 비열한 출세지상주의나 천박한 인격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과거에 비해 지식은 폭증했으나 지혜와 식견은 그만큼 늘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큰 걱정이라며 연구실을 묵묵히 지키는 양심적인 학자들의 노심초사까지도 무색할 지경에 처한 상아탑의 타락한 현실이 안타깝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교육자들의 힘이다. 교육과 학습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교육은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가장 중요한 힘이자 가치다.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결국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를 부흥시킨다. 국력의 바탕이 인적 자원의 개발을 좌우하는 교육이다. 올바른 교육의 핵심은 선생과 학생에게 있다. 그러나 학교나 교육에 대한 비판과 불신은 높다. 따라서 학교는 많으나 교육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다고 한다. 학식·덕행이 높다는 사표師表는 물론 엄격한 스승과 좋은 벗, 엄사양우嚴師良友나 사도師道도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개탄들이 줄을 잇는다.

예전의 스승과 제자들은 《소학》을 읽고 또 읽었다.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소학》을 읽어야 한다(人生八歲皆入小學). 조선의 개혁과 중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할아버지 영조(1694~1776)와 손자 정조(1752~1800)도 《소학》을 백번을 넘게 읽었다고 한다.

비운의 급진개혁정치가 조광조(1482~1519)의 스승 김굉필(1454~1504)은 《소학》을 열심히 읽었다. ‘소학동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굉필의 스승 김종직(1431~1492)도 《소학》을 즐겨 읽었다. 김굉필은 <독소학(讀小學)>이란 글에서 《소학》의 크기와 중요성을 알린다.

“학문을 배우고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業文猶未識天機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네小學書中悟昨非. 앞으로는 절로 유교에 낙이 있으리니從此自有名敎樂 구구하게 좋은 옷 살진 말을 부러워하랴區區何用羨輕肥.

정암 조광조(1482~1519) / 사진출처=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스승 김굉필로부터 《소학》을 배운 최충성(1458~1491)은 《소학》을 사서오경의 반열에 놓을 수 있다고 한다. 최는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는 찬사를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받을 만큼 도리에 밝고 기상이 높은 선비였다.

김종직은 제자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응당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광풍제월은 황정견(1045~1105)이 주돈이(1017~1073)의 깨끗한 마음과 인품을 평하면서 한 말이다. 광풍제월은 비가 갠 뒤의 시원한 바람과 달을 말한다. 또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한다. 원나라 허형(許衡)은 “나는 《소학》의 글을 신명처럼 독실하게 믿고, 부모처럼 공경한다.”고 했다. 김종직은 김굉필의 시 <독소학>를 읽고 “이 말은 곧 성인을 만드는 뿌리이니, 허노재(허형의 호) 이후에 또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평했다.

재야의 거목,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제자 김우옹(1540~1603)에게 방울(성성자惺惺子-마음을 경계하는 뜻을 가진 맑은 소리를 내는 방울)을 주면서 《중용》의 말씀을 전한다.

”남들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에라도 그것을 하고, 남들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에라도 그것을 한다.” 군자는 하루 종일 부지런히 힘쓰고 여전히 허물이 있지 않는가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명 조식(1501~1572) / 사진출처=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평상심을 선의 경지로 강조했던 조주(778~897) 선사는 “일곱 살 된 아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나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청할 것이며 백세의 늙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쳐 줄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얘기는 당송팔대가의 문장가 한유(768~824)의 <사설師說>에도 보인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도를 깨우침이 나보다 앞선다면 나는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비록 나보다 뒤에 태어났다 해도 나보다 먼저 도를 깨우쳤다면 그 또한 스승으로 모실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니 어찌 스승의 나이가 나보다 많고 적음을 따지겠는가. 그러므로 스승으로 섬기는 데는 귀함이 없고 천함도 없으며 나이가 많고 적음도 없다. 오직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는 것이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가. 스승과 제자는 교학상장敎學相長한다. 《예기》의 말씀이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동행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가르치며 배우고 서로 성장한다. 《시경》 <열명>에서도 유효학반(惟斅學伴)이다. 가르치는 것이 배움의 반이다. 그래서인지 이탁오(1527~1602) 선생은 스승과 벗의 경계를 허물고, 사우師友라는 둘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고 강조한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참다운 벗이 아니다.”

이탁오(1527~1602) / 사진출처=현자들의 평생공부법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살이 모두가 스승이고 배우는 것이다. 이른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의 가르침이다. 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스승을 찾을 수 있다. 보이는 것, 만나는 모든 것이 스승이다. 세상을 살면서 나쁜 본보기나 사람, 일을 본다면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된다. 보는 눈이 밝다면 세상의 선善도, 악惡도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않는 사람을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하리라.”고 경계했다.

‘경영의 신’이라는 칭송을 받은 마쓰시다 고노스께(松下幸之助, 1894~1989)의 회고다. “나는 하늘로부터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 것 3가지 은혜를 받았다. 가난 때문에 부지런해졌고, 허약한 몸 때문에 건강에 힘썼으며, 초등학교 중퇴 학력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모두 스승으로 여겨 배우는 데 애썼다.”

오래 전의 스승과 제자들은 하루 종일 부지런히 힘쓰고 저녁에는 여전히 허물이 있지 않은가를 항상 두려워했다고 한다. 증자曾子는 말했다. “나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과 일을 하면서 충실히 했던가. 친구들과의 사귐에 있어 신의를 잃지 않았던가. 배운 것을 내 것으로 익혔는가(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信乎 傳不習乎).”

아아, 나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누군가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지 못해 나는 참으로 부끄럽고,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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