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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5. 18, 그들은 왜 피를 흘리고, 민주화를 외쳤나5.18 민주화 운동, 신군부 집권 음모 규탄·민주주의 실현 요구

[공감신문]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한 민중항쟁을 의미한다.

5.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에 따르면 공식 피해자는 사망 154명, 행발불명 70명, 상이 3193명, 기타 1589명이다. 이토록 많은 사상자를 낸 518 민주화 운동, 그들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민주화를 바랬을까?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배경으로는 유신체제에 이은 신군부의 등장이 꼽힌다. 유신체제와 신군부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유신 체제

유신 체제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별칭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립한 공화국을 의미한다. 유신이란 유교 용어다. 새로 고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신체제는 유신독재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운데)

당시 정권 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박 전 대통령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한 특별선언을 통해 비상조치를 발표한다. 이후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제정,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한다.

유신헌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률유보조항을 통한 국민기본권의 대폭 축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에 의한 국회의원 3분의 1 선출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 등 대통령에 초헌법적 권한 부여 ▲6년 대통령 임기 연장과 중임제한조항 철폐로 대통령 권력 강화 ▲국회 권한 약화 ▲사법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정치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위원회로 변경 ▲법관의 대통령 임명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선거 실시

유신체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이 모두 대통령에 집중됐다. 헌법에 명시된 3권 분립을 무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독재 정권이라는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 이를 통해 일부 대기업은 성장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악화됐고, 빈부 격차 문제도 심화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카드섹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민주정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의 반발과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일부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을 조직해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벌였다. 제19대 대통령인 문재인 대통령도 유신 체제에 반발해 학내 시위를 주도한 바 있다.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해 강하게 저항했다. 일부 정치인과 종교인도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 독재에 저항했다.

유신 체제 종말은 부마항쟁에서 시작됐다. 이는 경남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독재 저항운동이다. 부마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항쟁에 대한 처리를 두고 입장차를 보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차지철의 계획을 채택, 부마항쟁을 강하게 진압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1979년 김재규는 10월 26일 청와대 부근 궁정동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을 총격 살해한다. 유신 체제는 박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총을 들고 있는 김재규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 살해 재판 최후 진술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회복. ▲국민 희생 방지 ▲독재국가 불명예 해소 등을 암살에 대한 이유로 설명했다.

유신 체제가 끝나고 국민들은 진정한 민주주주의가 실현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기대는 모래성 무너지듯 허물어진다.

◆신군부 등장

김재규의 박 전 대통령 암살 후인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주축이 돼,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군부가 아닌 민주 정권을 염원했던 국민들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군부란 군사정부의 약어로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인들이 다스리는 정부다.

김재규 암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며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쿠데타가 끝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 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재가(裁可)없이 진행됐다. 이 때문에 전 전 대통령 세력은 사후 재가를 위해 국방 최 전 대통령에 압력을 가한다. 결국 재가를 받은 전 전 대통령의 신군부는 국가의 핵심직책을 차지한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실시한다.

이 같은 상황은 또 다른 독재의 시작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이 전국으로 확대한 비상계엄을 계기로 5.18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다.

◆거듭 된 군부와 독재를 막기 위해 민주화를 외치다

1980년 5월 10일, 전국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 해제’, ‘전두한 유신잔당 퇴진’ 등을 요구하는 거리시위를 계획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맡고 있던 전 전 대통령은 해당 소식을 접하고, 북한의 남한 침략 조짐을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린다.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국민들도 더 거세게 민주화를 요구한다. 야당 정치인도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으로 이들의 요구에 답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신군부는 계엄령 확대로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연금·구금한다. 아울러 국회를 비롯한 대학, 정부기관,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5월 14일, 광주 전남대학교 등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도 거리시위가 벌어진다. 이들은 거리에서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등을 외쳤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운다. 학생들이 거센 항의가 이어지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한다. 이를 보고 계엄군을 제지한 시민들도 폭행당한다.

민주화, 계엄 철폐, 유신세력을 척결하란 요구의 답은 계엄군 증파였다.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한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저항은 더 극심해진다.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19일 오후 4시 30분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5월 21일 오후 1시경,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으로 집결한다. 시민들과 대치하던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심지어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젊은 부부가 금남로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 5.18 기념재단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들도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한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로 무장한다. 이들은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계엄군과 공방을 벌인다.

결국, 오후 5시 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한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에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군은 도청으로 계엄군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는다. 이들은 도청을 떠나면 ‘군부 독재 세력에 굴복 한다’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새벽 4시경, 도청에 도착한 계엄군은 도청을 점령한다.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 5.18 기념재단

5.18민주화운동은 첫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5·18특별법으로 제정된다. 아울러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 등 92명은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 받는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5.18민주화운동을 비롯해, 많은 국민들의 항쟁으로 얻은 결과물이다. 그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유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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