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두 사람이 술잔을 마주하니 산에 꽃이 피네. 한 잔, 또 한잔, 다시 또 한잔.) / 이백 <산중대작>중에서

[공감신문] 죽겠다, 죽을 것 같다.
내 지인들에게 이 말을 문자메시지로 보내면 거의 한 가지 반응일거라 감히 예상해본다. 무슨 일이냐며 놀라서 전화 하지 않겠냐고? 아니, 그들은 나에게 하나같이 이렇게 답장할 것이다.
‘어제 얼마나 마셨냐?’

그렇다. 나는 애주가다. 술을 즐겨 마신다. 주종과 안주는 가리지 않지만 술집과 같이 마시는 사람은 좀 따진다. 화장실이 가게 내부에 있으며 사람이 적고 프라이빗한 술집을 선호하고, 웬만하면 친하고 편한 사람들하고만 마시고 싶어 한다. 아빠와도 술잔을 자주 기울이는 편이다. 물론 누구나 술을 마시면 갖게 되는 ‘이불킥’할만한 에피소드는 나도 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 것뿐이다. 다행히 나쁜 주사酒邪도 없고 큰 사고를 친 적 없으니 지금처럼 적당히(?) 즐기면 되겠다, 싶은 거다.

예전에 <라디오스타>에서 빅뱅 탑이 이런 얘길 하더라. 자신은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자신이 만날 여자 분은 술을 안 드시는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왜냐하면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보니 추억이 없더라는 거다, 맨날 술만 마셔서. 나 역시도 술 좋아하는 사람이고, 술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었다보니 조금은 공감이 가는 것도 같았다, 정말 조금. 난 오히려 여행지에서 마신 한잔, 이런 걸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는 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술을 안마시고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했으면 또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아예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음, 뭔가 무서운 기분이 들 것 같다. 나 혼자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이성의 끈이 느슨해지니 말이다. 다음 날, 날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씨익’ 짓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이런 생각이 스치겠지. ‘나만 쓰레기야?, 나만 바보야?’

20대 후반이 되니 사람, 특히 ‘남자’를 만나는데 겁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더 신중하게 되는 것 같다. 사회적인 능력 같은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조건보다는, ‘나’에게 어울리는 조건들을 보게 되더라. 나는 이것저것해서 돈 버는 능력이 좋은 사람보다야 그저 한 우물을 파는 외골수들을 오랫동안 리스펙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외모! 아, 상당히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외모를 더 따지는 것 같다. 처음보아도, 오래보아도, 심지어 딴 여자들이 보아도 사랑스러웠으면 좋겠다. 성격은 까칠해도 되는데 유머코드는 맞아야한다, 학력은 중요치 않은데 사고가 유연해야한다, 춤은 못 춰도 리듬감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어느 정도 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TV를 보다보면 술 마시는 남편 혹은 아내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난 나중에 술을 안 마시는 남편을 만나야하나?’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저들은 술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일이나 가정을 챙기기보다, ‘음주’가 우선이고 술에 의존을 해서 그런 거 같다고 감히 예상한다. 술을 끊는다고 일상이 바뀔까? 아니, 일상을 외면하고 도피할만한 다른 것에 또 의존할 거다. 술보다 자기 일, 술보다 자기 사람, 술보다 자기 주변, 술보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알며, 그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들은 단언컨대 충분히 절제가 가능하다. 어떤 배우들은 작품에 들어가면 다이어트를 위하여 금주禁酒를 하고, 또 작품이 끝나면 어마어마하게 마시는 걸 봐라. 자기 일에 열정이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술 탓만 할 건 아니다. 난 앞으로도 술을 어느 정도 적당히 즐기는 사람을 만날 생각이다. 오히려 술을 안 마시는 것보다 술을 좀 마시는 게 더 낫다는 생각까지 한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 특히 남자를 보면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럼 도대체 뭐로 풀고 사세요?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그냥 심심풀이 농담 따먹기로 코 빨간 애주가가 묻는 시답지 않은 질문이 아니란 말이다! 정말 인간들은 풀고 살아야한다.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시민인 당신과 나는, 원래 사실 엄청 원초적이고 ‘더러운’ 인간들이었다. 사실 ‘더럽’다는 것도 더러운 건지 예전엔 몰랐다. 사회 속에서 자라면서 더럽다고 학습되어진 것이다. 원래 우린 더럽고 타락한 인간들이었다. 타락墮落. 떨어지고 떨어진다는 뜻이다. 아니, 원래 우린 떨어져있던 존재들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썩은 과일과 동물들의 배설물이 뒤섞인 더러운 땅바닥에 굴리고 굴려져서 이미 오물이 가득 묻은 존재들이라는 거다.
인간人間, 사람 인/ 사이 간, 사람과 사람 ‘사이’. 이렇게 사람 사이에 살기 위하여 우리는 더럽고 타락한 모습들을 감추며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이. 훈련되어지고 학습되어진 결과다. 당신의 부모들은 뱃속에 잉태된 당신에게 차분한 음악을 들려주며 ‘창의적’이며 ‘착한’ 아이가 되길 바랐을 것이다. 정말 이기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음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야 이 사회에서 적응하기 쉽다며 미리 길들여주는 걸 수도 있고. 뱃속에서 어머니가 틀어주는 슈베르트를 들으며 <송어>처럼 유연한 몸으로 자신의 성기를 빨고 있는 태아는 알지도 못한 채.

(미켈란젤로 <인류의 타락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난 성악설(性惡說)을 믿는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잉태된 순간부터 길들여지기 전까지의 행동들이 지극히 그러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위에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의 성기를 빤다. 성적 욕망의 표출이다. 성기를 자극하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이미 안다. 이후에도 이런 본능은 어디 가지 않는다. 단순히 사춘기 때에 성적인 욕망이 더욱 불끈해지는 게 아니다. 프로이트의 심리적 성격발달단계에서 ‘남근기’에 해당하는 3-6세 때 우리의 리비도(libido: 본능적인 성 충동, 성 욕망)는 성기에 집중이 되고, 성기를 자극하거나 타인에게 보여주는 데에서 쾌감을 얻는다고 한다. 남자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거세 불안)를 가지며 여자 아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남근선망)를 경험하게 된다는 거다. 이후에 잠복기를 가지다가 다시 사춘기에 이런 욕망이 강하게 발현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아기일 때 배고프면 꺼이꺼이 울어댔었다. 그게 아기의 의사소통 방식이라서 그렇게 울었던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린 진짜 슬펐던 거다. 영아기의 우리는, 세계와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즉, 나 이외의 외부 대상이 없다는 거다. 아직 ‘자신 이외’까지 인지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배고프면 세상도 모두 기근에 시달린다고 생각한다. 대소변 때문에 엉덩이가 짓무른 느낌이 들면? 온 세상이 악취로 가득 쌓인 기분일 것이다. 모태에서 최적의 환경에 놓여있던 아이는 때론 춥고 배고프고 더럽고 피곤한 이 세상을 경험하며, 이러려고 세상에 태어났나 자괴감이 들 거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 눈에 봐도 익숙한 몸을 가진 저 여자(모태, 엄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날 보며 태연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가지는 최초의 배신감일 것이다. 당신과 나는 다른 존재구나. 우리는 심리적 전조작기인 7세까지도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인지한다. 그저 점점, 알게 되는 것이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딱 그 짝인 거다.

이렇게 본능에 충실했던 우리는, 더럽고 타락했던 우리는, ‘훈련’되어 지며 이것들을 억제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에 따르면 전인습적 수준이던 10세까지, 우리는 처벌과 복종, 상대적 쾌락주의에 의한 욕구 충족을 지향한다고 한다. 그러니 저 친구를 때려서라도 장난감을 뺏고 싶고 내가 쟤네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던 거다. 인형 놀이를 할 때도 내가 공주 역할이나 엄마 역할을 해야 했던 거다. 그러나 약 10세 이후 인습적 수준으로 올라오면, 우리는 알게 된다. 계속 그딴 식으로 굴면 친구가 날 싫어한다는 걸. 사회적인 동물이자 외로운 인간인 동물들은 ‘잘 살기 위하여’ 대인관계 스킬을 익히기 시작한다. 조화롭기 위하여 좀 착해지기로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만 양보하기로 한다. 그리고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하여 질서같은 것도 따르기도 한다. 이게 인간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인간은 사실 속으론 몹시 슬플 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도 동물이었던 걸? 발정기에 아무데나 성기를 비벼대는 강아지를 보며 우리는 마치 몹시 더 나은 존재들이라며 군림하듯 걔네들을 비웃지 마라. 길들여지지 않아도 될 동물들에게서 살아갈 터전을 빼앗고는, 치사하게 간식으로 걔네들을 길들이려고 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옳지, 착하네!’라면서. 그래, 차라리 그렇게 당신 옆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지 않은 동물들보다야 행복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렇듯 도덕성의 ‘발달’을 거치며 욕망을 억제해 온 것이지, 아예 없어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들도 어느 정도 표출될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나! 아니라면 어느 순간 폭발해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오히려 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시면 우린 살짝 흐트러지게 된다. 흐트러진다는 것은 훈련되어진 ‘착한 시민’의 모습을 조금 내려놓는다는 거다. 매력적인 이성에게 말도 더 쉽게 건넬 수 있게 되고, 참아왔던 음식도 더욱 당기게 되고, 말투도 조금 세어지고, 감정적이 되어 슬픈 음악에는 더욱 잘 젖게 된다. 때로는 못 참겠다며 누군가의 건물에 오줌을 갈겨댄다. 화나면 화도 낸다! 술 먹으면 진상? 아니, 우리들은 원래 진상이었다.
술을 함께 진탕 마셔보면 저 사람이 저렇구나, 하게 된다. 그런데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의 ‘진상’은 도대체 어디서 ‘진상’파악을 할 수 있는 거냔 말이오?

정말 내가 가진 선입견일 수 있는데, 다른 무언가로 풀 거라 생각한다, 아니 풀어야 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는 걸로 푸는 내 입장에서는, 다른 방식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반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왜 저렇게 풀고 살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몸에서 알코올이 아예 안 받아서가 못 마시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안 마시는 사람들일 경우에 더욱.
난 내 방식으로 같이 풀어질 사람이 그냥 더 좋다는 거다.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쓸까 말까 망설인 거지만 써보겠다. 20대 초반에 ‘내 남자친구는 술 안 마셔’라고 말하는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와, 네 남자친구는 진짜 착하구나 라고 말했었다. 어렴풋이 10대 때부터 술은 좋은 건 아니라고 들어왔으니까. 그래서 걔네가 정말 좋은 남자, 착한 사람을 만나는 구나,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 남자애들은 다른 걸로 그 억제된 욕망을 풀더라. 그 모습이 당시 나에겐 굉장히 폭력적으로 비춰졌었다. 이후부터 궁금해졌던 거다. 다들 ‘풀고’살아야 하는데 술을 안 마신다면 무엇으로 푸시는 지요? 물론 술을 안 마신다고 다 저러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 중 하나인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는 마치 성악설의 표본 같은 느낌이며, 그 나이 먹고도 별로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거의 화학적 거세를 당한다. 거세뿐인가? 손도 못 쓴다. 알렉스가 어느 순간 갇혀버린 세계 속에서는 그의 본능적인 행동을 마치 병적인 것처럼 취급한다. 손과 발, 성기가 모두 묶인 알렉스는 쌔끈한 여자의 나체를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몸이 착해 진’ 알렉스는 마지막에 화끈한 섹스 장면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며 이런 대사를 던져버렸지!
“난 치유되었어!”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중에서)

진탕 마셔볼 것이다. 알고 싶은 남자와 오래보고 싶은 친구들과 앞으로도 주구장창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가족들과의 술자리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래왔듯이, 그들 앞에서 이성의 끈을 잠시 풀 것이다. 이러니까 친한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더욱 편하다는 거다!
단, 자기 자신보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표출뿐인 사람이 아닌가? 억제됨이 없는 표출뿐인 인간은.......... 아, 미안하지만 개랑 고양이도 길들여서 사는 마당에, 하물며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길들여져야 같이 놀고 지내기에도 알맞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열심히 벌어서, 맛있는 술과 안주를 사 먹는 일을 유쾌하게 해도 좋다는 거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우리 아빠가 그러시더라. 남자를 볼 때, 그에게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특히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게 필요하다고. 1번 건강, 2번 취미, 3번 술 친구. 에라이, 난 남자로 태어날 걸 그랬나.

죽겠다, 죽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메시지에 ‘어제 얼마나 마셨냐’는 답장이 오는 유쾌하고 축제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뭐,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 때에도 함께 술잔을 기울여주는 누군가들이 존재할 테지만.
그러니까 오늘도, 맛있는 거에 한잔할까?

(img via 영화, 명화 외 필자 개인 소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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