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탐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묘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머나먼 옛날,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를 바닷길을 떠나 신대륙을 발견하거나 고대 문명의 유적지를 탐사했던 그들은 우리 마음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모험심을 자극한다.

우주로 나가서 지구를 관찰할 수 있는 시대가 오다 보니 지구상에 탐험할 미 개척지가 남아있을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그러나 세간에 ‘지구상에 더 이상 탐험할 곳은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세계 곳곳을 누빈 탓(덕분)에,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개척자’가 되어 깃발을 꽂을 땅은 없다는 얘기다. 이제 인류가 개척해야할 미지의 영역은 해저, 우주 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을 탐험하며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감포스트는 탐험에 대한 로망을 담아 실존했던 탐험가들을 조명해봤다. 우리가 당장 배를 타고 드넓은 바다로 모험을 떠날 수는 없지만, 세계 곳곳을 누볐던 역사 속 탐험가들의 일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껴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울러 다음 편에서는 영화나 게임 속에 등장했던 매력적인 모험가 캐릭터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 세계를 일주했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16세기 영국인들의 영웅이자 영국을 해가 지지 않게끔 하는 초석을 마련한 장본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6세기 영국 사람으로, 스페인 제국의 화물선을 습격해 재물을 약탈해 스페인으로부터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그러나 약탈한 재물의 일부를 왕실에 바치는 사략 활동으로 영국 국민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특히 1850년에는 마젤란 해협을 거쳐 바닷길로 세계일주를 성공했는데, 이것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큰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영국은 스페인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그 시기 스페인 화물선을 빈번하게 약탈했는데, 그의 사략 활동에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던 스페인 제국은 영국 측에 제지(처형)를 요청했다. 기자는 제지(처형)이라 표현했지만 실제 스페인 제국의 요청은 ‘드레이크를 죽이지 않으면 영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식의 협박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해군 함대는 '무적함대'라 불릴 만큼 제국의 뛰어난 전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그를 불러들여 기사 작위를 내린다. 이후 그는 영국 함대의 지휘관이 돼 스페인 제국 해군과 수차례 전투에 임하게 됐다. 그 중에는 스페인 제국의 영국 침공 계획을 저지했던 ‘카디스 기습’, ‘칼레 해전’ 등이 유명하다. 드레이크의 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스페인 제국은 이후 해양 강국의 자리를 영국에게 내주게 됐다. 이것은 그가 스페인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천인공노할 원수지만, 영국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는 원인이 됐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

사략 해적으로 활동하다가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나아가 함대 지휘관이 되는 등 의 일대기과 더불어 주목받는 것은 바로 ‘학살, 강간, 고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대중문화 속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는 1596년 이질로 병사했으며,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토벨로 부근 바다에 수장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다이버들이 그의 관을 찾고 있다고 알려졌다.

 

■ 탐험가 에리크손의 유적을 발견한 잉스타드 박사

레이프 에리크손과 바이킹 동료들이 '빈란드'로 항해하는 모습의 상상도. [웹사이트 캡쳐, 크리스티안 크로그作 1893]

흔히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알고 있다. 그런가하면 콜럼버스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모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사실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던 최초의 유럽인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바이킹 ‘레이프 에리크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에리크손은 그린란드를 발견한 ‘붉은 에리크(Erik the red)’의 아들로, 부자가 모두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게 된 흔치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비야르니 헤르욜프손’이 우연히 발견했다는 ‘마크란드(Markland, 나무가 많은 땅)’와 ‘헬룰란드(Helluland, 평평한 바위 땅)’의 소문을 듣고 서기 1000년경 30여명의 바이킹 동료들과 항해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 시애틀에 세워진 레이프 에리크손의 동상. [웹사이트 캡쳐]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한 에리크손과 동료들은 그곳을 ‘빈란드’라 명명했다. 이후 에리크손의 이야기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를 ‘빈란드 사가’라 부른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구전을 근거로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다고 믿었으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데다 그 전설 속 ‘빈란드’가 아메리카 대륙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빈란드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면, 빈란드 사가 역시 전설일 뿐이라 치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미국 동해안 어딘가에 빈란드가 존재할 것으로 여겨 그곳을 탐험했다. ‘빈’이라는 단어가 ‘포도’를 의미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포도가 많이 나는 곳을 점찍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빈란드의 유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노르웨이의 탐험가 헬게 잉스타드 박사는 ‘빈’이 바이킹 말로 포도가 아닌 ‘풀’이라는 생각과 다른 몇 가지 근거를 이유로 캐나다 동해안의 래브라도 반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탐험가 '헬게 잉스타드' 박사에 의해 발견된 빈란드 유적. [웹사이트 캡쳐]

결국 1960년 그는 래브라도 반도 근처에서 레이프 에리크손과 바이킹들이 도달했던 빈란드의 유적지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저명한 고고학자와 박물관으로부터 그곳이 정말 바이킹의 유적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 인디아나 존스 박사의 모델, 로이 앤드루스

'가장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꼽히는 캐릭터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라 알려져있는 탐험가, 로이 앤드루스.

영화 ‘인디아나 존스’는 고고학박사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과 탐험을 다룬 히트 영화 시리즈다. 시리즈 첫 영화는 1981년 개봉했는데, 고고학자로서 유적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모습보다는 악당과 싸우거나 함정을 벗어나는 등 모험 액션의 요소가 강했다. 그런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은 미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로이 앤드루스’라고 알려져 있다.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는 공룡 화석 등을 수차례 발견하는 등으로 당대 최고의 고고학자라 불렸다. [웹사이트 캡쳐]

로이 앤드루스는 20세기 초반의 고비 사막과 몽골, 중국에 대한 탐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로 공룡 알 화석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1912년에는 귀신고래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의 울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발견은 주로 공룡 화석 등으로, 공룡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화 주인공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각종 화석(주로 공룡)을 발견하거나 박물관으로 보내는 등의 과정에서 고래, 상어, 뱀이나 늑대 등 야생동물은 물론이고 도적이나 중국 병사에게까지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나치, 광신도 등에게 쫓기며 액션 장면을 연출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는 탐험과 발굴 과정 중 실제로 도적이나 야생동물들로부터 여러 번 습격당했었다고 한다. [웹사이트 캡쳐]

로이 앤드루스는 이후 1930년 말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관장으로 취임해 41년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더글라스 프레스톤은 앤드루스에 대해 “유명한 탐험가, 공룡 사냥꾼, 명사수, 몽고 산적과 싸운 전사”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실로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고고학자 겸 탐험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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