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충남홍성군서부면 궁리포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더욱 한적하고 평화로운 정취를 보이는 작은 어촌이다. 서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넉넉한 갯벌은 눈앞 저 너머에 수 백m에 이르도록 길게 펼쳐져 있다. 갯벌은 짙어서 한 폭의 잘 그린 유화를 보는듯한 매력적인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작품 <절규>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바다에 대한 상념은 그의 뛰어난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심해深海처럼 깊고 놀랍다. 

“여기 해변에서 나는 나 자신, 내 삶의 이미지를 발견한 느낌이다. 해초의 기이한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그 여자를 떠올린다...짙푸른 바닷물에서는 그 여자의 눈빛을 본다...삶은 대기의 투명한 빛을 반사하는 조용한 수면과 같다. 수면 아래 깊은 곳은 질척이는 진흙이 있고 기어 다니는 생명체가 있는 죽음과 닮았다. 바다와 나는 서로를 이해한다. 아마 바다만큼 나를 잘 이해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궁리포구 전경 / 충남 홍성군 블로그

해변이나 포구에서 바다와 갯벌을 만난다. 다소 탁한 느낌의 생선 비린내까지도 크게 반갑다. 초여름 바다는 내내 상쾌하고, 긴 해안도로는 그 먼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안을 걷는 일이 마치 은빛 파도 위에 선 기분이다. 

물 빠진 갯벌에는 갈매기 떼가 모여 먹이를 찾고, 짝을 지어 노래한다. 이런 ‘분위기의 올레길’이 어디에 있다고 할 것인가. 혼자의 산책길도 고독하지 않다. 갈매기들이 나그네를 호위하며 그 영공 주위에서 합창을 한다. 분에 넘치는 호사스러운 순간이다. 새소리와 파도소리는 또 사색으로 이어지고 어우러져 바닷길은 싱그러운 치유와 질박한 명상의 길이 된다. 포구 왼 편 앞쪽, 저 멀리 반도가 병풍처럼 펼쳐진 이곳의 바다는 매우 특별한 지중해地中海다. 하늘과 땅에 연한 바다는 마치 산중의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하다,

바다, 갯벌, 새들...천혜의 자연이 함께 하는 풍경에서 그래도 어딘가에 남아있을 그리움을 추상한다.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철새들의 화려한 군무도 보인다. 바다는 팍팍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참으로 맑은 인연과 감동이 약동하는 생명과 기적의 현장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바다와 포구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D.쿠스티스 작사, E.쿠스티스(1875~1937) 작곡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Surriento)>

바다에서 보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바다에서는 태양까지도 친구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상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바다는 아름답다. 일출과 일몰 때, 푸른 바다가 황금빛으로 보이거나 붉은 루비 빛으로 빛날 때, 우리는 황홀했다. 찬란한 바다, 비가 그치고 나서 바다 위에 거대한 무지개가 떠 있는 바다, 무지개 뜬 바다는 신비하고 장엄했다. 아마 천국이 그럴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크게 펼쳐진 무지개를 두고 그 사이의 바다를 한 마리 큰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을 상상한다. 산들바람 불었던 어느 여름날 오후, 소낙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난 뒤, 두 개의 무지개가 뜬 바다 사이의 창공을 날아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바다와 무지개 사이의 힘차고 화려한 비상은 언제나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서해 일몰 / 충남 홍성군 블로그

아주 늦은 오후, 서해의 바다, 일몰日沒은 성스럽고 황홀한 순간이다. 어두워지는 바다에 빠지는 태양은 장엄하다. 온 누리에 앉은 붉은 석양은 깊고 고요해서 감동적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석양의 신비와 영원을 선물했다. 

바다에서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조용한 바다는 고향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조용하고 밀물은 선명하게 차오른다. 갯벌을 새로 채우는 바닷물의 빛깔은 한층 더 푸르게 보인다.바닷가에서 나그네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시인은 바닷가에서 또 노래한다. “그대들이 찍은 사진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고, 세월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죽이지 말며, 발자국 빼고는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오직 사랑만 남겨 놓고 갈지어다.”

아직도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억하고 있다면 그대는 바다를 찾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잊고, 또 잃어야 했고, 오가는 포말처럼 허망하게 살아가는 그대는 바다로 가야 한다. 우리는 너무 늦게 만났거나, 또는 너무 겁이 많은 어릴 때, 서로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닌지.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또 끝이 났다. 이제는 늙고 초라해져 아무 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다는 쓸쓸한 생각이 들 때도, 바다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었고 또 마지막 간이역이었다. 

또다시 저녁노을에 흔들리는 바다를 지나 겨울철새들이 날아가듯이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얀 파도에 울고, 붉은 석양에 쓸쓸히 기울어진 포구에서 나는 새처럼 못다 부른 그 이름과 고향을 끝내 유영하나. 푸른 생선처럼 파도 색깔은 선명하게 짙고 갯마을의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인다. 고요한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별빛처럼 우리 욕망과 사랑은 오열처럼 결코 잠들 수 없을 것인가.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행운아였고 만남의 귀항과 헤어짐의 출항을 기다리는 선장이었다. 바다와 등대, 포구. 그리고 인생과 운명.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 때도 바다는 돌아가야 할 그리운 보금자리였다. 그 바다는 세상을 끝내 버리고 살았던 어떤 외로운 등대지기가 지키는 바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억이 침전처럼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곧 당신은 바다를 건너가겠지요./당신이 돌아올 때,/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당신이 떠나있는 동안/오, 제발 나를 기억해 주세요.”

한없이 빛나던 젊은 날의 사랑과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리스 에게 해海의 푸른 청춘과 낭만을 노래한 영원한 디바(diva) 나나 무스꾸리(1934~)의 명곡, <이제 그 시간이 되었네(Now is the hour)>다.

나나무스 꾸리

《갈매기 조나단》. 전직 비행사였던 작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가 1970년 발표한 우화 형식의 소설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남다른 비행을 통해 자유와 이상, 자아의 완성과 초월을 추구하고자 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길을 묻는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갈매기 조나단에게-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
(The gull sees farthest who flies highest)’는 말은 널리 알려졌다.

갈매기는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축복으로 선원들이 매우 좋아하는 새다. 선원들은 오랜 항해 중 갈매기가 보이면 육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갈매기는 또 물고기 무리, 어군魚群을 발견해 어부들에게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텃새다. 잠시 소풍을 나온 세상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아 우리에게 눈물을 짓게 만드는 천진무구했던 시인 천상병은 <갈매기>에서 노래한다. “그대로의 그리움이/갈매기로 하여금/구름이 되게 하였다./기꺼운 듯/푸른 바다의 이름으로/흰 날개를 하늘로 묻어 보내어...”

갈매기 조나단

흰 갈매기들은 색채 선명한 바다 위에서 그 어렵다는 정지비행을 쉽게 하고 때로는 글라이더처럼 미끄러지면서 선회를 자유자재로 한다. 부러운 일이다. 우리는 왜 푸른 하늘을 나는 새가 되지 못하고 어두운 땅을 기어야 하는 인간이 되었는가. 평생을 바다에서 사는 갈매기는 행복한 새일 것이다. 갈매기가 은빛 화살처럼 활공을 하면, 덩달아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된다. 갈매기가 먼 여로를 마치고 해안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상상한다. 바다와 하늘에 관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갈매기들은 때로는 먼 바다의 기쁜 소식도 전해 주었고, 깊고 푸른 밤을 헤엄치는 고래의 자유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갈매기들은 항해하는 많은 배들을 보았다. 여객선, 벌크선, 원목선, 유조선, 컨테이너선... 항공모함까지도. 갈매기들은 갑판에서 많은 선원들을, 해군들과 해적들을, 때로는 무참한 익사자와 절망하는 조난자들을 수없이 보기도 했다.

갈매기는 이제 저 멀리 수평선을 응시한다. 아마 우리가 끝내 갈 수 없었던, SOS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바다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갈매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한다. 바다는 언제나 우리를 사색하고 명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 앞에서 더 현명해지기도 한다.

한편 5월31일은 바다의 날이다. 현재의 우리 바다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밀려드는 쓰레기와 적조로 인한 연안의 오염, 기름유출 등의 해양오염 증가 등으로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다. 바다를 사랑했다는 바다의 날이 무색할 지경이다. 바다는 지구 표면적의 71%를 차지하고 지구 생물의 90% 정도가 서식하고 지구생태계의 63%를 차지한다. 지구의 산소 중 75%가 바다에서 생성되고 이산화탄소의 50%가 바다에서 정화된다. 지구地球라는 표현보다 수구水球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세계의 열강은 글로벌 존이라는 바다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바다에서 새로운 자원, 식량, 에너지, 환경, 공간을 확보하려는 해양강국들의 관심과 이해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세계 각국은 바다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보고 바다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해양 과학기술 경쟁을 뜨겁게 전개하고 있다. 거의 무한한 자원의 보고寶庫-바다는 인류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지구상의 마지막 개척지로 블루오션으로 판단된다.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국운을 열고 국가의 역량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다는 것은 세계사가 보여준 교훈이다. 교역과 지배를 통한 유럽의 해상 팽창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반면에 명나라 정화함대의 대원정(1405~1433) 이후 중국의 해상후퇴는 국가적 비극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에게 해의 그리스, 지중해의 카르타고, 천년제국 로마는 해상을 장악했기 때문에 세계 일류의 문명국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 대영제국 등은 지리상의 대발견(The Great discovery) 시대에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정복을 통해 국부를 증가시키고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영예를 누렸다.

알프레드 세이어스 머핸 / 위키피디아

미국을 해양국가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 《역사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의 저자 A.T 머핸(1840~1914)제독은 남북전쟁 이후 국가적 위기에 빠진 미국의 돌파구로 해군력과 해운력(상선대, 함대, 해외기지, 석탄보급항 등) 증강을 통한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주장, 오늘날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부론의 저자>이자 경제학의 아버지 영국의 아담 스미스(1723~1790)는 해양무역이 대륙무역보다 유리하고 해안선이 길고 강이 많은 국가가 국부를 쌓는데 더 유리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국토의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해안선은 약 11,542Km로 중국의 10,800Km, 일본의 13,000Km에 뒤지지 않고 3,153개의 도서를 보유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어 해양강국으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국토는 중국이 50배, 일본이 4배지만 해안선의 길이는 큰 차이가 없다.

2013년 바다의 날 행사 / 연합뉴스

한때 우리나라는 조선 수주 세계 1위, 항만처리 능력 세계 5위, 국적선 선복량 세계 8위 등 세계 초일류 해양국가가 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자랑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역사적으로 해양 진출이 개방적이고 활발했을 때 국력이 융성했던 반면 해상진출을 포기했을 때 국가발전은 정체되고 한계를 맞았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육로나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원양遠洋의 길은 크게 열려 있다고 보인다. 올해 22회 바다의 날을 맞아 관계당국과 관련기업들의 심기일전과 새로운 도전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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