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올해는 전세계 곳곳에서 나라의 지도자가 바뀌는 격동적인 순간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한 나라의 수장이 바뀌고 나면 그의 부인도 덩달아 주목받게 된다. 퍼스트 레이디의 내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공감 포스팅팀이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던 전 세계 퍼스트레이디 5명을 모아봤다.  

■ 미국 제 42대 대통령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자 유리 천장 파괴의 아이콘. 미국의 제 42대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前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 그리고 최초의 미국 여성 민주당 대통령 후보이자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최다 득표자. 미국 역사상 2번째로 다득표-선거인단 패배의 주인공이 된 인물.

1992년,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영부인이 된 그녀는 조용히 대통령을 내조하던 기존 영부인들과는 달리 국민의료보험 개혁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했다. 힐러리는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의회에서 부결된다.

1998년에는 뉴욕 상원 의원 자리가 비자 민주당 권유를 받아서 상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녀는 득표율 55%로 상원 의원에 당선된다. 이 후 미국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2015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두 번째 대권 도전이 시작됐다. 최초의 여성 민주당 대선 후보로서 주목받는 만큼 여러 논란이 쏟아졌다. 특히 영부인이자 국무장관으로써 쌓은 인지도가 양날의 검이 됐다. 그녀는 지지층을 얻음과 동시에 반대파도 양산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성 정치계, 언론 및 연예계의 전폭적 지지와 대규모 자금 지원까지 받고도 도널드 트럼프에게 졌다. 심지어 전국 득표수는 트럼프보다 200만표 이상 많았다. 하지만 미국은 간접 선거-승자독식제고, 선거인단 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정말 충격적인 패배.

■ 미국 제 32대 대통령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영부인이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역대 영부인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나섰던 그녀는 당시 ‘공동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였다.

엘리너는 특히 차별 받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설득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옹호정책을 촉구했다. 이는 원래 공화당을 지지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민주당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4선 대통령이 됐다.

그녀는 루스벨트가 다리를 못 쓰게 되자 남편을 대신해 6500km를 누비며 대공황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 진척 상황을 점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남편을 정치적으로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신문칼럼을 통해 루즈벨트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직접 국제 연합 인권위원회 의장이 되서 세계인권선언 기초를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후 여성 지위 위원회 회장직도 맡았다.

■ 프랑스 21대 대통령 영부인 <다니엘 미테랑>

다니엘은 프랑스 역사상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부인이다. 하지만 결코 대통령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내조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은 아녔다. 그녀는 영부인이 아닌 사회당 당원이자, 제 3세계 지원자, 그리고 인권활동가였다.

그녀는 독일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17살에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최연소 활동가였다. 그 곳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 후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영부인이 되지만 ‘퍼스트 레이디’라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다니엘은 영부인이 된 후에도 인권 운동을 지속했다. 동남아에 학교 설립, 인도의 문맹퇴치, 멕시코 농민해방군에 대한 물적 지원, 탄압받는 쿠르드족 구호산업 등 전세계를 누비며 박해받는 이들을 도왔다. 프랑스 내에서도 소외계층 지원, 인종차별 대항, 불법체류자 지원 등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 프랑수아의 뜻과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내 불법 체류자 추방 정책에 맞서는 시위에 참여하거나,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등 종종 남편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2011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의 언론들은 ‘위대한 여인의 별세’, ‘활동가의 투쟁’, ‘사회에 참여한 퍼스트 레이디’ 등의 제목으로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했다.

■ 중국 7대 국가주석의 영부인 <펑 리위안>

중국의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노래하는 영부인. 중국에서는 시진핑 부인보다 국민가수로 더 많이 알려져 있을 정도. 현재 군 산하 가무단을 이끄는 인민해방군 소장(한국 기준 준장)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악명 높은 영부인 ‘장칭’으로 인해 영부인의 대외 활동을 곱게 보지 않았다. ‘장칭’ 이후 중국 영부인들은 알아서 외부 활동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진핑의 영부인 펑리위안은 이러한 전례를 벗어나 오히려 활동을 늘리고 있다.

그녀는 18세부터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산하 가무단에서 군 소속 가수로 활동했다. 이후 25년간 무대를 누볐다. 물론 그녀가 부른 노래의 90%는 공산당 업적을 찬양하는 선전 가요다.

그런만큼 문화 외교사절로서 시진핑을 내조하고 있다. 실제로 2009년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던 시진핑과 함께 방문한 일본에서 그녀는 일왕 즉위 20주년 기념으로 일본인 애창곡 ‘사계절의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 이 후 시진핑 측은 2주 만에 일왕 접견을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인기가수 출신인 펑리위안은 세련된 패션으로 중국 내 '펑리위안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녀가 착용했던 옷, 가방, 악세사리 등은 모두 완판될 정도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특히 그 모든 것이 다 중국 브랜드란게 밝혀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 아르헨티나 51대 영부인 출신 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이사벨 페론 이후 전 세계에서 2번째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경험한 인물. 이사벨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년도 못 채우고,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바 있다.

정치인 남편의 내조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여성 정치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실제로 산타크루스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여당 정의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나중에는 지방 주지사인 남편보다 전국적으로 더 알려진 정치인이 됐다.

2003년, 아르헨티나 제 51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녀가 남편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끝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됐다. 그렇게 영부인이 된 후에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의 정책 집행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나 뛰어난 언변과 능숙한 대인관계로 인기가 높았다.

다음 대선에서는 남편이 재선을 포기하면서 반대로 그녀의 당선을 돕는다. 이에 대한 논란도 있었으나 당시 키르치네르 부부의 인기가 높았던 덕분에 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크리스티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세계 최초로 부부가 연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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