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자살한다는 것은 ‘그저 바득바득 애써 살 보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 <시지프의 신화> 중에서

[공감신문] 누구나 인생에 있어 한 두 번씩 몹시, 벅찰 때가 있다. 견디기 너무 버거워서 정말 다 내려놓고 싶은 그런 순간들. 나 역시도 물론 그런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걸 잘 지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도 쓰고 있다. 잘 지나게 된 건, ‘그래, 희망을 갖고 다시 열심히 해보자!’며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금방 마음이 고쳐먹어질 정도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죽을지 고민을 하다 보니, 갑자기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난 죽으면 어디로 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을 받았으니 천국을 가려나? 아니면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가려나? 거긴 단테의 <신곡>의 인페르노처럼 고통스러운 곳일까? 그것도 아니면 어릴 때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것처럼 갓을 쓴 저승사자를 따라 망각의 강을 건너고 황천길을 먼저 걸으려나? 또 그것도 아니면 불교의 윤회사상을 따라, ‘자살’이라는 죄를 범했으니 모기로 태어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다 터져 뒤지려나? 정말 또 그것도 아니면 너무 억울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려나? 아니면 정말, 이렇게 다 끝이려나.
그랬다. 죽음 뒤, ‘사후세계’가 궁금해진 거다. 순간, 나는 내가 너무 우스워서 입가에 미소가 베어 나왔다. 어찌나 오랜만에 웃는 지 얼굴 근육이 어색해서 순간적으로 거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웃고 있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
‘결국 난, 죽은 이후에도 또 ‘존재 하겠다’는 거잖아...!‘
죽은 이후에도 ‘나’라는 그대로 이성을 가지고, 거기서 어떻게 존재해야할지 나의 거취가 궁금해졌던 거다. 맙소사. 아, 저....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말이지요..... 아직 가족들보다도 안 친한 예수님이랑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 전 피곤한 기분이 듭니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란 인간은 술 한 잔 같이해야 친해지는데 말이지.

아, 지금 이렇게 장난스럽게 글을 쓰는데 각설하고, 아무튼 결국 또 존재하겠다는 내가 정말 웃겼다는 거다. 난 이런 호기심과 사후에 대한 대비(?) 때문에 자살을 포기하게 됐었다.

(단테의 신곡. 도미니코 디 미켈리노 작. 1465)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후회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 사지까지 내몰고 간 그 문제를 만든 게 후회스러울 거라고? 아니 그거보다 더 큰 후회가 기다린다. ‘죽음’이 후회스러울 것이다. 아마도 천국에 가게 될 나는, 거기서 이 복잡하고 작은 세상에서 얻지 못했던 지혜를 얻을 지도. 여기선 못 보던 것들이 보이고,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이해가 되며, 인과관계를 알게 된다. 그러면 아마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내가 견뎌낼 수 있는 거였는데.’
평생 누군가를 가슴에 묻고 아파하는 사랑하는 사람들도 보일 거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우리 인류는 수많은 시간동안, 죽으면 망자는 ‘저기’에서 우릴 기다린다고 믿어 왔다.
그래, 다시 만날 거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엄청 슬퍼하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잖아!

‘존재한다’라는 말이 불편한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존재’라는 표현이 맞다. 왜? 우리는 사후의 세계에 가서 ‘생각’이란 걸 할 것이다. 당신은 쭈글쭈글하고 못생겼으며 잔뜩 수고한 뇌의 기능을 쉬게 하겠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이성을 가지고 저승에 갈 것이다. 그게 바로 영혼이다. 우리의 영혼은 ‘판단’이란 걸 한다. 즉, ‘생각’한다는 것이다. 옥황상제가 ‘네가 죽기 전 가장 잘한 일 하나만 말해보아라. 그걸 통해 너의 거처를 결정하겠노라!’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할 것이다. 생각한다는 건? 즉 존재한다는 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 신의 유무에 대하여서도 ‘존재’라는 말을 쓴다. 신이 존재해? 귀신이 존재해? 당신이 존재해? 물을 수 있다. 존재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가는 곳이 현실이고, 거기에 당신은 존재(being)하는 것이다.
그게 삶이랑 무엇이 다른가? 결국 당신을 사지로 몰고 간 그 어떤 문제에서 회피할 뿐, 이후의 존재로서의 시간들은 똑같거나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 문제는 물론 고통스럽겠지만, 감히 내가 누구 인생에 감 놔라 배추 놔라 할 일은 아니지만...... 아, 그것 때문에 죽는 건 좀 다시 생각해보시길.
그 문제를 피하느라 딴 세상에 가면 더욱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누군가가 보고픈 마음이 호수, 아니 우주보다 클 테고. 당신은 오해를 낳을 거고, 억울해질 거다.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불어만 가고 답답해질 거다. 그리고 또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다. 개똥밭에 구르면 씻으면 된다. 개똥밭에 구른 동영상을 SNS에 올리면 엄청난 ‘관심’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아니 심지어 개똥밭에 구를 일이 없다.
그 문제가 무엇이든, 그게 당장 해결이 어렵다면 차라리 그 문제에 적응을 하는 게 낫다. 인간의 적응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라서, 그 비관적인 상황에도 금방 자신의 삶을 맞추어 살 수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희망을 찾고,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간다. 불행한 삶? 아니다. 당신이 저 이의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판단하는 건 위험하고 어리석다. 또 모르지 않나. 그 불행한 삶을 위로해주는 어떤 누군가가 나타나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주고 있을지도. 오히려 그 문제가 두 사람의 사랑을 강력하게 묶어줄지도 모른단 말이지...?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겠다. 주인공 시지프는 인간이 더 이상 죽지 않길 원하여 죽음의 신을 쇠사슬로 묶는다. 하지만 죽음의 신은 빠져나오고 붙잡힌 시지프는 신들에게 엄청난 형벌을 받게 된다. 그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 시지프는 온 힘을 다하여 그걸 결국 산 꼭대기에 올려놓는 순간....! 바위가 밑으로 굴러 내려가는 게 아닌가. 맙소사. 모든 게 헛수고였나, 이렇게 부질없을 수가!
하지만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다. 시지프는 산에서 내려와 묵묵히,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이게 바로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삶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저자 카뮈의 의견이다. 부조리하고, 부질없고, 헛수고 같은 게 인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오히려 그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카뮈의 의견으로는 삶은 부조리의 연속이며, 자살은 굉장히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어쩌면 부조리한 삶의 해결 방식으로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살을 할까, 커피를 한잔 할까’라는 말도 했었다. 카뮈 본인의 삶 역시 굉장히 부조리했다고 전해진다. 그럼 그 역시도 왜 일찍이 자살을 하지 않았냐고?
그는 자살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행위는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거라고 말한다, 마치 시지프처럼.

문제를 견뎌내고 적응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존재하자. 그것이야말로 여러모로 더욱 좋은 일일 테니까. 재미있는 건 정말 옛날 말 맞다나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안 좋은 일들은 우리 인생에 기억될 만한 큰 선물을 하나씩 안겨주고 간다는 것이다. 그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굴러온 선물을 걷어찰 지 정하는 건 당신의 마음가짐인 거다. 부조리한 현실을 인정하느냐, 혹은 마느냐.

난 인간의 삶이 부조리하다고 인정해가는 중이며 인간 자체에 대한 동정심이 더욱 강해져서, 더 많은 글로 주변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서로를 부둥켜안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덕분에 내가 몹시 궁금해 하던 사후세계를 확인할 날은 스스로 정하지 못하게 되었고, 훗날로 멀어진 느낌이다. 그래도 언젠가 갈 거니까 미리 나의 거취를 정하기 위한 노력을 좀 해야겠다. 거짓말 하지 않기, 이웃 사랑 실천하기,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기, 아 그러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할 거다! 지금 인생도 즐거우니까 딴 데 가서도 즐겁게 살아야하지 않겠어? 여기서 즐기며 살던 클라스가 있는데 말이지!
그러니 서로 친절하자구, 따뜻하게 말해주자구. 그리고 부조리에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자구, 위대하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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