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세계의 여러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면서 ‘아 나도 저기에 한번 꼭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당신이 보고 감탄할 만한 예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축물을 만든 건축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받고, 더욱더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예술가의 삶이 끝나야 하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든 건축가들을 둘러싼 소문은 여러 가지다. 

건축물을 완성한 후 눈을 멀게 했다. 잔인하게 살해됐다. 지하실에 감금 후 굶겨 죽였다 등 건축물의 아름다움만큼 여러 소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번 공감포스트는 아름다운 예술을 둘러싼 추악한 이야기를 알아봤다.
 

▶손목 잃은 인부들의 이야기, 인도 ‘타지마할’ 잔혹사
인도하면 인도의 수도 ‘뉴델리’보다 ‘타지마할’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인도를 대표하는 ‘타지마할’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했던 무굴 제국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은 엄청난 사랑꾼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 뭄타즈 마할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샤 자한의 명령이 떨어지고 22년 후, ‘타지마할’이 완성됐다. 완벽한 비율과 좌우대칭을 자랑하는 ‘타지마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인 건축물에는 어떤 잔인한 소문이 숨겨져 있을까?

22년간의 ‘타지마할’ 공사 기간 동안 매일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 수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해 현장과 가까운 곳에 일꾼들이 살 도시가 생길만큼 이었다고 한다.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이 완성되고 샤 자한은 흑 대리석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타지마할을 마음에 들어 했다.

샤 자한은 22년간 고생한 인부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궁전이 또 생기는 것을 막아야겠다.’

그는 공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의 손목을 자르라 명한다. 그리고 손목이 잘린 이유에 대한 비밀을 지키지 않는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미국의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바 코흐는 샤 자한이 건축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모두 죽이고, 오른손을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이야기가 진짜라면 정작 ‘타지마할’을 만든 인부들은 아마 공사에 참여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지 않았을까? 
 

▶절대적 군주의 잔인한 명령, 러시아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그곳에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이 있다. 바로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성 바실리 대 성당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6년간의 전쟁 끝에 카잔의 타타르 칸 국을 정벌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가장 두렵고 강력했던 통치자 중 한 명이었던 이반 4세, 그는 “평민의 생활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충신의 지적에 “군주가 잘못해도 신하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잔혹한 황제였다.

죽은 황태자를 끌어안고 있는 이반 4세. 일리야 레핀의 1885년 작 / 네이버

이반 4세는 임신 중이던 황태자비의 옷차림이 단정치 않다며 그녀를 지팡이로 때렸고, 그 충격으로 황태자비는 유산했다고 한다. 황태자가 이를 항의하기 위해 그의 침실로 뛰어들어가자, 그는 지팡이로 황태자의 이마를 내리쳤다고 한다. 그는 순간적 분노를 참지 못해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이다.

이러한 통치자가 있었던 때에 지어진 ‘성 바실리 대성당’.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답게 이를 둘러싼 잔인한 소문이 있다.

이반 4세 역시 완공된 ‘성 바실리 대성당’ 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성당이 완성된 후 이반 4세는 건축가 야코블레프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앞으로 대성당의 아름다움에 필적한 건물을 다신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야코블레프는 성 바실리 대성당 이후에도 여러 채의 건축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럼 이반 4세가 눈을 멀게한 것이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잔인한 군주 밑에서 일한 건축가가 살아남진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서 말한다.

절대적 군주의 잔인함에 눈을 멀게 된 건축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야코블레프 역시 ‘성 바실리 대성당’을 건축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멈춰있던 400년, 체코 ‘천문시계'

‘체코’라는 나라보다 더 많이 알려진 체코의 도시 ‘프라하’. ‘프라하’는 건축의 교과서라 불리는 도시이다.

‘프라하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검색하면 여러 동영상과 글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많은 도시 프라하.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의 유명한 건축물에도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다. 바로 프라하 구시청사 벽에 걸려있는 ‘천문시계’다.

프라하의 명물로 뽑히는 ‘천문시계’, 이 시계는 정각이 되면 소리가 나며 쇼가 시작된다고 한다. 해와 달의 천체 움직임, 계절, 당시의 농경생활이 담긴 시계 속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시계 앞에서 정각을 기다리고 한다. 

이 ‘천문시계’를 둘러싼 이야기도 참 잔인하다. 1410년, 프라하 시청사의 요청으로 두 명의 시계공 미쿨라스와 하누쉬 그리고 한 명의 수학자 얀 신델이 합작하여 시계를 만들게 된다. 완성된 시계가 너무 아름다워 당시 천문시계를 본 귀족들이 하누쉬에게 자신의 나라에도 시계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프라하의 시의회는 하누쉬의 양팔과 다리를 포박해 불로 달군 인두로 하누쉬의 눈을 지져버렸다고 한다.

눈을 잃은 하누쉬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제작한 시계탑에 올라가 시계를 만졌고, 그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 작동이 멈췄다고 한다. 멈춰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뒤였다고 한다.

하누쉬가 시계를 제작한 것은 맞지만 눈을 지져버린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천문시계’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에게 알리고 싶어 자극적인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닐까?

프라하 ‘천문시계’를 찾는 여행객들은 하누쉬의 이야기를 믿고 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면, 하누쉬와 함께 시계를 만든 두 사람에게도 ‘천문시계’가 마지막 작품이었을 것이다.
 

▶잔혹한 노동의 결과, 중국 ‘만리장성’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만리장성은 거대한 성곽으로 유럽에서는 ‘Great wall’이라고도 불린다.

지구의 대기권 밖에서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는 ‘만리장성’은 중국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만리장성’ 건설의 시작은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시작했다. 후에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이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해 재건했다. 

2000년 동안 유지되고 건립된 ‘만리장성은’ 건립자가 중국 ‘역대 황제들’로 표기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졌다. 

그런 오랜 시간만큼 이를 둘러싼 이야기도 많았다.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만리장성’을 쌓는 인부로 강제 차출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배고픔과 심한 노동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남편의 소식이 좀처럼 없자 여인은 남편을 만나러 갔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강제 노역자들에게 남편의 소식을 묻자 남편이 과로로 쓰러져 만리장성 돌무더미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돌무더미가 수를 셀 수 없어 시신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슬픔에 빠진다. 상심한 여인은 성벽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졌고 기적처럼 남편의 시신이 드러났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는 많은 백성이 동원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만리장성을 쌓느라 농사도 지을 수 없었을뿐더러 고된 노동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하던 인부들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오래 살더라도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작업에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걷기도 힘든 산에서 힘들게 벽돌을 나르던 노동자들에게 완성되지 않은 만리장성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마 그들의 고됨이 슬픈 설화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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