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사랑꾼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신조어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유교 사회, 중매인을 통해 혼례를 의논해 대례를 향했던 조선 시대. 그때에도 사랑꾼들이 넘쳐났다.

오늘 공감포스트는 조선 시대의 사랑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한밤중이 되도록 나를 찾아올 기척이 없네’

재능과 미모를 겸비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기생 '황진이' / 네이버

역사상 최고의 미모와 재능을 가졌다는 조선 시대 기녀 황진이. 그녀가 조선 시대 사랑꾼이었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화담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 절세미인 황진이가 있었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화담 '서경덕' / 네이버

비 오는 날,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간다. 일부러 비에 젖은 옷을 입고 그를 유혹하려는 황진이를 화담은 이부자리를 펴 그녀를 눕히고 몸을 말리게 했다. 그리고 화담은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좌정하여 읽던 글을 읽었다고 한다. 

또 화담과 학문을 논하던 황진이는 배가 아프다며 방바닥을 구르고 고통스러워하는 척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 화담은 “내 손이 약손이다” 하며 황진이의 배를 쓸어 줄 뿐,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황진이의 여러 유혹에도 끄떡없었던 화담 선생. 그에 감탄한 황진이는 큰 절을 올리며 그에게 수학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황진이는 그에게서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고 한다.

혜원 신윤복 <달빛 아래 정 깊은 사람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던 황진이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언제 신의 없이 굴었으며 임을 언제 속였길래
달 밝은 깊은 밤에 임에게 기대보고 싶은 마음도 품을 수 없으니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찌 하겠는가?

황진이는 화담의 세상을 뜨자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 생을 마감했다. 황진이의 유혹에 덤덤했던 화담이 황진이를 내심 좋아했다는 설이 있다. 그도 믿을 만 한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화담선생의 시조 때문이다.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구나
구름이 만 겹 첩첩이 잔뜩 낀 산속에 어느 임이 오겠냐마는
산중에 바람 불어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진이(眞伊)인가 하노라

조선 시대의 사랑꾼 황진이, 알고 보면 화담도 그녀 못지않은 사랑꾼 아니었을까?

▶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인 고종은 엄청난 순정남이었다.

1896년, 궁궐에 처음으로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고종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드리는 신하는 의관을 갖추고 전화기에 네 번 절을 한 뒤 다이얼을 돌렸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고종은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기계에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여봐라, 홍릉에도 전화를 놓아라.”

고종은 특별한 곳에 전화기를 설치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홍릉’은 바로 고종의 부인, 명성 황후가 묻힌 무덤이었다. ‘홍릉’에 전화가 설치되자 고종은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여보, 어제 춥지 않으셨소?” “흐음,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기계라고 해도 저승에까지는 닿지 못하는구나.”

고종의 전화 통화 모습 복원도 / KT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 아침 명성 황후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 아침 구슬피 울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했던 그 날, 그 날에도 ‘홍릉’의 전화는 울렸다고 한다.
 

▶ “나는 명심하건대 빈을 잊을 수 없다.”

의빈 성씨를 15년 기다린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 네이버

조선 22대 왕 ‘정조’ 그가 15년이나 기다린 여인이 있다.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여인, 바로 의빈 성씨이다. 

의빈 성씨는 궁녀였다. 1762년, 10세의 나이로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정조가 어머니 처소에 들어가는 의빈 성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쫓아다녔다고 한다.

‘처음 승은을 입을 기회가 있었으나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키우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후 다시 의빈에게 명하였으나 또 사양했다.
결국,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

의빈 성씨가 후궁을 거절한 이유는 효의왕후를 향한 충의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남자로서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두 사람이 신분을 떠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 같은 사이이기에 의빈이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

드라마 이산 속 정조와 의빈 성씨 / MBC 이산

‘마음 한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의빈 성씨의 마음은 몰라도 정조는 의빈의 죽음 후 묘비를 직접 쓸 정도였으니 그 사랑이 참 절절하다 할 수 있겠다. 15년 동안 한 여자를 기다린 정조가 바로 진정한 (짝)사랑꾼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꿈속 넋으로 하여금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을’

조선 시대 천재 여류시인 '이옥봉' / BOOK DB

이옥봉은 들어보지 못했어도 ‘몽혼’이라는 시 한 구절쯤은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천재 여류시인 이옥봉은 젊은 선비인 조원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첩살이밖에 할 수 없는 신분이었고, 그의 첩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원이 이옥봉과 결혼을 결정하면서 내건 조건이 있었다. 바로 ‘앞으로 절대 시를 짓지 않을 것’이었다. 옥봉은 ‘사랑이 텅 빈 마음을 채워준다면 더 이상 시를 짓지 않아도 좋다’는 답해 둘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옥봉은 계속 책을 읽었다. 어느 날 사정이 딱한 이웃집 아낙네를 위해 남편 대신 탄원 시를 한 수 지어주다 조원에게 들켜 집에서 내쳐진다.

조원에게 내 처진 후에도 옥봉의 조원을 향한 시는 계속됐다. 수없이 잘못을 용서하는 편지와 시를 보냈지만, 조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그녀가 지은 가슴 절절한 시가 유명한 ‘몽혼’이다. 

요사이 안부를 묻사오니 어떠하신지요? 달 밝은 창가에서 이내 몸 한이 많습니다.
꿈속 넋으로 하여금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을.

 

온몸을 자신의 시로 감은 채로 발견된 시인 '이옥봉' / kyobostory

그 후 옥봉은 중국 동해안에 떠다니는 시체로 발견된다. 너무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서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사람을 시켜 건져 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여있었다고 한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내니 바깥 종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시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이가 시를 읽어보니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자신이 거두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종이 안에는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는 이름이 보였다고 한다. 실연의 고통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녀의 시를 보아 그녀는 사랑꾼이었음이 분명하다.
 

■ 조선 시대 청춘들의 사랑 고백 방법

‘밸런타인데이’,‘화이트데이’처럼 과거 조선 시대에도 사랑꾼을 위한 날이 있었다. 바로 경칩이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절기인 경칩은 조선 시대의 ‘밸런타인데이’, 바로 연인들을 위한 날이었다고 한다.

경칩에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 은행을 주고받으며 몰래 은행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굳이 선조들이 은행을 나누어 먹었던 이유가 있다. 천 년 이상을 산다는 은행나무는 수나무와 암나무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결실을 보는데 이 모습을 순결한 사랑의 자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 날이 어두워지면 청춘들은 은행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지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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