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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군인이 아니어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

[공감신문]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이 날은 3월 1일, 3.1절과 8월 15일 광복절만큼이나 중요한 날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현충일을 그저 쉬는 ‘빨간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현충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현충일이 어떤 날인지, 또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알게 된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 현충일의 의미
현충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 하는 날이다. 현충일에는 호국영령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를 진행하며, 조기 게양도 한다.

당초 현충일은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개정을 통해 공휴일로 지정됐다. 현충일은 현충기념일임에도 현충일로 불렸다. 결국 1975년 12월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현충일로 공식 개칭됐다.

출처=국립현충원

일부는 현충일 추모 대상이 6·25 전쟁에 참전한 국군에 한정되는 것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충일은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모든 선열의 넋을 기리는 날이다. 이 날에는 국군과 함께 추모해야할 이들이 있다. 바로 학도병과 의병이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 나섰다. 이번 편은 학도병과 의병에 대한 이야기다.

◆ 학도병
학도병, 이름 그대로 학생신분에 전쟁에 참가한 사람을 의미한다. 신분이 학생이 아니었더라도 학도병에 준하는 나이였다면, 학도병이라 부를 수 있다.

어린 나이에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학업을 포기하고 참전한 학도병. 최근 이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가 개봉되면서, 학도병이 다시 주목 받기도 했다.

학도병의 주요 전투로는 장사상륙작전과 포항전투가 꼽히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트럭에 탄 학도병들.


▣장사 상륙 작전
1950년 9월 14일~15일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장사 상륙 작전 혹은 장사동 상륙 작전으로 불린다.

대한민국군의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다. 9월 15일 오전 6시 장사에 상륙한 학도병들은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장사 상륙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계획됐다. 당시 미군이 해안을 통해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가 조선인민군에 들어간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미군이 어디에 상륙할지는 알지 못했다.

장사 상륙 작전에 쓰였던 문산호.

북한에 혼선을 주기 위해 학도병들이 장사에 상륙하게 된다. 장사 상륙 작전은 사실 미군에 떨어진 명령이었다. 그러나 인민군처럼 위장을 해야 했던 작전 사정상 학도병이 투입됐다.

장사 상륙 작전에 참전한 772명 중 139명이 전사했고, 9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을 제외한 다른 학도병들은 모두 행방불명 상태다.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장사 상륙 작전은 3일로 계획 됐다. 이에 따라 물자도 3일치만 지급됐다. 그러나 문산호가 좌초되면서 이들은 3일이 넘도록 7번국도 차단 임무를 수행했다. 장사로 향했던 문산호는 1997년 3월 난파선으로 발견 됐다.


▣포항전투
포항전투는 포항여자중학교에서 치러져 포항여중전투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8월 10일 '수도사단학도의용대'출신 학도병 71명은 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 숙소에 도착한다. 이후 학도병들은 1명 당 M1소총 1정과 실탄 250발을 지급받는다.

영화 '포화속으로' 스틸컷

8월 11일 포항 시내에서 총성이 울린다. 총성은 조선인민군 총구에서 나왔다. 제3사단 후방사령부 지휘책임자인 김재규 소령은 학도병들에게 포항여중 방어 임무를 내리고, 병력을 이끌고 시내로 진입한다.

학도병들은 지시에 따라 학교 전체를 경계한다. 포항 여중을 경계하던 학도병은 신원이 확인할 수 없는 군인들을 발견한다. 당시 경계근무를 하던 학도병들은 아군일 수 있다는 생각에 암구호를 고민한다.

포항여중 전투 / 출처=e뮤지엄

하지만 인민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학도병들은 기습적으로 공격, 적을 제압한다. 학도병들에 제압당한 인민군은 조선인민군 제5사단 소속이었다. 이를 알게 된 인민군 5사단은 포항여중에 포격을 동반한 공격을 가한다. 이런 내용의 포항전투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 의병
의병은 나라가 적에게 침입 받아 위급한 상황일 때, 자발적으로 적에 대항해 싸우는 국민들을 말한다.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점과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규군과 구별된다.

이 같은 의병은 먼 과거부터 존재했다. 의병의 활약은 특히 조선시대 말기에 두드러졌다. 이때 대표적인 의병 활동으로 ‘정미의병’을 꼽을 수 있다.

초기 의병의 모습 / 출처=제천의병전시관

▣정미의병 발발 배경과 전개
일본은 1907년 6월 일어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폐위하고 아들 이척을 순종으로 즉위시킨다. 그 후 정미7조약으로 한국 통치권의 대부분을 빼앗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시킨다. 이에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07년 8월 1일, 자신이 속한 군대가 해산됐다는 소식과 박승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해산군인들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한다.

이후 해산군인들의 항전 소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고, 영향을 미친다. 정미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다. 각 지역의 의병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의병의 훈련. / 출처=청송 의병사이버 박물관


▣서울진공작전
정미의병으로 인해 서울진공작전 수립되기도 했다. 각도의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13도창의군 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연합부대를 편성한다. 전국연합부대는 서울을 일본으로부터 되찾는다는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한다.

전국연합부대의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른다. 1908년 1월 이인영은 각국 공관에 의병부대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낸다. 전국연합부대 일부는 동대문 근처까지 진격해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 / 출처=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점차 커진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맞으면서 전국연합부대는 해산되고 만다. 이인영은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한다.

일부 의병들이 이인영을 찾아가 전국연합부대 다시 이끌고 서울진공작전 진행해 달라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인영은 3년 동안 아버지를 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결국 전국연합부대는 해체되고, 서울진공작전도 물거품이 된다.

의병들의 모습.


▣정미의병 평가
정미의병은 이전에 일어났던 의병운동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다.

첫 번째로 의병구성원이 다양해졌다. 양반 외에도 평민·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동참했다. 심지어 천민출신 의병장도 등장했다.

두 번째, 해산군인 합류로 무기와 편제가 정예화 되면서 전력이 크게 향상됐다.

세 번째, 의병이 독립군으로 계승돼 발전했다.


◆ 우리는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
학도병, 의병은 군인이 아니었음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군인이 아니었기에, 전문적이지 못했기에 피해가 더 컸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학도병, 의병, 국군 등을 잊지 않아야 한다. 타국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UN참전용사에도 반드시 감사해야 한다.

현충일은 공휴일이다. 국가적으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원활한 추모행사 등을 위해 지정된 것이다. 현충일에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가는 것도 좋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희생을 추모해 보는 건 어떨까?

    교양공감팀 | pjs@go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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