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요즘 사회는 '갑질'이 만연하고 있다. 이른바 '갑'이 '을'을 상대로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럴수록 '지킬 것은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 가진만큼 베풀줄 알았던 인물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진다. 이에 공감 포스팅팀이 '사회지도층으로서 도덕적 의무'를 다한 모범 사례를 찾아봤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의 프랑스 표현이다. 초기 로마시대 왕과 귀족들이 보인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 용어다.

이는 당시 계급사회를 지키려는 일종의 방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는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은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는 부·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모범을 보이거나, 그 의무를 망각할 때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정당하게 대접받으려면 그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 타국 사례를 들면서 한국 현실을 비판하는 용도도 있다.
 

■ 다이애나 왕세자빈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존경을 받은 영국 왕세자빈.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불화 끝에 1996년 이혼했다.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5위인 해리 왕자의 친어머니다. 흔히 다이애나 비라고도 부른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빈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찰스왕세자의 사랑을 포기하고, 왕세자비로서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한 후로는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 왕세자비란 명예 덕분에 그녀가 관여한 자선활동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혼한 후로는 더욱 활발하게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시간을 쏟았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운동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 전 세계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라며 감동했다.

다이애나는 자선과 봉사활동을 통해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사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테레사 수녀도 선종했다. 당시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 칼레의 시민들

 백년전쟁 당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칼레항을 포위했다. 그러나 칼레 시민들은 건축한 성채를 기반으로 1년 가까이 영국군에게 저항했다. 성채 안의 모든 양식이 떨어지고 나서야 칼레시는 항복을 전하며 칼레시에 대한 관용을 요청한다.

그러나 칼레시 때문에 고생했던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을 수용하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이는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당할 대표자 6명을 선정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칼레시 부유층이었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선다. 그의  희생정신에 감격한 유지들이 앞다퉈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은 채 처형장으로 향한다.

그 순간 임신 중이던 왕비가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왕에게 간청한다. 결국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끝에 이웃을 구하면서, 자신의 명예와 목숨까지 지킬 수 있었다.

이는 조각가 로댕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란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런데 ‘칼레의 시민’ 속 인물들은 위대한 영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일면을 그렸다.
 

■ 이회영과 그 형제들

조선 말 10대 부호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다섯째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애국 계몽가 및 독립운동가 등으로 활약했다. 가진 것을 모두 다 바쳐 나라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

그는 전통적인 명문가 자제였음에도 봉건적 관습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신분제가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집안 노비들에게 존대하고, 노비문서를 파기해 그들을 평민으로 풀어줬다. 뿐만 아니라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개가시키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6형제가 모두 조선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때 급처했던 전 재산만 해도 당시 소 1만3000마리 값이다.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600억원 가량이다. 그런데 이 재산도 독립운동 8년 만에 바닥난다.

아들 이규창 자서전에 따르면 "일주일에 세 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이라 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이 매우 힘들었다는 뜻이다.

이회영 집안은 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냈을 정도의 명문가였다. 그래서 한일합방을 지지하거나 묵인하기만 했어도 일본에게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 유일한(유일형)

유한양행의 창업주이자 독립운동가. 초창기 미국에서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장된 미래를 뒤로 한 채 조국으로 돌아와 기업가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존경하는 대한민국 기업인을 묻는 여론 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으로 꼽힌다.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올’ 정도로 법인세를 철저하게 납부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자금 거절로 인한 보복성 세무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히려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됐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한양행은 1939년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한 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도 잘 지켰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의 이러한 의지는 계속 이어져 지금도 대한민국 제약 기업 중 평균 연봉 6330만원으로 업계 1위를 기록했다.

1969년 노환으로 은퇴하면서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전문 경영인에게 인계했다. 한국에서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행된 것은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다. 이 후 1971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그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을 설립했으며, 연세대병원(현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만2000주를 기부했다. 대신 해당 주식은 의학과 연구 교육에만 쓰라고 조건을 걸었다. 이는 세브란스 병원이 대형병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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