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조선(朝鮮)은 1394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한양도성을 축성하게 되는데 백악을 주산으로,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오른쪽에는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社稷)을 먼저 건설하였다.

세종임금께서는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자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은 백성을 살리는 하늘의 명령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농업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아 땅과 곡식의 신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70년 영조임금은 조선의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교(下諭)하기를, “나라의 근본은 곧 백성이요, 백성의 근본은 곧 농사(農事)이다. 대체로 우리 백성이 입고 먹는 것은 오로지 잠업과 농경(農耕)에 있다. 글은 비록 서투르나 뜻은 실로 근본에 힘쓰는 것이니, 이 뜻을 본받아 힘쓰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라.”고 하였다. 농업을 국가경제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 궁궐을 짓기 전 먼저 사직단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창덕궁에는 농사와 관련된 곳이 많이 있다. 6월은 궁궐에서 가뭄 걱정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로 이 때 비가 오지 않음은 임금이 덕이 없음이라고 생각하여 간절히 비오기를 기원하여 기우제를 지내는 사례가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후원의 부용지, 천성동지역에서 석척기우(:도마뱀을 잡아 독안에 넣고 버드나무가지로 독을 두드리며 비오기를 기우하는 주술적 행위)라는 기우제를 지냈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들어서서 정면을 보면 내각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그 곳은 왕과 가족들을 보좌하는 아주 중요한 궐내 관청들이 모여 있는 서궐내각사 지역이다. 현재 이곳은 해설사와 함께하는 관람 동선에서 제외되어 있어 특별한 경우에만 해설이 있다. 이곳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이미지를 풍겨내는 억석루(憶昔樓)라는 편액이 걸린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박공지붕 형태의 이층행각으로 억석루에는 어필, 편액 등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2층루는 텅 비어 있다. 아래층에는 띠 창살의 창문이 달린 벽장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2017년5월 억석루 전경과 뒤편 아름드리 거목 느티나무

궁궐지에 의하면 오래전 현판은 영조의 어필로 편액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현판은 2000~2004년에 걸쳐 서궐내각사 건물들이 복원되어 2005년 일반에 개방될 즈음에 원로 서예가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선생이 글씨를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 오옥진(吳玉鎭) 선생이 새겨 복원된 현판이다. 

억석루의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의미이지만 사람들의 병 치료를 위한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인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곳 억석루는 궁궐 식구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인 약방과 가까이 있기도 하여 질병치료와 관련된 내의원 건물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39년 하교하기를 “사전(祀典)은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들으니, 내국(내의원)에서 신농씨(神農氏)를 제사지내는 일이 있는데, 평상시에 위판(位版:신농씨의 위(位)를 모시는 나무패)을 간직함이 매우 소홀하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청(大廳)에 장(欌)을 설치하여 기름을 먹인 독(櫝)으로 덮어 간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내의원에서 신농씨 제사를 관할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신농씨는 소의 몸에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질병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처음으로 쟁기(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와 보습(쟁기의 술바닥에 끼워 땅을 갈아 흙덩이를 일으키는 데에 쓰는 삽 모양의 쇳조각)을 만들었다. “옛날 백곡(百穀)을 심어서 백성의 먹는 것을 바꾸었고, 온갖 풀을 맛보아서 의약(醫藥)이 있게 하였는데 그는 질병 치료를 위한 약초를 구하기 위하여 산속을 헤매면서 온갖 풀들을 직접 다 먹어 보고 여러 번 중독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연구하여 약초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여러 식물들의 독성과 약으로서의 사용 가능 여부를 알아내기 위하여 자편이라는 회초리를 사용하여 여러 식물들을 때려보고서 판별했다고 한다.”

#. 현재 복원된 억석루 편액과 오방색 단청이 고운 우물천장

영조임금은 새로운 전각의 현판 글씨를 써서 내려주기를 유난히도 좋아했는데 아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억석(憶昔)’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영조 51년 실록에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다. 임금이 연화문 밖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내종청(內宗廳)에 나아가 ‘억석청(憶昔廳)’이라는 글씨를 써서 내리고, 그것을 새기어 걸도록 명하였다.” 영조 37년 실록에는 약방(藥房)에서 사전(謝箋)을 올리자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삼제조(三提調)를 인견(引見)하고, 친히 들어가 자세히 살피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약원(藥院)에 게시하도록 명하였다. 『한경지략』에는 영조임금이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약원(藥院)에 게시하도록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

궁궐관람은 해설사와 함께 느긋하게 관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궁궐 관람 전에 궁궐 관련 책을 읽어 보거나 웹서핑을 통하여 사전지식을 습득 후 관람한다면 더욱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물론, 해설사의 정규해설이 이루어지는 전각과 후원관람도 좋지만 때로는 해설관람 동선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전각을 찬찬히 관람하는 재미는 더욱 좋다. 궁궐 관람 중 공개는 되어 있지만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곳이 많이 있다. 혹여, 해설이 더 필요할 경우 궁궐길라잡이에게 도움 요청한다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설 도움을 드린다.

예나 지금이나 ‘후세의 착한 황제와 영명한 임금은 농사를 힘써서 백성을 기르고, 의약으로 생명을 구제하는 일을 중(重)히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듯’ 백성들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걱정하는 통치자의 노심초사하는 관점은 불변하는 것 같다.

엊그제가 벼와 보리 등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이라는 뜻의 '망종(芒種)'이었다. 보리를 베고 모를 심어야 하는 절기이다. 보리는 베어 햇보리를 먹게 되며, 농사인력을 구하기도 매우 힘든 바쁜 농사철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므로 농사일이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일부지방에 가뭄이 계속된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기우제를 지내서라도 농부들이 기뻐할 만큼 흡족한 비를 내리기를, 병상에서 투병 중인 이들에게는 신농씨의 간절한 치유의 효험이 함께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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