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여야가 서로 올인 하다시피 대치하는 청문회 정국을 바라보는 심정이 씁쓸하다.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물의에 책임을 지고 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하고, 정실인사에 의존한 검증미비와 부실검증을 비판하는 소리도 높다. 한 건件 개가를 올린 야당은 더욱 혹독한 검증을 자신한다. 국회청문회를 둘러싼 여야의 당파싸움도 가히 점입가경, 국론 분열의 치열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당리당략에 따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충성이고 남이 하면 부역인 세상이다. 편을 갈라 싸우는 여야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도량은 보이지 않고,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의 철저한 이기주의에만 함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지 않는다. 집권여당은 높은 여론조사 지지도에 고무되어 독주하고 분열된 야당은 무능을 노출한다. 청문회의 논란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일각에서는 느닷없이 청문회 강화 방안이나 무용론도 제기해 더욱 혼란스럽다.

장관이라는 현직顯職을 그저 장기판의 졸卒 같은 존재라고 격하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가문의 영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옛날 정승 판서라고 불리던 중책, 장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가 않은 모양이다. 청문회의 검증 과정에서 공직에 어울리지 않는 마각馬脚이 드러난다. 흠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강변도 횡행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에 반발한 야당의 불참으로 6월 19일 오전 10시 열려 김상곤 교육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실시계획서 채택의 건을 처리하려 했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불발됐다. / 연합뉴스=공감신문

청문 대상이 된 소위 엘리트들은 논문 표절, 위장 전입, 음주운전, 세금 탈루 등은 기본이고 주변 관리 부실이나 부적절한 행동들이 마치 썩은 생선처럼 냄새가 진동한다. 솔선수범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커녕 공익을 감당하겠다는 공직자로서의 자질이나 신언서판까지 크게 의심하게 만든다. 

앞으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 막중한 국정을 수행케 한다는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바로 청산해야 할 적폐이고, 개혁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처신들이 고고하지 못해, 이런저런 일로 망신을 자초하면서도 자리에 연연하는 것을 보면 입신양명과 출세라는 인간조건에 대한 연민이 일어나기도 한다. 머리 좋고, 명문대 나오고, 많이 배우고, 글 잘 쓴다는 자들이 인품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학교에서 뭘 배우고 뭘 가르쳤나. 

결국 거론되는 청문회의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들이 큰 바위 얼굴이 아니라 양두구육, 빛 좋은 개살구, 교언영색의 그저 그런 속물들이었다는 것이다. 붓대와 먹물들의 견물생심과 한탕주의식의 출세지상주의의 일그러진 행태에 허탈한 심정이다. 이미지와 크게 다른 인격의 위선과 추락을 상당 부분 확인하면서 우리는 정치와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어쩔 수 없이 더한다. 

이탁오(1527~1602) / 사진출처=현자들의 평생공부법

명 말의 불우했던 사상가 이탁오(1527~1602) 선생이 당시의 세상을 장악한 신유교 주자학 권력층에 대해 가한 신랄한 비판은 우리가 직면한 오늘의 현실에도 시사示唆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보인다. “지금의 주자학자들은 죽일 놈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덕을 입에 담고 있으나 마음은 고관高官에 있고 뜻은 거부巨富에 있다. 겉으로는 도학을 한다고 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일삼으며 행동은 개, 돼지와 같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새로 출범한 문재인행정부의 의욕과 성급함은 차치하고, 국회 청문회라는 통과의례의 무대 위에 나타난 지식인, 교수, 지도층들의 부끄러운 변명과 과오, 노추老醜들이 새삼 실망스럽다. 모르는 체 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우리나라 대다수 지도층들은 자기희생에는 크게 인색했었고 결국 제 잇속 차리는 데 혈안이 되어 그동안 자신의 양심과 남을 속이며 각박하게 살아왔다는 증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좋은 인물을 발탁해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데 보탬이 되자는 국회 청문회의 취지가 돌연 무색해 지는 상황이다. 

승자독식의 전쟁, 또는 건곤일척의 게임과 유사한 대통령 선거를 거쳐 부상한 일등공신들이 논공행상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이며 장단점이 있을 수 있는 오랜 엽관제 전통의 산물이다. 그러나 줄줄이 이어지는 장관 후보자들의 온갖 비리와 의혹을 보는 국민들은 참담하다. 청문회에서 나타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행태와 궤적은 지행합일, 언행일치의 모범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수신과 덕행의 실천은 매우 부족했고, 이기와 탐욕, 거짓과 불의는 차고 넘쳤다. 

이들이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소란 끝에 청문회를 다행히 통과한들, 공직의 엄중함이나 참신성, 공권력의 도덕성, 공정성 등을 담보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당연히 나온다. 스스로 만신창이가 되어 체통과 권위를 잃고서야 어떻게 존경받는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요직要職에의 요청이 오더라도 허물과 잘못이 적지 않아 남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다거나, 적재적소가 아니라고 사양하는 금도는 보이지 않는다. 소인들은 높은 벼슬을 남에게 미루고 용퇴하는 미덕을 결코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김 진(1500~1580) 선생은 아들 학봉 김성일(1538~1593)에게 전한다. “차라리 옥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이 되어 온전하기를 바라지 말라. 사람이 차라리 올바른 도리로써 죽을지언정 그릇된 도리로써 살면 안 된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과연 어지러운 세상이자 정치현실이다. 수준이나 함량 미달이 의심되는 소인들은 과대평가를 받아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긴다. 머리가 비상하고 이재理財에도 밝아 열심히 돈 모우고 나름대로 착실히 경력관리를 잘했다고 언감생심 자부하는 철면피와 후안흑심은 아직도 많다고 보인다. 속칭 가방끈이 길어 지식은 많을지 모르나 붓대와 먹물들의 행실은 높은 기준에는 한참을 못 미친다. 

뛰어난 그들이 초야우생草野愚生, 장삼이사張三李四인 우리와는 달리 좁쌀과 연작이 아닌 대인들이겠지 라는 생각이 혹시나 하며 들다가도 궁색한 변명과 졸렬한 자세들을 곱씹으면 역시나 속았다고 분개하는 심정이다. 그러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백성은 당하고 속고 사는 일이 잦아 본래 불쌍한 것이니 어찌 하랴.

구한 말 항일지사 수당 이남규(1855~1907) 선생이 <자사언구변어위후변(子思言苟變於衛候辨)>에서 남긴 말이다. “나무의 단점이야 먹줄을 대서 그 부분을 잘라내면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사람의 단점을 어떻게 먹줄을 대서 잘라낼 수 있겠는가. 또한 나무의 단점은 외형적인 것이지만 사람의 단점은 내면의 문제이다. 내면에 단점이 있는데도 등용할 수 있다면, 속까지 썩어버린 나무도 기둥이나 대들보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일은 천하와 후세를 격려하고자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주와 행실이 모두 갖추어진 자를 얻어서 쓸 수 없다면, 차라리 행실이 올바르고 재주가 없는 자를 쓰는 것이 낫지, 재부만 있고 행실이 안 좋은 자는 쓰지 않는 것이 옳다.” 

19세기의 선각자인 최한기(1803~1877) 선생의 <기측체의氣測體義>에도 비슷한 글귀가 보인다. “재주 있는 사람을 가려 뽑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재주가 비록 많지 않더라도 정직함을 근본으로 삼는 사람은 그의 재주를 가지고서 능히 다스릴 수 있지만, 재주가 비록 넉넉하더라도 지향하는 바가 사특하고 거짓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다스리기는커녕 도리어 문란함만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뽑는 사람은 우선 그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올바른지를 살펴야 할 것이요, 재주만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경》과 《도덕경》은 전전긍긍하며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는 것처럼 우리들의 거친 마음과 삶을 내내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연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살아온 고결 청수한 인물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인지...우리 청문회에서는 참으로 맑고 푸른 바람과 같은 훌륭한 장관감은 왜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 청문회에서 누군가가 청렴강직하고 유능하며 매력적인 인물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아 진심어린 격려와 응원의 기립박수와 갈채를 받고 당당히 공직에 취임하는 광경은 언제쯤 볼 수 있을는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매우 답답하다. 황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고, 부귀영화를 발아래 짓밟고, 출세와 권력을 냉소한 예전의 유일遺逸과 처사處士들이 새삼 그리운 세상이다. 

생육신 김시습(1435~1493) 선생은 이른바 공신들이 벼슬자리에 새로 오르면 크게 한탄했다. “이 따위 인물들이 이런 자리를 차지하다니, 이 백성이 무슨 죄인가.” 《사우언행록》에는 정승 정창손이 가마를 타고 벽제소리 울리며 지나가는 것을 매월당이 보고는 “야, 이놈아, 이제 그만 해 먹어라”고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상탁불하정이다. 윗물이 더러우면 아랫물도 더러워진다.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론公論을 찾아 위민해야 하는 공직자는 이런 최소한의 부끄러움 정도는 알고, 스스로 거취를 정해야 옳지 않겠는가. 아아, 귀감이 되는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우리는 좋은 인간이 된다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며, 출세한 소수와 출세하지 못한 다수의 처지와 입장에 대해 깊이 실망하고 또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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