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속도는 언젠가 맞아 들어갈 테지만 깊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끝나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므로. 

[공감신문] 한 남자가 있었다. 나와 마주칠 연결 고리가 전혀 없어 보였으나, 우연한 기회에 그는 나에게 자신을 알렸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이전부터 나의 글을 읽었으며(거의 모든 글을 읽었다고 했다) 팬이 되었노라고. 내가 어떤 사람일지 너무 궁금했는데, 실제로 본 나를 보고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내 또래의 남자였고 곧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난 곧장 거절했다.
치명적으로 끌리거나 서로 죽이 잘 맞는다, 느꼈던 경우를 제외하곤 난 거의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관계를 시작했었다. 사실 난 누군가와의 만남에 있어 겁이 많고 신중한 편이다. 그래서 막연히 좋아한다고 해서 그와 만나야지, 생각하진 않는다. 당장 그가 좋은 건지 아니면 그와의 시간들이 과연 서로에게 좋을 건지 생각했던 편이다. 이런 나에게 겨우 몇 번 본 남자가 사귀자니? 나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는 나에게 여러 차례 나와 이야기하길 원했고, 몇 번 보는 사이 호감이 생겼다. 원래의 성격이라면 이 정도 호감에 절대 시작하지 않는다. 시기상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이번엔 좀 나답지 않게 빨리, 당신에게 마음을 열겠노라 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겨우 두 번의 만남 이후 관계는 끝이 났다. 그 깊이에의 강요, 그것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난 당신을 알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겨우 몇 번보고 '이 정도면 되지 않아? 뭐가 더 궁금해?'라며 묻더라. 정말 이기적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의 하는 일이나 취미도 있겠지만 우리가 나누는 공기가 어떠한 거냐는 건데.... 아....  심지어 그가 정말 더 이기적이라 느낀 이유, 
1. 이미 그는 내 글을 다 읽어왔고 오래전부터 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 겨우 그 정도로 본인을 파악하라니? 게다가
2. 그가 치명적으로 확 끌리지 않았다. 
난 그걸 고스란히 말했다. 겨우 이제 당신을 알기 시작하는 거고 너란 사람에게 호감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였다. 

사랑에 있어 서로의 속도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정말 큐피트의 뜨거운 화살을 맞은 듯 순식간에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서서히 누군가를 알아가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게 나다.) 사실 사랑에 있어 속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래 지속될 관계라면 누군가의 속도가 빠르고 느리다고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그 속도는 맞아 들어갈 것이기에. 하지만 깊이는 다르다. 한 사람은 상대방을 정말 평생의 반려자로까지 생각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당시엔 뭔지 모를 열정에 사로잡혀 열렬히 사랑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끝이 난 후엔 그저 몇 년 전 재밌게 봤던 밤 10시 TV미니시리즈 정도의 달고 짭짤하고 계속 손이 가는 '가벼운 스낵'같은 기억일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 '첫사랑'이 그 깊이 차이의 최고봉이 아닐는지! 누군가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겠으나 또 누군가에겐 그저 나에게 친절했던 어느 동네 소년과의 서투르고 재밌던 열정이었을 지도. 당연히 둘의 속도는 맞았을 수도 있겠지, 그 소녀가 사랑 자체에 사랑에 빠졌더라면. 

깊이는 평생가도 서로 맞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그건 끝이나봐야 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아니 '깊게' 여겼는가- 이건 정말 모든 게 끝나봐야 아는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정말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난 그와 속도차이가 언젠가 맞아 들어갈 거라 생각했었다. 그는 점차 나에 대한 열정이 은근하고 미지근한 것으로 식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나는 점점 화력이 강해질지도 모른다고. 그러다가 서로 왔다갔다 시소처럼 변할 수도 있다고. 동시에 불이 확 꺼지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나. 하지만 속도와 깊이는 너무도 다르다, 정말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는 내 팬이었고 나와 미래까지 생각을 하더라. 그건 어쩌면 내 입장에서도 기쁜 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대상이 된다니! 하지만 나에게 그 '깊이를 강요'하는 게 정말 숨 막혔다. 
만남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거였다. 장난이나 애교 섞인 사랑해, 가 아니라 진지한 호흡의 '사랑해'였다.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몰랐다. 무대 위에서 대사를 까먹은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곧 원망 섞인 눈빛이 박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넌 나 안 사랑해?"
응 아직, 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멋쩍게 웃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싸우기 싫어서 그냥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아직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엔 그의 고백을 거절했었고 이후엔 겁을 내며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나에게, 만남을 시작하며 점점 자기를 알아가라고 했다. 그리곤 자신을 사랑하지 않냐니. 날 사랑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지만 내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닌가. 내 진심을 속일 생각일랑 없었다. 나도 짝사랑을 한 적이 꽤 있었다. 근데 난 단 한 번도 내 마음이 이심전심이길 강요한 적은 없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받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짝사랑하던 상대가 주던 아픔마저 기꺼이 받아들였었는데. 

그의 애정방식은 나와 무척이나 달랐다. 나는 자유분방하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강한 스타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지만 '내 사람'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런데 그는 내 사람들에 대하여 누군가는 '남자'기에 무조건적으로 나쁜 감정을 가졌고, 심지어 거친 표현도 썼다. 아니 이게 겨우 두 번의 만남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만나기로 한 후, 내 '남사친'들과 만난 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바빠서 못 봤었다. 나와 만남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와 그들의 친분을 알았으며 내가 만남 이후 그들을 본 적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더라. 때로는 난 마치 내가 무슨 죄를 지은 여자처럼 추궁당하는 기분마저 느껴야했다. 그에게 말했다. 내가 왜 죄 지은 사람처럼 너에게 해명을 해야되고 그렇게 강압적인 말투를 들어야 하느냐고. 
딱 보아도 끈끈하며, 옆에서 챙겨주고 간섭해주고, 작은 것에도 질투해주는 연애 스타일을 지향하는 여자 분들이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그와 같은 남자를 왜 환영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아 나와는 정말 맞지 않더라. 나는 내 친구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나를 믿지 않는 게 정말 싫었다. 
"우린 서로 잘 모르잖아,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그럼 나는 너를 더욱 알지 못하는데 감히 무슨 내 진심을 이야기할까. 

그는 내가 했던 사소한 말들, 심지어 무심코 SNS상에 누구랑 뭘 먹었다고 올린 것까지 다 기억하더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장난 섞인 말투로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난 그게 정말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 숨 막혀,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게 싫어, 라고 했다. 날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날 사랑해서 그런다고 하더라. 아니,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실제로 알기 전부터, 그러니까 나의 팬 시절부터 날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상상하던 지해수,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상상했을 것이다, 이런 여자가 이렇게 연애할 거라고.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나, 지해수의 실체가 아니라는 거다. 그는 자꾸만 나라는 인간을 부정하고, 잔소리를 하고, 바꾸려고 들었다. 나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인데, 도대체 왜 나를 만나려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더라. 내가 잘못한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난 그에게 '나'라는 인간을 속인 적 없고 기대하게 만드는 행동일랑 한 적이 없었다. 영화 <화차>에서 처럼 직업을 속이거나 내 캐릭터를 속인 적 역시 더 더욱 없다. 그 혼자 상상하고 만든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는 내 실체에 실망한 거다. 난 그가 상상해오던 지해수 껍데기를 가졌을 뿐. 난 갑갑했고 항상 질책 받는 느낌이라 당혹스럽고 심지어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내가 자유로운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말했었다. 너무 자유로워서 어떻게 다뤄야할지를 모르겠다고. 그런 나를 가둬두려 했다. 새를 새장에 가두면 새 인가요. 아, 나 같은 타입은요 여러분,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만 허용해주면 절대 돌발 행동을 하지 않는 답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 옆이면 알아서 그 옆에 머무른답니다. 오히려 더욱 꾸준하지요. 
게다가, 
"내 옆 자릴 너에게 내어줄게. 여기 앉아도 돼." 라고 해야 거기 앉고 싶지,
"여기 네 자리인데 어디가 있어? 빨리 와서 안 앉아?"
라고 하면 누가 거기 앉아서 뻣뻣하게 있고 싶겠는가. 갈 마음이더라도 발길이 돌아서고 싶을 것 같다.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깊이는커녕 그나마 조금씩 부르릉 시동을 켜고 주차장 시속에서 좀 나갈라 다가도 자꾸만 과속방지턱에 부딪혔던 것이다. 

나라고 왜 안정적인 연애가 싫겠는가? 그러나 그건 절대 편할 수 있는 연애가 아니더라. 두 번의 만남, 그러나 이 와중에도 깨달은 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다니 역시 남녀 관계란 인간관계 중 그 깊이가 남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연애 방식은 사실 다 개소리일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하면 그게 맞아 들어가기 마련이다. 깊이에의 강요만 좀 어떻게 안하면 되는 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이게 내 진심인거야.

라고 어반자카파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더라. 
그래, 그가 상처를 받아서 그 슬픔이 나 때문인데 내가 거기 공감할 수 없음이 나 역시도 슬프다. 이 노래 1절의 가사처럼 고개만 떨굴 뿐...... 

사랑은 대부분 어렵고 늘 목마르다.
나 역시 그와 만나던 아주아주 짧은 시간동안 외로웠었다. 그가 사랑한건 내가 아니라 그의 상상 속의 나였기에. 
그러나 재밌는 건 대부분 그런 사랑들에 가려졌지만, 정말 충만하고 멋진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속도는 다를지언정 서로 점점 깊어지며, 방식이니 뭐니 다 집어치우게 하고, 그저 서로를 닮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런 사랑에는 깊이에의 강요 따윈 없이- 깊고 진한 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잡아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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