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1번지’를 찾아서

이름! / 윤건희요 / 주소. / 서울시 세종로 1번지 / 서울시 세종로 1번지... 면? 에라이, 이 자식이 근데! / (중략) /얘는 지네 집이 청와대라는데? / 처, 청와대요? 잘못 들으신 거 아니구요?

[공감신문] 무슨 대화냐고? 이건 <도깨비>, <태양의 후예>등의 드라마 극본을 집필한 김은숙 작가님의 2005년 작,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나오는 대본을 발췌한 것이다. 이전에 <파리의 연인>을 나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재밌게 보았고, ‘애기야 가자’에 대한 여운이 가시자마자 이 드라마에도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당시 대통령의 딸이자 외교관으로 나오는 윤재희(전도연 분)의 커리어 우먼 같으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패션을 따라하고 싶어서, 이마를 내놓은 반묶음 헤어스타일에 스타킹 위 크롭팬츠를 입고 다닌 기억도 있다. 
발췌된 대본의 씬은 그다지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니었음에도 기억이 남는 건, ‘세종로 1번지’때문이었다. 아, 청와대가 세종로 1번지에 있구나, 왠지 모르게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가벼운 정보로 잊히나 보다, 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명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에 볼일을 보러 가게 됐었다. 대학로 즈음에서 일정이 끝났기에 운동 삼아 슬슬 걸어갈 참으로 무슨 길로 갈까, 지도 어플로 백화점 위치를 찍었다. 그래서 이날 우연찮게, 종종 가서 영화도 보고 옷도 사고 밥도 먹던 익숙한 그 곳의 ‘주소’를 굳이 알게 되었고 2005년도의 <프라하의 연인> 장면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풋풋한 장근석과 김주혁 배우의 얼굴까지도. 롯데백화점 본점의 주소는 ‘소공로 1번지’이다. 

1번지. 또 어디에 어느 1번지들이 있으려나. 
(새 주소까지 포함해서 말하자면) 여의도동 1번지는 국회의사당이다. 
용산동 3가 1번지는 국방부다. 관악로 1번지는 서울대학교다. 화양동 1번지는 건국대다. 회기동 1번지는 경희대다. 강남 쪽의 1번지는 대부분 어느 주요 역 사거리다. 
그 밖에 2호선 라인은 한양대는 왕십리로 222번지, 예술의 전당은 서초동 700번지, 그리고 노인들이 자주모이는 탑골공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종로 ‘99’번지다.
(정확히 종로구 세종로 1-1은 경복궁 집옥재이며, 세종로 1번지는 경복궁 뒤 북악산 쪽이다) 

(고종의 서재였던 경복궁 집옥재)

흥미롭지 않은가! 모든 요충지나 근원지가 이렇게 특별하고 간단하고 기억될만한 숫자의 주소지에 위치한 건 아니지만 내가 검색해 본 몇몇 장소만 하더라도 이러하더라.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케이블에서 방영했던 <청담동 111>이라는 프로그램도 생각난다. 한 매니지먼트 회사의 제작자와 아티스트, 연습생들이 나오는데 대중들에게 비춰지기 전까지의 준비 과정과 사내社內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었다. 현재는 국내 최정상급 연예인들이 소속되어 있어서 ‘3대 기획사’ 중 하나로 꼽힌다는 이 회사는, 당시 급부상 하는 중이었다. 왜 프로그램 제목이 ‘111’이었을까? 회사 이름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추측하건데, 그 청담동의 수많은 매니지먼트 회사 중 ‘111’이라는 주소지가 주는 의미는 누가 보아도 남달라 보이지 않았을까? 이미 건재했던 어느 회사들 사옥보다도 멋들어지게, 그것도 ‘111번지’에 세운 것이다.
적어도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이라면, 다른 회사들 주소는 몰라도 저 회사 주소는 기억할 것이다.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겠지.
111이라, 세종로 1번지, 소공로 1번지처럼. 굉장히 상징적이다.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 ‘1번지’가 주는 의미는 상당했을 것이다. 유머 1번지, 패션 1번지, 유행 1번지 같은 그런 1번지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중심이자, 본원지이자, 요충지로서.

어릴 때 나는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주택에 사는 친구들의 집에 가서 피자 같은 걸 시켜 먹을 때 엄청 신기했었다. 나는 주문을 할 때 ‘XX아파트 XXX동 XXX호’요, 라고 했는데 걔네 집에선 XXX-XXX 번지라고 말하더라. 근데 그 배달원 아저씨가 거길 용케 찾아오는 거다! 그 꼬불꼬불한 동네를 어찌 알고. 난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아서 그 문화엔 익숙해졌다. 지금은 지도 어플 때문에 하나도 안 불편하지만 당시엔 어렵지 않았을까?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이 비일비재 했을 텐데. 그래서 요즘처럼 어느 카페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 놓는 게 아니라, 그 유명한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지오다노 앞에서, 압구정 로데오 입구 앞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건가 싶다. 

심지어 초등학교 시절 여름엔 이런 기억도 있다. 아빠 친구 가족이랑 다 같이 여행을 가는데, 네비게이션도 없었고 무슨 지도 책 같은걸 보면서 국도를 찾고, 옆 차에 길을 물어가며 피서를 떠났었던 기억. 그때 우리가 헤매는 걸 어떻게 용케 알아채고 옆 차에서 창문을 열고 ‘어디 가세요?’라고 묻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도착 예정시간? 그런 게 어디 있나. 지도를 잘 찾고 옆 차 도움을 잘 받으면 빨리 가는 거고, 아니면 뭐 아스팔트 도로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피서를 보내는 거였지. 

대부분의 ‘1번지’들은 큰 대로변에 위치해있고 기억되기 쉬웠을 것이다. 지리적인 것만 그런 게 아니다. 어린 시절 2G폰, 아니 ‘64화음’이름 휴대폰을 쓸 때 잘 사는 집 친구 아이가 자기 휴대폰 번호를 칠판에 막 적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골드번호’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의 사용 인구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특히 영업하는 이들은 기억되기 쉬운 번호를 쓰고자 했다. 어떤 통신사들은 그런 번호를 팔기도 했다. 걔네 엄마가 그래서 걔한테 골드번호를 해준 것이다. 당시에는 그래도 몇몇 번호들은 외우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가족 번호정도 다 외우나? 아빠 전화번호밖에 난 모르겠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다. 굳이 좋은 번호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번호 저장만 하면 백업도 다 되고 번호가 쉬운 게 별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번호가 쉬우면 그 번호를 썼던 사람들도 많았던 거고(특히 영업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그 번호가 노출되었겠는가), 아무튼 안 좋은 게 더 많다. 오히려 요즘의 영업이 필요한 사람들은 카카오톡 자기 설정 이름 맨 앞에 ‘ㄱ’을 추가해서 자기 이름을 위로 끌어올리더라. 그게 너무 많아서 조잡해보이긴 하다만. 

그때 가치 있던 것들이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러한 가치는 너무도 가변적이다. 누구나 주소에 ‘1번지’를 쓰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까. 개인의 휴대폰 번호도 돈을 주고 사는데, 한 기업이나 혹은 공동체가 터를 잡은 곳- 자기네가 있는 곳이 1번지가 되길 왜 다들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때는 그게 요충지요, 근원이요, 기점 같은 상징성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요즘 젊은이들은 반대다. 저렇게 대로변에 훤히 드러난 곳에 큰 매력을 못 느낀다. 일부러 꼬불꼬불하고 산동네같이 뒤엉킨 경리단길이나 해방촌을 찾는다. 얼마 전 방콕에서 ‘The Iron Fairies’라는 술집을 갔었다. 여긴 방콕을 갈 때마다 들르는 곳으로 관광객이 많은 술집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곳이다, 그냥 개인 취향에 맞아서. 외관으로 보면 거의 영업을 안 하는 곳처럼 보인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고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내부는 아기자기를 넘어 어둡고 음침하고 좁디좁게 느껴진다. 사실 천장도 꽤 높고 좁지 않은  공간인데 일부러 그렇게 꾸며놓은 거다. 미국 대공황- 금주령 시절, 몰래 술을 마시던 풍경을 가져다 놓은 컨셉이기에! 방콕을 찾은 전 세계의 젊은 관광객들이 여기에서 그 문화를 즐기며 은밀하고 위대하게 술을 마신다. 그 흔한 헨드릭스 진토닉이 왜 이겨서는 더 깊고 달짝지근한 걸까. 역시 하지 말라는 거 해야 더 재밌는 건가. 

요즘엔 그런 조촐한 멋과 재미를 찾는다. 이전처럼 두드러지는 것이 오히려 촌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지금 우리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 맞다는 건 아니다. 이런 가치는 ‘1번지’처럼 너무도 가변적인 가치다. 
그러니 이러한 가치 때문에 너무 크게 동요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냥 그 시대엔 그게 맞구나, 하고 말면 된다. 예전 유럽에서는 춤을 잘 추는 것 역시도 멋진 신사가 갖춰야할 조건 같은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매너가 좋으면 신사다. 굳이 춤을 잘 추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섹시해보일 순 있겠지만.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다. 중요한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 신도, 우정도, 보이지 않는다. 본질적인 가치는 꽤 오래 숨을 쉰다. 그리고 미지근해 보인다. 당장 증명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예술 작품 같다. 순식간에 소모되지도 아니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품이라, 그 예술품은 아마도 우리의 내면이라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구역에, 우정이라는 구역에, 배려라는 구역에, 희생이라는 구역에, 배려라는 구역에, 용서라는 구역에 당신이 행하고 느끼고 감상한 모든 것들로. 그것들은 숭고하여서 누구도 손댈 수 없기에 오래오래 숨을 쉬며 그 가치를 보존한다. 

‘1번지’를 차지한들 그 ‘1번지’의 이름이 갖는 무게가 떨어지듯- 언젠간 잊힐 지도 모른다. 지금은 시대가 원하는 내가 아닐 지라도 언젠가는 그러한 내가 빛을 발할 지 모른다. 중요한 건 마음속에 행동한 저 예술품들을, 나만의 콘셉트를 가진 더 예술품을 잘 보존하고 채우는 일이다. 불변의 가치를 찾아서.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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