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6월 21일. 하루 중 낮의 길이가 연중 가장 길고 따라서 밤이 가장 짧은 하지夏至였다. 춘분-하지-추분-동지라는 계절의 어김없는 순행은 우리 인생의 흘러감, 차츰 나이 들어가는 감을 실감케 한다. 한 해의 절반 지점에 위치한 6월이 지나가면, 곧 12월이 오고 또 한 살의 나이를 속절없이 먹을 것이다. 

러시아의 빼어난 미문작가美文作家 투르게네프(1818~1883)의 말처럼, 시간은 때로는 새처럼 날아가고 때로는 벌레처럼 기어간다. 잡을 수 없는 세월은 청년에게는 너그럽지만 노년에게는 다소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나날보다 점차 짧아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또 절실하게 깨닫는다. 

투르게네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잊지 말라.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중세의 수도원 트라피스트의 수사修士들은 노동과 기도, 명상, 침묵을 엄격히 지켰다. 특히 그들은 특히 묵언, 대침묵大沈黙을 최고의 계명誡命으로 지켰으나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인사말로 유일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수도자들이 할 수 있는, 허락된 단 하나의 말이 바로 ‘죽음을 기억하라’였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확한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사에 입사한 후 수습기간에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의 죽음을 실제로 확인하는 일이다. 초년의 수습기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병원과 경찰서를 출입하며 온갖 사건과 사고의 진상을 캐며 살아있던 인간의 갑작스런 죽음의 이유와 원인, 결과에 대한 스토리를 사건데스크에게 보고하고 그 기사를 처음으로 쓰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수도원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차이가 확연하고 중대한 사실이다. 하늘과 땅, 천당과 지옥의 차이 같은 것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사건기자들은 병원에서는 DOA(Death On Arrival), 도착 즉시 사망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경찰서에서의 살인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오비추어리(obituary)라는 사망기사의 작성, 또한 역시 기자의 훈련에 가장 중요한 코스의 하나라고 한다. 사건현장에서 타살과 자살 여부라는 변사체의 사인을 제일 먼저 밝혀내야 하는 형사나 부검을 지휘하는 검사의 경우도 죽음이라는 사건의 속사정을 중시하는 것은 사건 담당 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 그것은 100세를 산다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 노화를 연구하는 뇌 전문과학자들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 1년은 12개월이다. 인간이 80년 정도를 산다면 불과 960개월을 산다. 철이 없는 어린 시절과 병든 노년의 시기를 합해 30년 정도를 뺀다면 50년 정도, 겨우 12X50, 600개월 정도를 제대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실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짧거나 길거나 우리 인생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끔찍한 사건도 많고, 참혹한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데도 우연인지 요행인지 팔자인지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도 회자되고, 사람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적절한 어느 시기가 되면 누구나 늙고 병이 들고 죽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병이 생기고, 건강을 잃게 되고,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힘도 없어지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는다.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무력해지고 위축되고 소외되고 고독해진다는 것이다. 빛나던 젊음은 허망했던 욕심이나 잊힌 꿈처럼 사라지고 아름다운 여인들의 그토록 화려했던 미색도 끝내 시들어간다. 요양원에서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노인, 지하철 경로석에서 졸고 있는 노약자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예외 없이 초라해질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될 것이 아닌가. 

어느 해인가. 겨울 백야가 계속되던 북유럽의 어느 나라. 작은 간판의 술집 앞 간이의자에 앉아 가망이 별로 없어 보이는 호객을 하던 짙고 천박한 화장을 한 어떤 늙은 여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은 결코 행복한 노년이 아니었을 것이다. 청춘과 젊음은 너무나 짧은 것이라는 비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우리 농촌 읍·면의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다방에는 술을 팔고 시중을 드는 늙은 마담들이 적지 않다. 제법 여유가 있는 노인들은 소일꺼리를 위해 노인센터나 양로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방을 선호하고 있다고도 한다. 

조조의 <단가행>

강개하고 호방했던 건안풍골의 정신적 지주, 조조의 <단가행短歌行> 번안이다. “술을 들며 노래한다. 인생살이 얼마나 되나(對酒當歌, 人生幾何) 아침이슬 같으리니. 지난날 많은 고통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은 잊기 어렵구나. 무엇으로 근심을 푸나 오직 술뿐일세(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憂思難忘 何以解憂 唯有杜康). 젊은 친구들 내 마음 어찌 알까. 다만 그대들로 인해, 지금 깊은 시름에 잠기네. 우우하며 우는 사슴 무리, 들에서 새로 나온 쑥을 뜯네. 내게 좋은 손님 오셨으니, 비파 타고 피리도 불어보자. 밝기는 달과 같은데, 어느 때나 그것을 딸 수 있으랴. 마음속 우러나는 근심, 참으로 끊어버릴 수 없구나. 논둑 등을 누비면서, 헛되게 서로 생각하는가. 마음이 통해 즐겨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속으로 옛 은혜 생각하네. 달 밝고 별을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月明星稀 烏鵲南飛). 서너 차례 나무를 빙빙 맴돈들, 어느 가지에 의지할 수 있을꼬. 산은 높음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음을 싫어하지 않네. 주공은 어진 선비를 환영하네, 천하는 나의 진심 알 수 있으리(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송나라의 우국시인 육유(1125~1210)의 절창도 비슷한 분위기다. “...변방의 장성이고자 한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거울 속의 시든 머리 벌써 희어졌구나...죽어버리면 만사가 헛된 것임을 잘 알지만 단지 슬픈 것은, 중원의 통일을 보지 못함이라. 우리 군대가 북진하여 중원을 평정하는 날 제사 지내거든 잊지 말고 이 아비에게도 고하거라.” 일제 강점의 시기, 우리 독립군들이 풍찬노숙, 산행야숙하며 만주에서 불렀다는 <양양가>(일부 구절은 필자의 개사) 역시 죽음을 생각하는 사나이들의 비장한 아픔이 스며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단군조선 오천년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문명을 떨친 최치원(875~?) 선생은 《계원필경》 <한식제진망장사문寒食祭陣亡將士文>에서 전사자의 무덤 앞에 바치는 불멸의 헌사를 남겼다. “오호라, 삶이 유한함은 고금이 탄식하는 바이다. 허나 죽은 자의 이름이 오히려 불후하기도 하니, 이는 목숨보다 충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힘써 활을 당기고 통쾌하게 힘을 떨쳐, 웅비의 대열에서 기개를 드높이다 군진 앞에 몸을 마치니 진실로 집에서 편히 죽는 부끄러움을 면하였구나. 이제 들풀은 다시 푸르고 꾀꼬리 좋이 우나, 아득한 강물에는 흐르는 한이 끝없다. 아, 저 황량한 무덤 속에 그대들의 혼이 있는 줄을 누가 알랴. 내 생각하노라, 그대들의 옛 공이여, 내 슬퍼하노라, 시절의 아름다움이여...”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씀이다. “새가 죽으려할 때는 그 울음소리 슬프고 (鳥之將死 其鳴也哀) 사람이 죽음에 임하면 그 말이 착하다(人之將死 其言也善).” 새는 죽어서 발자국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공자는 《논어》 제15편 <위영공> 편에서 ‘군자는 죽은 뒤에 이름이 칭송되지 않을까 근심한다(君子 疾沒世而名不稱焉)’고 인품의 수양과 덕망이 높은 이름을 사후에 남겨야 함을 역설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이름을 이 세상에 과연 남길 수 있을까를 항상 걱정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 “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때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훗날 뒷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근엄했던 유학자 기대승(1527~1572) 선생은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까마는 백년이 못 가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丈夫야 일러 무사하리오.”라고 한탄했다. 채소염은 <만인挽人>에서 구슬프게 읊는다. “저 무덤의 슬픈 모습들을 보세요(傷心最是北邙山) 한 번 가면 못 오는 게 저승인데(一去人生不再還) 부귀로 죽음을 면한다면(若爲死生論富貴) 임금과 재상들이 무슨 일로 저기 있나(王侯何在夜臺間).”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당唐의 한유· 유종원, 송宋의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등 8명의 뛰어난 문장가)중에서도 크게 돋보이는 동파(1037~1101) 선생의 <적벽부赤壁賦>는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는 절창絶唱이다.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오작烏鵲이 남쪽으로 나르니, 이는 조맹덕의 시가 아닌가...정기는 하늘을 덮고...강에 임해 창을 놓고 시를 지으니 일세의 영웅이라.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아득한 창해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이라...내 일생의 짧음을 슬퍼하고(哀吾生之須臾) 장강의 무궁함을 부러워하노라(羨長江之無窮)...”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배우였던 윤심덕(1897~1926)은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의 항해 도중 현해탄에서 천재극작가 김우진(1897~1926)과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공전의 히트를 친 노래 <사의 찬미>는 스스로의 비극을 예언한 시참詩讖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는 후일의 평가도 받는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웃는 꽃과 우는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서 나 죽으면 그만일까...”

랄프 왈도 에머슨.

결혼식이나 수연壽宴, 고희연古稀宴 같은 경사慶事에는 참석하지 않더라도 장례식장은 가능한 한 찾아보아야 한다는 선·후배, 동료들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스승과 벗들의 부음을 졸지에 듣게 되는 일이 늘어난다. 또 누군가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도 든다. 갑자기 세상을 뜨는 돌연사도 잦아지면서, 저 멀리 피안으로 떠나는 일은 나이나 순서가 없어서 먼저 가는 자가 형님이라거나, 어떤 경우에는 호상好喪이라고 언중유골의 농담도 하지만, 싫었거나 좋았거나 오래된 인연의 영원한 상실과 단절은 누구에게나 가슴을 저미는 일이 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 죽는다는 것은 결국 내일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자무언死者無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죽은 자들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직관을 중시하고 논리를 초월한 이상주의를 추구했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에머슨(1803~1882)의 통찰이다. 내일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에게 상향尙饗.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