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불편함인가!

[공감신문] 오래된 연인과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은 다른 점이 많다. 특히 파인-다이닝(fine dining)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그 차이가 단번에 드러난다. 대부분 이러한 레스토랑의 경우 음식 나오는 속도가 느리다. 식전 빵 조차도 서브되지 않았을 때에 그 커플들의 연차가 보인다. 
얼마 되지 않은 연인들에게 식전 빵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며 조금은 불편한 기색도 엿보인다. 그들은 식전 빵이 서브된 후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꾸준하고 느릿한 속도로 나누고, 심지어는 메인 디쉬도 아닌 빵 따위가 어여쁘게 말하려는 여자를 방해하는 느낌일 때도 있다. 
반면 오래된 연인은 다르다. 그들은 배가 고프다. 음식을 기다린다. 서로의 존재가 앞에 있음이 느긋하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횟수만큼 직원에게 자꾸만 눈이 간다. 언제 음식을 가져다주나 싶어서다. 그들은 식전 빵이 서브된 후,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 조금 예민함을 떠나 나아진 기분을 가지고 평소처럼 서로를 대한다. 
오래되지 않은 연인들에겐 느린 음식의 기다림조차 데이트 중 하나였던 거다.

(영화 <500일의 썸머> 중에서)

오래된 연인에게 이런 익숙함과 진부함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매순간마다 서로를 긴장시킬 듯 타오를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어나는 것이 왜 나쁜가. 그것은 절대 쉬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두 사람 서로 사랑에 빠졌고, 그만큼의 시간을 보냈기에 나올 수 있는 굉장한 것이다. 이러한 오래된 연인은 빈티지스러운 멋을 풍기며 은은하게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누구의 사랑과도 같지 아니하고, 딱 그 ‘두 사람’스럽게 사랑한다.
하지만 모든 오래된 연인이 이러한 것은 아니다.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 같은 커플들도 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새로운 누군가가 유혹을 한다면 넘어갈 것만 같다. 혹 그럴 에너지를 가졌다면. 
그들에게 익숙함과 진부함은 자연스럽다기보다 불안한 것으로 보인다. 주객이 전도된 데이트를 할 때도 많다. 데이트하기 위하여 레스토랑을 찾거나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거나 고기를 굽기 위하여 서로를 찾기도 한다, 혹은 진부해진 섹스. 

(영화 <연애의 온도> 중에서)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 같은 커플과 같은 관계들은 비단 남녀사이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동성 친구 간에도 그럴 수 있다. 어릴 때, 특히 강남 동네에, 그런 여자 아이들 무리가 엄청 많았었다. (아마 요즘도 20대 초중반에 그런 관계들이 많을 거라 생각된다.) ‘아는 오빠들’과 술을 마시기 위하여 삼삼오오 ‘조’를 짜서 다니는 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은 어느 술자리에 가면, ‘내 제일 친한 동생’, ‘내 제일 친한 언니‘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네들끼리 모인 적이 없다. 여자들끼리는 불편한지 늘 오빠들이 낀다. 때로는 기회가 생기면 서로가 서로의 가벼운 흉을 보기도 한다. 서로 이용해먹는 관계인 것이다. 저 오빠들과 놀고 싶은데 쪽수가 안 맞으니 걔네를 부르고, 반대로 걔네가 부를 때 나도 가주면서 강남에 있는 오빠들은 다 알게 되는 거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 중, 진짜 친구들은 몇 명이나 될까, 의문이다. 
나는 반대로 여자 친구들 관계가 너무 좁고 깊어서, 아는 남.사.친들이 이쁜 친구들 불러봐라, 이런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성 정체성까지 의심하더라... 하하하... 우리는 굳이 어느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여자들끼리 즐겁다. 치킨에 맥주라도 우리끼리면 즐겁고 흡족하다. 

다시 남녀로 돌아가, 연인 관계도 이러하면 얼마나 좋을까? 기다림 자체도 데이트처럼 느껴지게 하는 남자를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남자들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런 상대방을 만나면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떠오른다. 그런 막연한 생각들 가운데에서 상대방도 좋아하는 것을 끄집어내야 할 텐데!
생각해보니 내가 이성으로 느껴지는 상대방과 정말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산책’이더라. 뭘 먹고, 보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저 그와 걷고 싶은 것이다. 시간과 이야기, 풍경을 함께 나누면서. 
산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보편적인 취미였다. 그들은 산책을 하며 삶과 일상에 대하여 가벼운 명상을 즐겼다. 심각한 생각도, 가벼운 생각도 때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산책이다. 이러한 산책은 오히려 식사나 게임 같은 것과 달리 아무나와 하기 어색하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대부분의 산책은 혼자하려고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같이 걷고 싶다. 매일 같은 풍경 속을 걸어도 다르다. 같은 일상이라도 매일이 다르다. 그게 삶이다. 그런 길을 상대방과 함께 느껴보고 싶다. 우리는 어떤 호흡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그 날의 날씨는, 도시의 풍경은, 하늘은 무슨 색으로 저물까.

게다가 산책은 새로운 연인으로 하여금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운동신경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운동하지 않으면 뇌가 쇠퇴한다고 한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뇌는 운동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관상 예뻐 보일지 몰라도, 구석기 시대보다 인류의 뇌가 테니스 공 하나만큼 줄어든 것은 우리가 점점 움직이기 않아서란다. 
우리는 길 위를 걸으면서 뇌를 자꾸만 자극시키게 된다. 이거야말로 사랑에 최적화된 활동이지 아니한가! 자꾸만 서로를 상상하며 서로에 대해 기대하고 서로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는 이 행동들은 대단하다. 난 예전 칼럼에서 예술가들이 사랑을 잘 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들의 상상력이 풍부해서라고 썼었다. 그들은 상대방,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할 미래에 대하여 두렵지만 용감하고 다채롭게 상상했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오늘 날에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그 활동은, 두 뇌를 말캉말캉 사랑스럽게 만들어줄 거다. 

“저녁 먹을래요?”
“뭐 먹으러 갈 건데요?”
인기 많은 당신에게 누가 식사를 제안했고, 저렇게 메뉴를 물어 돌아 온 대답이 실망스럽다면 당신은 그 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매번 똑같은 데이트를 한다면 조금 진부할 수는 있겠지만 처음부터 저래서야 되겠나. 

그래서일까, 연인들이 많은 레스토랑들은 상당히 느긋하다. 그들은 서로가 눈을 마주치고 데이트를 즐길 시간을 준다. 서로 좋지 아니한가? 느긋해도 된다는 건 굉장히 축복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를 본다면 식전 주를 들어야할 지도 모른다. 
‘나의 주린 배까지 지배하다니, 당신은 굉장한 남자군요!’

이렇게 더운 날에도 그와 함께 걷고 싶다. 일부러라도 음식이 늦게 나오는 레스토랑에 가서 배가 고프지 않은 것처럼, 나는 평소에도 식욕에 지배받지 않는 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굴면서 식사를 하고 싶다. 아마도 평소 내 모습을 알던 친구들은 기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부러 내숭을 부리는 게 아니다. 다만 나의 몸과 마음이 한 데 어우러져 분위기 파악을 잘 해낼 뿐이랄까. 그런 이성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니, 그런 행운을 만났을 경우엔 그 비싼 음식 값을 낼 가치가 충분히 아니한가. 
맛있고 먹고 즐거이 걷고 싶다. 서로에게 집중하여 나머지 것들은 무심한 듯 지나치며, 그렇게 말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