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생아 시절 난, 두 눈을 감고 그 따뜻하고 편안하던 자궁 속을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 노스탤지어! 나의 이상향이여. 

[공감신문] 인간은 누구나 자기파괴적 욕망을 가진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백해무익하다는 담배를 피운다던지, 폭탄주를 말아마시고, 때로는 시덥지않은 낭만에 빠져 밖으로 나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삶은 실망 덩어리다. 희망있고 보람차고 아름답지 않냐고? 당연히 그러하다. 적어도 이렇게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세상이 엄청 부조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 세상이 이미 익숙해져서 작은 것에도 감동하는 귀여운 인간이 된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간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썼던 알베르 까뮈.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소위 '빡세게' 살아온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가 신생아 시절 중 잠에 빠지지 않아 있었을 때, 아마도 웃는 시간보다 울었던 시간이 더 길지 않았을까? 아마도 잠에 빠져서는 다시 그 따뜻하고 편안하던- 거의 영겁의 시간을 보냈으면 좋으련 싶던- 자궁 속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 노스탤지어! 나의 이상향이여. 
이 부모라는 사람들은 내가 뭐가 불편한지 알아채지도 못하더라. 자세가 불편한지, 기저귀가 더럽혀졌는지, 배가 고픈지 어쨌는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귀여운 부모님들이 내가 무얼하나 하기만 해도 기뻐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트림을 했다고 칭찬, 우유를 다 먹었다고 칭찬, 도리도리 칭찬, 잼잼 칭찬... 그런대로 버틸만한 인생이었다. 뭐만 해도 잘한다 잘한다, 해서 이 세상도 살만하구나 싶었었다. 사계절 같은 것도 나름 견딜 만 해진 것 같았다. 부모님 이외의 어른들에게는 '직업'이라는 게 있고, 그게 없으면 좀 외롭게, 아니 동떨어져서, 아니 동떨어'뜨려져서' 사는 것 같더라. 그래서 '나도 이 다음에 커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면 뭐든 그러라고 했었다.......가, 
갑자기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인간의 고난은 시작된다. 미운 7살.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 좀 빠른가? 한 5-6세부터 자꾸만 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 뭐만 해도 칭찬하던 엄마 아빠가 아니었나. 갑자기 뭐만 하면 하지 말란다. 그 뿐인가? 엄마,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축구선수가 될래요, 어휴 그런건 아무나 하니? 헛소리 하지말고 영어 단어나 외우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도 그래 우리 아들 최고다, 라고 하던 엄마였는데. 겨우 6살난 나에게 너는 축구선수될 재목이 아니란다. 
이런데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아니, 당신이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나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별로다. 어느 종교를 가더라도 인간보다 낫다는 신이 있다. 신들은 모두 인간을 사랑하고 굽어 살피신다고 하셨다. 우리 인류는 모두 보이지 않는 절대자, 신으로 하나되었다. 그런 신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시더라. 그런데 신의 아가페적인 사랑만 있나? 뉴스를 보더라도, 아니 사춘기 시절 나의 행동들만 떠올려보아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절대적이지 않더라. 말로는 아빠를 엄청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끔 아빠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일들이 많았다. 우리가 일생을 거쳐 가장 많이, 자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성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외로움의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외로움의 극치를 맛보게 해준다. 사랑은 변하고, 움직이는 거더라. 부모님의 사랑은 거의 안그랬는데, 또 배신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또 당하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외로워진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파괴적 욕망을 가질 수 밖에.

자기 파괴를 눈에 띄게 하는 부류는 보통 두 가지 타입이다. 우선 밝혀두건대 두 타입 모두 사랑과 관심을 더럽게 많이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을 준 이가 누구냐에 따라 타입이 나뉘게 된다.
첫번째 타입은 바로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은 타입. 그 중에서 그 사랑의 방식이 조금 어긋난 경우. 난 이전에 <가미카제 독고다이 자유 말살 시키기>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이 타입의 여성들은 대부분 나쁜 남자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하기를 원한다. 그녀들 눈에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불구덩이를 찾는 불나방이라고,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나쁜 남자에게 습관적으로 빠지는 모든 여성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여성들 중에 자기파괴적 욕망으로 이러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 타입의 남녀들은 술을 엄청 마셔대거나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왜? 부모한테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양육하는 방식이 옳지 않았었노라고. 
이런 타입들은 유년 시절 부모들의 기대를 온몸으로 듬뿍 받고 자랐던 타입이 많다. 부모들은 이들에게 '넌 뭐가 되어라', 라는 말을 줄곧 하며 심지어는 만나야할 남/녀 이상형까지 정해주기도 한다. 아이에게 감히 '난 어떤 어른이 될까' 꿈을 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냥 엄마가 시키는 대로해, 그게 다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도 정체성이 생기려 한다. 아이는 다 자랐는데, 부모가 지어 준 옷이 맞지 않을 뿐더러 어울리지 않는 자신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한들 자신이 독립할 만큼 잘난 재주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럴 만한 깡도 없다, 왜? 온실 속의 화초였으니. 그러니 자꾸만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엄마, 난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 심리로 자꾸만 부모님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하며 반항하는 것이다. 소심한 반항이다. 이런 자식들은 대부분 부모를 엄청나게 사랑한다. 그래서 이런 소심한 반항을 하는 것이며, 일부러 투머치한 나쁜 짓을 해대며 부모를 설득시키는 것이다. 정말로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소심하게 하는 것이며, 개선해나가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모의 희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게 상처받길 원해서 이러하다. 이 기간이 길어지면 좋지 않고, 심지어는 너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들이 당신의 자식을 빨리 인정하는 편이 현명하다. 

두번째 자기파괴적 욕망을 가진 타입은 바로 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타입이다. 신의 달란트(talent)를 듬뿍 받았다고나 할까? 우리는 이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천재들은 자기파괴적 욕망이 대단하다. 적당히 잘하는 부류들은 그렇지 않다. 적당히 잘하는 애들은 자신의 성과물이 나쁘지 않고, 그게 팔리거나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좋아한다. 그러나 천재들은 다르다. 그들의 기준은 절대적이다. 절대 대중이 아니다. '저 정도면 괜찮지 않아?' 아니다. 천재들은 한 끗 차이 때문에 본인에게 실망한다. 그래서 본인을 헤치려고 든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에서 천재 화가, 음악가, 작가, 배우들의 자기파괴적 욕망을 보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늘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의 그런 예민성조차 신이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깨어질듯 하다가도 그 순간에 무언가를 창조시켜낸다. 신은 그렇게 그들을 몰아가다가 선물을 주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파괴적 욕망은 좀 생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니냐고? 그러나 그 희열도 엄청날 것이다. 그는 그걸 감내할 수 있게, 아니 감내해야할 팔자로 태어난 것이다. 예술은 아무나 하나.

자기 파괴적 욕망을 가진 이 두가지 타입은 부모와 신, 그러니까 사랑을 주었던 주체들 이외에 또 다른 차이도 가진다. 첫번째 타입은 자존감이 침해당한 것이요, 두번째 타입은 자기애가 침해당한 것이다. 첫번째 타입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식이며, 두번째 타입은 보여주기 식이 아니다. 첫번째 타입은 자기를 찾기 위함이요, 두번째 타입은 자기가 원하는 정답을 찾기 위함이다. 
중요한건 이들 모두 외롭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과 나, 이 두가지 타입이 아니더라도 자기 파괴적 욕망을 가진다고 위에서 말했었다. 그나마 그게 자주가 아니라서 다행이란 거다. 우리가 저 두 가지 타입에 묶여 있지 않았음에 안도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모두가 엄마 자궁에서 잉태되어, 찝찝한 기저귀를 경험했고, 부모들의 배신, 사랑에 속아보고, 사람에게 데여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외로울 때- 그러니까 자기파괴적 열망에 사로잡혔을 때 서로를 이해하며 다독이고 건배해주지 않나! 그게 참 다행이라는 사실이다.
응, 다행이고 말고. 심지어 저 두 가지 타입보다 더 무시무시한 타입이 존재한다는데, 그게 아니라서 어찌나 감사한 지. 그게 어떤 타입이냐고? 저 두 가지 타입 중 한 가지에 속하면서 자신은 아닌냥 이 글을 읽고 혀를 끌끌차며, 심지어 SNS에 공유하는 인간들이 있더란다, 누구처럼. 그나저나 말이 되는 글을 썼는 지 모르겠다. 어제 혼자 한 병을 다 비운 화이트 와인과 데낄라, 위스키가 온 혈관으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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