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통 눈물에 젖은 그녀는 힘이 풀려 얼굴을 감춘 채 긴 전율을 느끼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중에서)

[공감신문] 영화를 보고나면 감상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간결하게 좋았다, 나빴다 정도를 적어두긴 한다. 철저히 편리에 의한 것인데, 하도 많이 보다보니 ‘봤나-안봤나’ 헷갈려서 기록하는 것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벌써 90편 정도의 영화를 보았더라. 오늘은 사랑 얘기를 할 거니,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멜로 영화를 꼽자면 <마이티 아프로디테>(1995)와 <러브미 이프 유 데어>(2003). 작년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라라랜드>(2016)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 멜로드라마들엔 공통점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해는 한다만- 완전히 환영받을 수 없는 사랑들. 냄비근성을 ‘한국적’이라 하고, ‘통 큰 것’을 중국적이라 관습적으로 표현한다. 그럼 이러한 사랑에도 국적을 갖다 붙여보자. 누군가는 이런 사랑을 ‘프랑스적’이라고 하더라. 

홍상수 연출 김민희 주연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베를린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물론, 칸 영화제에도 초청을 받았었다. 당시 외신들의 평도 대단했었다. 한 스페인 평론가는, ‘단언컨대 이번에 공개된 그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최근 10년 간 내가 본 가장 매력 적인 영화들 중 하나이다.’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들의 추문(?)에 대하여 그들이 모를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였다. 국내에서는 김민희가 한 것이 어떻게 ‘연기’냐는 여론이 거셌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러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스페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그의 작품들 중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 마도 감독이 영화와 가장 잘 맞는 고귀한 여주인공(the sublime protagonist)의 덕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sublime. 고귀하다, 숭고하다는 뜻이다. 감독에게 ‘가장 잘 맞는’ 숭고한 여인이라고 했다. 그 여인 덕에 최고의 작품을 찍었다, 라. 그는 그들의 사랑을 옹호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 영화는 수 십 개의 영화제 초청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호평을 이끌어낸 지역의 영화제는 단연 유럽이었다.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불편한 이유, 아니 불편을 떠나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프랑스적’보다는 ‘미국적’ 멜로드라마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적 멜로 드라마는 우리가 보면 굉장한 막장드라마다. 겨우 바람만 피우는 게 아니다.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고, 삼자동거도 한다. 그 뿐인가? <투 마더스>(2013)라는 영화에서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엄마 친구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 엄마도 친구 아들과 사랑에 빠지며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프랑스적 멜로드라마다. ‘amour!’의 대표 격과 같이 느껴지는 이 나라의 멜로드라마에 배신감이 느껴지는가? 어쩔 수 없다.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며 관능을 중요시 여긴다는 사실이다. 어느 한 매거진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건강한 섹스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83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던 반면(개인적으로 좀 충격적이다), 프랑스인들은 34퍼센트만이 그러하다고 했다. 조사에 임한 이들의 넓은 나이 스펙트럼을 감안하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관능’을 중요시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관능’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나마 <은교>라는 소설과 영화과 화제가 되었을 때 조금 화두에 올랐을 정도다. 극중 늙은 이적요 시인은 ‘관능에는 생로병사가 없다’라고 쓴다.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은 이해는 하면서도 이적요의 생로병사를 느끼지 않는 관능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관능을 잘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이것은 ‘성적 욕망’과는 정말 다르다. 박범신 작가는 sbs<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배우 한혜진에게 ‘관능적이지 않다’고 표현했다. 관능은 무언가 하나가 결핍되어 보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몸 좋은 남자가 섹시해보일 순 있겠지만 관능적으로 보이진 않더라. 그가 어딘지 슬픈 눈을 가진다면 모를까. 그래서 백치미를 가진 이들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영화 <투마더스>(2013)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에 있어 필요한 것은 관능보다는 ‘동지애’다. 인생을 함께 걷는 느낌. 한 평생 이 험한 세상을 함께할 파트너 말이다. 우리는 보험광고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그런 파트너를 찾는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족들의 안전을, 행복을, 그리고 자산을 지키는 파트너. 한국 사람의 사랑에서는 관능보다 의리가 중요한 것이다. 
천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국제시장>만 보더라도 우리 부모님들, 아니 이전 한국 사회의 부부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미국식 연애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식 사랑의 이상은 낯선 신대륙에서 부부가 멍에를 함께 짊어진 동료로 서로 의지하며 지난 400년간의 변화를 거치며 성장했다.’ (메릴린 옐롬, <프랑스식 사랑의 역사>중에서)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아는 세계 최강국 미국도 이전에는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 그 뿐인가? 미국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개척정신이 투철한 국민들이라는 것이다. 세계최빈민국이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다른 국가들의 롤모델이 되는 동안, 우리들은 미국사람들처럼 사랑하며 가정을 일군 것이다. 물론 이들의 마음속에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랑’의 감정보다는 견고한 ‘가족’이 먼저였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그래서 미국과 한국의 멜로드라마에는 ‘신데렐라’들도 많다. 그녀가 내 동지가 되지 못할 바엔 끌어올려 주는 것이다.

중국 국민들의 사랑 역시 비슷하다. 중국 부자들의 이야기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나. 중국판 신데렐라들은 더 어마어마한 수준일 것이다. 중국 작품들을 많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작년에 상해에 놀러갔을 때, 친한 언니의 아는 중국인 오빠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드라마에 투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자기도 까메오로 출연한 장면을 나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 장면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프로포즈하는 장면으로, 마지막회 거의 엔딩씬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잔뜩 화가 나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다가온다. 어쩌고 저쩌고 뚜이부-치 뭐라뭐라한다. 여자는 오해가 풀려가나 아직 화가 난 표정. 그러자 남자가 주머니에게 멋지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낸다! 프로포즈 인건가! 사람들은 옆에서 박수를 친다(여기에 수많은 까메오가 출연한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 반지가 맘에 안 드는 것이다. 남자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쪽 주머니에서 더 큰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꺼낸다. 그러자 여자가 두 개의 반지를 모두 받아들며 환하게 웃고는 남자를 껴안는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들은 부러워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중국의 역사도 만만치가 않았다. 심지어 이데올로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개인의 감정보다는 국가나 민족, 단체를 더욱 중요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중국은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지만, 프랑스적 드라마에는 아마 갸우뚱, 할 것이다. 
의리보다 관능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적 사랑은, 우리가 개인보다 앞서게 생각했던 가족을 깨뜨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것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2017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전쟁이 그 어떤 전쟁보다 더 아픈 이유는, 같은 민족이던 우리가 서로를 오랜 시간 동안 미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1927년생이던 우리 할머니만 하더라도, 생전에 뉴스를 보실 때 당신기준에 ‘빨치산’, ‘빨갱이’같은 사람 얘기만 나오면 열을 내셨었다. 한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 활동하던 남한 지역의 무장공비 세력으로,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 퇴각 때 합류하지 못하고 게릴라전을 펼치던 잔당을 일컫는다. 그런데 왜 ‘빨치산’이냐구? ‘빨갱이+지리산’ 이 두 단어가 합성하여 속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굉장히 토속적이고 한국적으로 보이는 단어가, 알고 보니 외래어라는 것이다! 그것도 마리 앙뚜와네트, 베르사유, 루브르가 숨쉬어온 빈티지가 오래된 ‘프랑스산’이라는 것! 프랑스어에서 당원, 동지들을 뜻하는 ‘partisan’(빠르티산)에서 유래한 것. 
‘party’는 영어에서 정당을 뜻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장인은 ‘arti’-‘san’이라고 한다. ‘party’-‘san’. 뜻을 함께하는 동지! 아, 그럼 우린 이전부터 작게 크게, 알게 모르게 수많은 빠르티산들과 함께였던 거고, 누군가의 빠르티산이기도 했던 거였구나. 이후 ‘빨치산’은 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 요원의 별칭으로 쓰인다.(두산백과 참조)

그가 내 인생의 동지, 반려자가 되어주는 게 사랑이요, 이게 한국적이라면,
사랑에 빠졌는데 그게 ‘동지’일 수도 있어요, 이건 프랑스적일 것이다. 
평생 변치 않고 나랑 사랑해 줄 것만 같아서, 그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한국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전세계의 사람들이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물어왔었다. 트루아 궁정을 다스렸던 마리드 상파뉴 백작부인은 사랑에 대한 심판을 내리길 즐겼다. 그녀는 1176년, 부부 사이에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판결을 남겼다. ‘남편’을 굳이 인생을 함께 가는 동지로 본다면 그녀의 입장은 이러했던 것이다.
‘빠르티산(partisan)과는 키스할 수 없어요!’

프랑스의 작품에도 의리 있고 오래가고 풍성한 사랑이야기가 많다. 아, 그냥 프랑스는 사랑 이야기가 엄청 많다! ‘프랑스적’, ‘미국적’, ‘한국적’이라고 엄청 선그어서 자극적으로 표현하긴 했는데, 그저 프랑스적 사랑은 다양한 모습들이 많구나, 라고 이해해주시면 독자 여러분들에게 무척이나 감사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을 즐겨보는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싶냐고? 
한국적 의리와 책임감, 그리고 프랑스적 관능이 아름답게 버무려졌으면 한다. 향수도 한 가지 향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잘 배합되어야 향기롭듯이.
아, 그러면 나는 빠르티산한테도 키스할 수 있을 것 같다! 응,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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