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종말-로버트 풀러

(출처:conquaestor.nl)

신분이나 지위는 인종이나 성별과 달리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오늘은 노바디로 치부되던 사람이 내일 갑자기 섬바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엔 여러 ‘ㅇㅇ주의’가 있다.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연령차별주의 등. 하지만 이들의 공통분모가 되는 ‘주의’가 있다. 바로 신분주의. 우리는 높든 말든 각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가문에 따라, 직장에 따라, 대학에 따라, 공간에 따라서 신분이 낮아지기도 높아지기도 한다. 세상엔 섬바디(특별한 자)와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자)가 있다. 지금의 나는 섬바디인가 노바디인가. 하지만 신분은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 ‘노바디’인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음식점에 가면 나는 고객인 ‘섬바디’가 된다. 오늘은 노바디로 치부되다가도 내일은 섬바디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가변성은 우리 모두를 신분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돌이켜보면 한번쯤 양쪽의 입장이었던 적이 있을 테다.

나의 ‘노바디’ 경험을 꺼내보고자 한다. 학창시절 용돈이 부족해 몰래 한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나의 찬란한 아르바이트 인생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후 호프집, 영화관, 고기집, 고급 레스토랑, 호텔 뷔페, 설문조사, 카페, 광고 촬영, 영상 편집, 마트 식품코너 등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웬만한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그동안 내가 만난 무수한 고객들에 대한 기억들. 대부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생생하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진상’이라 불리는 그들. 그 중 하나의 기억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법 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상영이 끝난 뒤, 정리를 위해 청소 도구를 들고 극장에 들어오니 출구 유도를 했던 아르바이트생이 한 노부부 앞에서 쩔쩔매는 게 보였다.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앞에 이십분을 못 봤으니, 이번 시간에 그 부분만 보고 나가겠다’는 할아버지. 당황하는 친구들을 대신해 내가 나서 정중하게 부탁드려도 요지부동이었다. 인기 있는 영화라 다음 시간 또한 매진이고 규정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공손히 안내해드리니, ‘그럼 서서 보고 나가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차 규정을 말씀 드리니 대뜸 불같이 화를 내는게 아닌가.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는지, 할아버지는 손을 올리며 “어린 게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어른한테 눈을 부라리고, 어?” 라고 소리쳤고 나는 때리거나 말거나 (못 때릴 걸 알았다) 할아버지의 매서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보다못한 할머니가 모시고 나갔고 할아버지는 극장문을 나갈 때까지 궁시렁 거렸다. “요즘 어린 것들은....” 그래서 나도 대답해 드렸다. “요즘 어르신들은 그래도 되나봐요~.” 

(출처:네이버 블로그 - 함영민 다찌)

이 일화를 읽은 어떤 사람은 어른한테 버릇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섬바디가 노바디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는 걸 참지 못한다. 옆에서 고객이 던진 영수증에 얼굴을 맞고 울던 동생을 대신해 맞대응 하기도 했다. 이것이 노바디의 예의없는 발악으로 보이는가. 

생각보다 섬바디와 노바디의 관계는 만연하다. 나의 경우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고객들은 ‘섬바디’,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노바디’가 된다. 그 외에 병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정치에서도,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신분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 자체가 불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위에 따라 오는 권력을 남용하는 세태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때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깔아 뭉개게 된다 하더라도. 

(출처:Linkedln)

“무슨 일을 하십니까?” (...) 신분은 자격을 부여하고 한계를 정한다. 
신분은 자부심의 원천이자 수치심의 원천이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하세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으레 받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생각보다 공포스럽다. 직업이 상대 자체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내가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에 따라 상대가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질 때도 있다. 더 간단하게 명함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다. 손바닥만한 빳빳한 종이가 나를 대신 설명한다. 명함을 보고 “오...” 하거나 “아...” 할테지. 하지만 세상엔 명함이 없는 사람도 많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아니 꼭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하는 건가. 내가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겐 별거 아닌 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섬바디가 아닌 것일까. 섬바디와 노바디의 기준이 대체 무엇이기에. 

로버트 풀러는 ‘이 세상은 언제나 차별과 부당한 처사의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게으름뱅이’, ‘불평 분자’, ‘무능력자’, ‘부적격자’, ‘배신자’, ‘엄살쟁이’ 등으로 불려왔다’고 말한다. 이 수식어들은 피해자들이 차별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이 못나서 차별을 받는 거다. 그러니 우리들이 차별 받는 건 당연하다. 이 말에 동의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내가 섬바디이니 노바디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고, 내가 노바디이니 섬바디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다.


노바디가 되기를 꺼리는 사람은 절대 새로운 섬바디가 될 수 없다. 
실패를 견뎌내고, 거기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길 원한다. 섬바디를 우러러보며, 실패할지라도 다시 일어나고, 섬바디의 자리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확실한 것은 우리들 누구나 섬바디가 될 수 있고, 노바디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몇년전 여행하면서 만났던 사람이 있다. 당시 그 분의 직업은 없었고 나중에 자기를 닮은 카페겸 술집을 차리고 싶어 하셨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그 분은 노바디이다. 하지만 누가봐도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누고난 뒤, 나에게 이 분은 섬바디가 되었다. 아마 그 사람도 자신이 섬바디라고 여기리라 확신한다. ‘섬바디가 되기 위해 반드시 1등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옮긴이의 말을 다시금 새긴다. 섬바디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 모른다.

(출처:진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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